인생 첫 9주 계약직 체험기
2020년 12월, 나는 나의 집,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왔다. 모두가 혀를 끌끌 찬다는 중2 시절의 나를 품어준 곳. 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정을 붙인 나의 두 번째 집이다. 처음 이곳에 온 것은 타의(아버지) 100%에 의한 이민이었다고 한다면, 저번 겨울의 나는 자의 100%로 두 번째 이민을 선택했다.
오랜만에 함께 지내는 가족들은 나에게 매우 관대했다. 편한 직장을 걷어차고 한국에 있는 대학원 들어갔을 때에도 그랬다. 염려가 조금도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나의 선택은 꽤 존중받았다. 많은 이들의 배려와 애정으로 나는 3년의 대학원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다. 마음의 빚(그리고 실제로 경제적 빚)을 진 분들이 많다.
2주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방을 나왔더니 나는 돌연 ex-대학원생, 백수(혹은 백조), 연애도 결혼도 언제 할까 싶은 30대 싱글 여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앞둔 자기 자식이지만 말이다. 마음이 슬금슬금 조급해져 오더니 일이 터졌다.
말을 몇 마디 나누게 된 사람들이 비슷한 질문을 던져왔다:
직업이 뭐야? 응? 아직도 부모님네에 얹혀 산다구?? 그게 너네 문화에선 괜찮은 거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싶은 질문들에 있는 그대로 대답했더니 그들은 왕창 솔직하게 반응하더라.
위기가 기회라고 했던가! 당황스러움에 멘탈이 흔들리더니 곧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알바 자리가 생겼다.
밴쿠버에서 촬영하는 애플TV 영화-드라마 (이제는 말할 수 있는) 파친코에 백그라운드 엑스트라를 연결하는 캐스팅 회사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어시스턴트를 찾고 있었다. 건너 건너 알게 된 고급 정보에 귀가 솔깃해져 곧 디렉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너네, 사람 구한다며? 나 실은 한국어도 할 줄 알고 대학 때 단편영화 제작팀에서 일도 했었어.
나 데려다가 써보는 거 어때....?
2월 둘째 주부터 시작된 9주간의 계약직.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수고가 필요한가!
소품이나 의상, 장소나 날씨 상황이 아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만 가능한 백그라운드 엑스트라. 매일 이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우리네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첫 출근날, 사무실에서 디렉터를 처음 만났다. 어떤 작품을 찍고 있는지, 어떤 감독이 연출하는지, 어떤 배우들이 출현하는지에 대한 브리핑을 지나, 매일 내가 읽고 체크해야 하는 부분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매 장면마다 필요한 백그라운드 엑스트라들을 촬영팀에 연결해주는 일이었으므로 주인공이 누구고, 그가 얼마나 잘 생겼으며, 전 세계적으로 몇 명의 팬이 그를 따르고 있는지 내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은 재빨리 흘러 제법 많은 숫자의 한국인 엑스트라들이 필요한 날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회사는 여러 방법으로 특정 인종의 사람들을 모았다.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는 이번 달에 밴쿠버에서 촬영하고 있는 시리즈는 이런 작품이고, 이러한 배우들이 참여하며, 이런저런 장소에서 찍고 있다는 카더라 통신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회사 지침 상 사무실 밖에서 작품에 대한 언급은 불법이었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된 한국인 사장님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묻기에 엑스트라 캐스팅 회사에서 알바 중이라고 했더니 '혹시!!!!!! 000이 주인공인 그 드라마요??????'라고 하시는 거다. 대답은 못하고 그저 웃었다.
촬영장에 갔던 어느 날, 주인공 얼굴 한번 스치려고 하루 종일 줄을 서서 기다리던 다문화 학생들을 보았다. 촬영을 마치고 나오는 대배우님의 눈짓 한 번에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그들의 열정. 주인공이 가진 마법이 그렇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몽실몽실하게도 만든다.
이토록 매력적인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건 바로 엑스트라의 몫이다. 엑스트라의 일은 주인공 앞, 뒤, 양옆에서 배경이 되어주는 일이다. 엑스트라가 없으면 가상의 시공간이 텅 비어버린다. 엑스트라가 없으면 이야기도 없다. 엑스트라가 없으면 주인공도 없다. 그래서 촬영 전까지는 아무도 신경을 안 쓰다가 촬영 날만 되면 모두가 신경을 몽땅 붓는 일이 엑스트라 캐스팅 일이라고 했던 거다.
