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바깥이 아닌 내면의 평화가 필요하다
해가 길어지고 대부분의 날들이 화창한 초여름, 직장에서 주최하는 리트릿(retreat, 수련회)을 떠났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British Columbia의 북서부에 위치한 말리부 Malibu라는 지역은 페리와 자동차가 없이는 접근이 어려운 곳이다. 아침 일찍 밴쿠버를 출발해 오후 늦게 말리부에 도착하면, ‘아-’ 하고 나지막한 탄성을 뱉게 된다. 푸른 하늘과 높은 산, 광활한 바다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미나와 자유시간을 적절히 보내고 있다가 동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온타리오에서 온 두 친구가 내게 애니어그램 결과를 묻는다. 나는 기억을 헤집고 ‘9’라고 대답한다. 애니어그램 9는 안전감을 중요시하고 갈등을 회피하는 평화주의자 성향이다. ‘어, 나돈데?’라고 반응하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각자 다른 번호를 외치며 자신의 성격을 알려주는 동료도 있다.
한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MBTI는 마이어-브릭스 성격 테스트이다. 성격 테스트 좀 한다 싶은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MBTI를 얘기하면서 너와 나의 연결고리 및 갈등의 지점을 논한다. 밴쿠버에 사는 성격 테스트 덕후들은 좀 더 나아가, 애니어그램 열풍을 지나는 중이다.
1부터 9까지의 성격 유형. 그리고 각 숫자마다 바로 앞과 뒷 숫자가 날개 유형으로 따라붙는다. 나의 경우 9 타입의 윙(wing, 날개) 1으로, 중재자이자 몽상가 유형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평화롭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 과거의 나는, 유난을 떨면서까지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구걸하며 살아온 것 같지 않았는데, 이제와 보니 나는 마음속 깊이 평화와 평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내 주변은 꽤 시끄러웠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배드민턴, 한국무용, 합창부 활동을 즐기면서 했고, 참여하는 행사도 많았다. 게다가 집에서는 활동적이고 어른스러운 장녀로, 어린 동생 둘을 챙기는 오지라퍼 큰 딸이었다. 엄마는 대체로 고요하고 편안해 보이는 매너리즘을 가진 사람이었고, 아빠는 화를 잘 내고 목소리가 큰 우리네 아버지의 흔한 표본이었다.
초등학교 3-4학년 즈음이었다. 수학이 점점 어려워져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아빠가 일일 수학교사로 나서 주었다. 왼쪽에 내 키를 훌쩍 넘는 높은 책꽂이가 딸린 원목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고 있었다. 무슨 이유였든지 아빠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고 전국투어 중인 로커처럼 샤우팅 중이었다. 주변 환경이 큰 소용돌이에 빠지면 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스트레스 지수가 솟구치고 나는 도피하고 싶었지만 아빠가 일일교사로 나선 이상 내가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문제를 마저 풀고 그날의 공부를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집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심하고 사랑스러운 잔소리를 24시간 시연하시는 할머니와,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K-아빠, 조용하고 바쁜 엄마, 자주 나를 따라다니며 함께 놀고 싶어 하는 여동생, 아무것도 모르는 막둥이 남동생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바쁘고, 집에 오면 다시 바쁜 내 초등학교 시절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친 후 캐나다에 오면서 다른 종류의 갈등과 혼잡함이 내 인생에 들어섰다. 잘 모르는 세상, 잘 모르는 언어, 잘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두 번째 집.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얼 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은지 알 겨를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온갖 바쁨과 다양함 속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1학년일 때부터 인턴쉽을 구해서 패션쇼장을 뛰어다녔고, 2학년을 마친 후엔 바로 맨해튼에 있는 패턴 공장에서 알바를 했으며, 3학년 전까지 무려 2년이 넘는 휴학 시절을 가졌다. 그 시절엔 이게 최선이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한 관념들이 정돈되기 전이었고, 상황 따라 나를 맞추며 사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돌고 돌아 다시 밴쿠버에 와있다. 결혼을 했고 비영리 기관에서 일을 한다. 전 세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이곳 캐나다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을 만난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이 세상 속에서 무엇이 나에게 맞는 방향인지 찾을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를 헤엄쳐 가고 있는 아이들. 이들을 보고 있으면 당시의 내게 필요했던 것,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것은 늘 변함없이 ‘평화’였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고, 외부세계의 소음이 최대한 차단되어 있으며, 남이 해준 밥으로 삼시 세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리트릿.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고 있는 순간에 나는 평화를 느낀다. 내 애니어그램은 9번이고, 9번 유형의 사람들은 부 조화로운 모든 것들을 온몸으로 거부한다고 하는데, 여태껏 나는 어떻게 살아냈을까? 그 작은 몸으로, 그 작은 머리로, 그 작은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어떻게 소화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마음이 복작하면 수련회장으로 떠나고, 누군가 내 성질을 긁을 때마다 캠핑을 떠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일상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고, 그건 이민을 오나 안 오나 모두에게 똑같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일상이라는 짐. 그 짐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평화가 아닌 내부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어린이들은 처음 화가 난 어른을 보면 당황하지만, 계속 분노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되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때로는 자리를 피하고, 때로는 그 안에 머물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초등교육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고, 점점 복잡해지는 수업 내용을 혼자서 소화할 수도 없는 상황. 나는 그저 감정이 풍부하고 그 감정을 필터 없이 표현하는 아빠를 (반면) 교사 삼아 공부를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좋은 표본이 아니라면, 표본으로 삼지 않는 옵션도 존재한다.