결국, 엑스트라 한 사람 한 사람은 '주인공'만큼 중요했다.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20대 남성, 50대 여성 등), 특정 행동과 표정을 취해줄 수 있는 사람들(창 밖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을 짓는 옆모습의 20대 여성 등), 특정 의상을 입고 특정 위치에서 특정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동네 길가에서 놀고 있는 10살 미만의 아이들 등)이 꼭 필요했던 것은 엑스트라인 그들이 이야기의 한 코너에서 만큼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 배우가 받는 급여나 관심, 인기와 명예를 엑스트라가 얻진 못한다. 그건 배우가 가진 역할과 그 역할에 따르는 책임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주는 엑스트라들도 그들만의 역할과 역할에 따른 책임을 갖는다. 정해진 촬영 시간까지 의상을 챙겨 입고, 머리를 매만진다. 촬영 현장 내 정해진 위치를 차지하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맡은 움직임을 수행한다. 작가가 종이 위에 적어간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내, 그들은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숨을 쉬고, 말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주인공이 된다.
작가가 종이 위에 적어간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내,
그들은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숨을 쉬고, 말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주인공이 된다.
촬영 관련 정보는 촬영 바로 전날까지 확정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촬영 전날 밤이면 대기를 하고 있다가 정보를 받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스태프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몇 명의 엑스트라들이 필요하다고 했다가 현장 상황에 따라서 그 숫자가 현저히 감소되거나, 필요 없다고 해서 그렇게 안내를 드린 사람 몇 명이 다시 필요해지는 상황도 불가피했다.
촬영팀과 엑스트라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일은 이런 면에서 무척 곤란했다. 이번 촬영은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어요, 매몰차게 일정 취소 메시지를 보냈다가 — 아니 잠깐만요, 다시 여러분이 필요해요, 하면서 바짓가랑이를 잡는 일. 코로나 때문에 직장을 잃었거나, 급하게 며칠 동안 일자리가 필요한 경우라면 모를까, 자기 스케줄이 정해져 있는 분들은 이런 연락을 할 때마다 당황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였어도 황당했을 거니까.
최대한 민망함을 밀어내고 엑스트라 출연자들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맡은 업무를 제시간에 끝낼 수도 없고,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촬영팀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일이다 보니 최대한 간결하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 루틴이 되어버렸다.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사람으로 대하고 싶었으나 세네 글자의 텍스트로 다뤄야 했다.
매일 사무실 책상 위에서 '스트레스'를 외치면서 사는 디렉터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뭐가 저렇게 조급한지, 뭐가 저렇게 불안한지,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었지만 9주 정도 일을 함께 해보니 다른 사무실의 일과는 다른 영화 촬영 업무만의 스케줄과 형식이 어떤 점에서 크루들을 괴롭히는지 알 수 있었다.
9주의 일정을 마치면서 함께 일을 했던 한국인 엑스트라 분들께 이메일을 남겼다. 혹여나 촬영이 다 끝난 이후에 곤란한 문제가 발생해서 이 쪽의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 상황이 있으실까 봐 염려해서 미리 일처리를 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당혹스럽거나 속이 상한 분이 있으실까 봐 감사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 이메일 발송 이후 몇 시간 동안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는 몇 분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예약 잡아주어서 고맙다고,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다는 문자들을 읽으면서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수고로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음을 기억해냈다.
우리가 일을 시작하면서 스케줄이나 시급 같은 요소들을 협상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적이고 그만큼 값어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케줄도 보장할 수 없고, 시급도 때로는 에이전시에서 제안한 가격으로 무협상 딜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단역 일이라는 게 그렇다. 경험이라도 좀 더 있으면 더 달라고도 해볼 텐데 말이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주로 숫자로 계산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주연도 조연도 아닌 단역 엑스트라 배우의 가치란, 시급과 출연하는 장면의 수만큼 딱 정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현실이다.
신빙성 있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진심은 이랬다. 이름 하나 없는 단역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귀중했다. 그들이 한데 모여 배경이 되어주었기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정말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들 때문에 9주짜리 계약직 나의 알바 자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엑스트라가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는 역할이었다면 엑스트라 배우들을 촬영장에 연결해주는 내 일도 없었어야 하지 않나? 덕분에 9주 동안 촬영 분야의 일이 얼마나 고된지 확인할 수 있었고, 알바비 벌 수 있었고, 다음 직장으로 시간 많이 비지 않고 연결될 수 있었다.
촬영 현장의 형편상, 각자의 시급을 훨씬 넘어선 개개인의 존재의 가치를 다 아는 체 할 수 없었어서, 때론 촬영 일정에 준하여 달갑지 않은 연락을 했어야 했어서 죄송한 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남겨본다.
이름 하나 없는 단역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귀중했다.
그들이 한데 모여 배경이 되어주었기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코로나로 모두가 더욱 조심스러운 요즘, 촬영 현장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전엔 필요하지 않았던 1-2차례의 사전 코로나 테스트가 더해져서 캐스팅 일은 한차례 더 복잡해졌다. 촬영 예약을 잡기로 해둔 몇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코로나 때문에 걱정이 된다며 조심스레 참여를 취소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세상이 시끌시끌하고 몇 다리 건너 누가 코로나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엑스트라 촬영이 생명보다 중요하겠나. 그런 걱정, 이해가 되었다.
그냥 다들 사회적 거리두기 하면서 멀찌감치 떨어져 살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나 바이러스 전파, 침투가 빠른데 뭘 그렇게까지 나와서 일을 하고, 마스크를 낀 채로 나란히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손을 냅다 세정하면서 어울려야 한다는 말인가. 나 같은 집순이, 선택적 인트로버트는 할만한 생각이다.
사무실에서 엑스트라들을 현장에 연결해주는 일을 할 때는 몰랐다. 엑스트라로 촬영지에 가보니 이해가 되었다. 우리가 이토록 한데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 먹고살아야 하는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넘어서 우리는 서로 함께이고 싶어 하는, 함께여야 하는 이유.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서 수십 명의 촬영 팀과 수백 명의 스텝들이 필요하다. 주인공으로써 한 작품에 대표직을 맞는 주연배우들도 그저 간단해 한두 명으로는 부족하다. 전 세계에 어떤 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예술 작품의 기획부터 완성에는 그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인생은 어떠한가.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필요하다(It takes a whole village to raise a child)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속담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일생에 여러 사람의 인풋이 다 들어가 얽히고설켜 한 편의 인생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선택에 따라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만족과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선택, 그리고 그곳에서 파생되는 '다양성'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을 만나는 것,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지금, 각자의 문화와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여러 인생들을 엮어가는 커뮤니티의 필요성이, 여전히,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온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 수많은 역할이 필요했다. 주인공 아버지와 딸과 함께 작은 보트에 앉아야 하는 한국인 20-40대 남성들. 창가를 바라보는 옆모습의 20대 여성. 수산물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50대 여성. 길거리에서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 훈이와 양진의 딸 선자, 선자의 첫사랑 한수, 남편 이삭으로 흘러가는 4대에 걸친 한 가문의 이야기. <파친코>라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맺음하는 데에는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웃 동네 사람들, 오사카 현지인들, 그리고 각 등장인물의 인생에 왔다가 사라진, 혹은 끝까지 남은 캐릭터들이 있었다.
나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9주뿐인 계약직 일. 두어 번 현장에 나가 직접 체험해본 TV 드라마 엑스트라 도전. 4월에 끝난 업무 이후 나는 지금의 직장을 만났다. 당시에는 고된 일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 추억이 되었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서 신경질적이었던 디렉터의 열정과 에너지가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았다.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있던 나를 찾아와 위로의 생과일 주스를 건네던 연인은 이제 남편이 되었다. 동생은 엑스트라 촬영 현장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엑스트라 배우와 우정을 쌓아 함께 <파친코> 1화를 보았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타인을 통해 확장되고 공동체로서 성장해간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타인을 통해 확장되고 공동체로서 성장해간다.