영어 간판이 그림이 아닌 문자로 보이기까지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학교를 가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동네가 익숙해지고, 헷갈리기만 하던 도로의 방향들이 명확해지면서 나는 그냥 이게 나의 새로운 현실이거니 하고 모든 걸 받아들였다. 학생수가 2천 명을 웃도는 세컨더리 스쿨(secondary school, 중고등 통합학교)에서 부끄럼을 많이 타고 영어도 잘 못하는 ESL반의 한국인이지만, 그게 조금은 남사스러운 타이틀이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냥 부딪히는 수밖에. 매일 어설픈 영어로 책을 읽고 과제를 하는 수밖에. 같은 학교 백인들이 맥도널드 케첩을 옷에 집어던지고 깔깔대며 등을 밀치면, 힘이 남는 날에는 한국말로 소리를 꽥 지르면서 나 자신을 지키고, 힘이 부족한 날에는 너는 짖어라, 나는 가던 길을 간다, 라는 자세로 그냥 앞을 향해 걸었다.
가진 돈 안에서 장을 보고, 부족한 건 알바로 채웠다. 뉴욕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원은 사람이었으니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간접 경험을 쌓아 갔다. 학교에 다닐 수 있을 때 출석하고 공부를 멈춰야 했을 때 휴학을 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일상의 파도를 탔다.
환경은 변한다. 상황은 바뀐다. 가끔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지기도 한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문제들도, 그 문제를 지닌 사람들도 다 내 두 뺨을 스쳐 지나갔다.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웃음으로. 내 삶을 무지막지한 파워로 통과하는 사람이나 사건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정말 하나만 선명해졌다. 나는 ’평화‘를 원한다는 사실 하나.
비교적 자비롭고 부드러운 삶에 들어서자 아주 미묘한 변화에도 나는 더욱 예민해진다. 결혼이라는 안정된 관계와, 취직이라는 정착된 상태가 나를 그런 사람 중 하나로 만든다. 아, 이런 거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매우 창의적인 잔소리로 나를 감동시키던 할머니가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이제는 마치 잔소리 같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 있다. 수학 문제 하나 제대로 못 푼다고 나를 타박하던 아빠가 여행 간다고 큰딸 부부에게 깜짝 서프라이즈 용돈을 건넬 만큼 바뀌었는데, 이제는 길거리에서 본 낯선 아저씨가 대뜸 악을 써대며 나를 위협하기도 한다. 남자 직원에게는 한도 끝도 없이 자상하면서 여자 직원들에게는 온갖 부당한 방법을 동원해 일만 시켜대던 옛 상사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는데, 직장은 물론 내가 살아가는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은근한 차별과 불균형적 대우는 여전하다.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평생에 걸쳐도 찾을 수 없는 게 평화다. 평화를 추구하는 자세는 좋다. 그런 자세야 말로 세상과 사회를 전보다는 더 멋지고 안전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평화는 밖이 아니고 안에 있다. 우리 안에. 당신 안에. 내 안에.
애니어그램 9번 유형의 사람들이 건강할 때는 뛰어난 공감력과 창조력 및 자기 자신에 대한 평온함과 절제를 자랑한다고 한다. 또한, 타고나기를 갈등과 분노를 회피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임은 물론 표현할 때, 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삶에 임하게 된다.
내면의 평화가 필요한가? 우리 안에 내재된 공감하는 능력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타인을 아우르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보듬어야 할 것이다. 고생이 많았다, 지금것 참 안팎으로 시끄러웠지? 네가 느끼는 감정들은 쓸모없는 감정이 아닌 모두가 다 타당한 감정들이야,라고 말해주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처음은 어렵고 서툴러서 자주 당황하게 된다. 괜찮다. 뚜벅뚜벅 앞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어느 날, 단어와 문장, 문단과 책 전체가 이해된다. 나를 향해 인종차별적 행동과 언어로 공격해오던 사람들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도 그와 같은 장소에 편안하게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내 몸이 불편하다고 외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와 성장이 있다고 나를 다독이면서 적극적으로 해결방안을 찾게 된다. 그렇게 서서히, 내 삶에 조용히 나타난 갈등들을 피하지 않고도 평화를 느끼게 된다.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평화가 내 삶의 바깥으로까지 흘러넘쳐 ‘나는 정말 평화롭다,’라고 나지막한 탄성을 뱉는다. 정말 그렇게 된다.
Sources:
Images by Yoona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