파친코 촬영지인 리치몬드에서 촬영이 있었다. 시장 장면이었다. 어린 순자가 아빠 훈이와 장을 보러 온 날. 나는 시장에서 식사 거리를 사는 아낙네 중 한 명이었다.
그날 촬영장 내부를 가득 채운건 다문화로 꾸려진 촬영팀과 지원팀이 아니라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에서 각자의 이유로 조국을 떠나 이국땅 캐나다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 한국 동포들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살갑게 인사를 나누기는 어색했으나 몇몇은 촬영 중간마다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컷이 떨어지기 무섭게 헤어, 메이크업, 의상 때문이었는지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2002년에 이민을 오고 중간중간 미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했던 시간까지 다 합해서 20년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보다 이민자라는 정체성이 몸에 더 잘 맞는 한국계 캐네디언으로 살고 있다. 그런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신기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너무나 다른 배경과 이야기를 가진 서로 다른 우리가 한민족 한 피라는 것. 특히 부산 영도에서 1900년대 초에 고된 인생살이를 했을 조상들의 머리 모양, 얼굴 생김새, 옷을 입고 보니 더더욱 그 사실이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내에서 사는 자국민이 아닌 타지에서 소수민족 이민자로 산다는 건, 늘 내 집을 떠나 방랑하는 객과 같은 기분이다. 인생이 여행이라지만 그래도 좀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다. 여행 가방을 매일 싸고 매일 풀고, 다음날 일어나서 또 여행가방 싸고 밤에 다시 푸는 수고로움은 생각만 해도 불편하지 않은가. 여행가방 열어놓은 채로 몇 달을 살아보니 늘 초조하고 꽤 초라하더라. 나 자신이. 나의 상황이. 심지어 나의 미래마저.
그런데 모두 한자리에 모여보니 좀 달랐다. 객보다는 주가 된 느낌. 한국말로 떠들어도 이상하지 않는 촬영장 공기였다. 분명 캐나다인데, 리치먼드인데, 촬영팀이나 지원팀과 함께 였는데. 우리는 한국 이민자들이 맞는데 우리 집에 저네들이 놀러 온 것 같더라. 호스트와 게스트의 자리가 바뀐 것 같았다.
같은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면, 그리고 자리를 함께 지키면 그곳이 두 번째 집이 된다. 집이 어디냐고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되고, 집이 아닌 것 같다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 곳이 집이 되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고향이 아닌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같은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면,
그리고 자리를 함께 지키면
그곳이 두 번째 집이 된다.
누군가의 예약을 취소해야 할 때마다 디렉터는 내게 '이 일이 너무 싫다, '라고 했다. 스토리에 딱 맞는 캐릭터의 배우를 구해서 촬영팀의 승인을 받게 되면 '이 일이 너무 재밌다, '라고 했다. 조울증도 그런 조울증이 없었다. 뒤돌아서면 기분이 제멋대로 변하는 디렉터를 처음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9주를 채워가면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거구나, 하고.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하다 보니 하게 된 일을 하며 살아간다. 개중에는 하다 보니 하게 된 일을 하는 사람이 제일 많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 순인 것 같다.
종종 우리는 자아를 일과 혼동한다. 자신의 가치도 일과 늘 헷갈려한다. 일이 받는 평가를 나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로 듣고 마음에 비수를 맞은 사람처럼 헤롱 댄다. 일이 만들어낸 결과를 나라는 사람의 미래인 것처럼 받아들여서 술에 진탕 취해 현실을 애써 피하거나, 어깨에 뽕을 잔뜩 집어넣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일은 나 자신이 맞다. 우선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기질, 성향, 성격이 많이 스며들어 갈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일이 내가 되어가는 거다. 일도 그러고 싶진 않을 거다.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가 제일 많은 시간과 애정과 노력을 퍼붓는 그 업무가 나를 제일 많이 닮는다. 잘 풀리면 그만큼 나도 잘 풀리고 있다는 거고, 안 풀리면 나도 그만큼 꼬이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일은 나 자신이 아니기도 하다. 일은 그저 내가 맡은 업무, 내가 맡게 된 이름, 내게 맡겨진 기간이 정해진 프로젝트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사실 내 과거, 현재, 미래와 별로 상관이 없다. 나는 꽃다운 20대 중반인데 내가 하는 일은 대다수 엑셀로 해결해야 하는 사무직일 수 있다. 나는 꺾이기 바로 직전
40대인데 내가 하는 일은 젊어도 한창 젊은, 급변하는 온라인 세상에 발맞추는 디지털 마케팅일 수 있다. 그냥 좀 다른 게 아니고 완전히 천지 차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나랑 일을 섞지 않아도 된다. 맘에 안 들고 안 풀릴 때 싫네 미치겠네 죽겠네, 말고 맘에 안 드네, 오늘따라 안 풀리네, 하고 넘어가도 된다는 거다. 조울증 환자처럼 머리카락 쥐 뜯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나랑 일을 섞어줘도 된다. 이런 일을 또 요렇게도 푸네? 싶으면 참 내 인생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요렇게 풀릴 수도 있구나, 하면서 감동해줘도 된다는 거다. 조울증 환자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
계약이 끝날 때쯤 주조연급으로 활동하는 캐네디언 배우 남편을 따라 캐나다 동부로 간다고 했던 디렉터. 부디 그곳에서는 일 때문에 기분이 시시각각 변하지 않고, 무얼 하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만족하는 시간이 긴 사람으로 살고 있길 바란다.
종종 우리는 자아를 일과 혼동한다.
자신의 가치도 일과 늘 헷갈려한다.
계약직이라니. 처음엔 그 단어가 좀 낯설었다. 3년을 가열하게 달려 대학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낸 곳에서 답장을 받는 게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알바라도 해야 했는데, 모든 게 걸렸다.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이. 집에 얹혀사는 처지. 우회를 해버린 전공, 등등.
어쩌다 알게 된 공고 소식에 디렉터에게 포부가 가득한 이메일을 보내면서 이렇게 일을 구하게 될까? 싶었다. 읽고 모른 체 하면 그만인 그들의 입장이 100% 이해가 되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과, 적극적으로 들이댔던 자세가 급히 사람을 구하고 있던 그들에게 플러스로 작용했다.
교회나 기관에서 풀타임 사역자로 일을 시작하고 싶었는데, 역시 현실은 나의 예상을 뒤엎었다.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서 그러려니, 하긴 했지만. 9주 계약직. 영화와 드라마에 백그라운드 엑스트라를 연결해주는 에이전트 업무. 미디어 산업 분야, 특히 영화 제작을 동경했던 나에게 주는 선물 패키지 같았다.
일은 나의 상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대학 1학년 때 뉴욕 필름 아카데미에서 예비 영화인으로서 작품을 만들던 친구들의 얼굴이 빠르게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당시 함께 발품을 팔아가며 촬영을 돕곤 했었는데, 그때의 로망은 잔인한 리얼리티가 되어 나를 밤낮 괴롭혔다. 대신, 나는 사유의 시간을 얻었다.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삶의 주인공이라는 나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해서. 이민자 공동체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서방님과 날을 잡아 <파친코>를 시청하려고 한다. 혹시나 화면 속에 우리가 슬쩍 스치기라도 하면, 정말 <파친코>의 주인공이 된 마냥 호들갑을 떨어 볼 테다. 오랜 기간 집을 떠나 공부하고 일하며 내놓은 자식처럼 살다가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던 작년 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통해서 나를 다듬어가신 주님께 수상소감 하듯 감사의 찬양을 전하면서 말이다. ㅎㅎ
P.S. 늘 읽을 거리가 부족해 지겹도록 인터넷을 뒤지는 분들은 저의 카카오뷰 더 에세이스트 클럽으로 오시면 됩니다. 제가 읽는 기사들을 모아서 큐레이션 하는 공간입니다. 주로 글쓰기, 기록, 삶에 대한 다양한 아티클들을 모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공지사항>>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운영했던 개인 뉴스레터를 오랜 기간 쥐고만 있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부족했던 탓, 행동력이 약했던 탓이지요.
2,000분이 넘게 사인업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다시 시작합니다. 더 에세이스트 클럽.
에세이쓰기에 진심이신 분들 모아 함께 다양한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여기로 들어와 주세요.
4월 중으로 소개글 하나가 여러분의 이메일 인박스함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Sources:
Main image by Pachinko
Caption images by 9to5Mac, Yoona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