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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a Kim Oct 27. 2022

이민 20년 차, 아직도 영어를 공부한다

건강하고 즐거운 ESL의 자세


중학교 1학년을 마친 해 9월 30일, 14살의 나는 밴쿠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올 가을로 딱 이민 20년 차가 되었다. 9학년으로 처음 출석한 학교인 Killarney Secondary School은 다민족 아이들이 많은 밴쿠버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영어 거주국에서 온 이민자 아이들은 기초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프로그램에 배정을 받게 되고, 나도 정규수업 배치 전에 ESL 수업을 들어야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는 한 중국 자매가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집에서도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하루는 서로에게 영어로 말하고 있는 두 자매에게 담당 선생님이 말했다. "서로에게는 영어를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선생이라면 영어가 부족한 학생에게 더욱 영어 사용을 생활화하라고 말할 텐데, 반대로 조언하는 것이 신기해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었다. 둘의 발음이 너무 좋지 않아서 계속 영어로 대화하다 보면 그 발음으로 굳어지게 될 거라는 게 그녀의 염려이자 제안이었다. 하긴, 나도 그 친구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 영어가 부족해서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친구들의 발음도 심각했던 거였다.


ESL 영어 시간에는 돌아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코너가 있었다. 우리는 해리 포터를 읽는 중이었고, 나는 매번 일어나 책을 읽기가 너무 싫었다. 해리포터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헤르미온느를 영어로는 “헐-마이-오니-”라고 하는데 이 발음이 절대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매번 헤르, 허, 허 헤르... 하면서 당황했기 때문이다. 당황하면 안 그래도 안 되는 영어가 더 막히곤 했었다. 쥐구멍에 머리가 들어갈 리 없었지만 그래도 있다면 숨고 싶었다.







영어로 일상생활과 소통이 가능해진 지금, 나는 매주 한 번씩 근처 고등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14살의 나를 마주하는 곳, 바로 ELL 수업시간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ESL 대신 ELL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ELL은 English Language Learner의 줄임말인데, 다문화 아이들에게 있어서 영어는 제2국어가 아닌 제3 혹은 제4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을 포용하기 위한 표현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공교육의 특성상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듯 그때와 지금은 많은 점이 비슷하다. 아이들은 짝을 이루어 리서치 프로젝트를 하고, 자신의 이름과 나이, 가족과 취미를 소개하는 발표를 한다. 수업 시간 전에는 10분씩 사일렌트 리딩(Silent reading)을 하면서 책을 읽지 않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억지로라도 책을 읽도록 한다. 자신들의 언어로는 충분히 가능할 법한 내용들을 초등 그 이하의 수준의 영어로 다시 배우는 아이들. 간혹 발표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그 답답함이 느껴진다.


 생각보다 지혜롭고, 예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아이들. 이들은 영어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영어가 우리에게 지우는 무게에 대하여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대학을 갔을 때 나는 19살이었다. 알바를 하면서 수업에 가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 나는 수줍음이 많은 10대 이민자 소녀에서 발랄할 20대 유학생으로 신분세탁(?)을 했다. 나이도 한몫했겠지만, 뉴욕이라는 환경이 나를 많이 바꾸었다. 밴쿠버보다 한층 더 다문화적인 도시에서는 문법 좀 틀린다고 해서, 발음 좀 어색하다고 해서 나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바쁘게 친구를 만들었고, 어느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대학 2년을 마치고 나서 휴학을 할 때쯤 나는 생존을 위해 한국으로 가 영어 교사가 되었다. 새벽에는 전화영어 교사로 출근하는 직장인이나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배우들과 영어회화를 했다. 낮에는 목동에서 영어도서관을 운영하고 퇴근 후에 재수학원에서 재수생들을 가르치고, 때때로 개인과외를 했다. 틈틈이 아는 언니 부탁으로 영어 원서를 번역하는 알바까지 하면서. 


밴쿠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내내 나와 함께 했던 영어. ESL 수업을 듣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후 휴학을 하는 내내 영어와 함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어가 아니라 영어가 나에게 지우는 무게를 지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캐나다에 사니까, 미국에서 공부하니까, 영어는 자연스레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당연히 잘해야만 하는 무거움으로 내 어깨에 늘 지워져 있었다.







영어가 '무거운' 이유


일제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영어를 정말 잘하는 민족이었다. 한국은 영어로 쓰고 말하는 영어 몰입식 교육을 고수하다가 일제강점기부터 문법 번역식의 교육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조 코이(Jo Koy)가 자신의 어머니의 나라인 필리핀에 가면 어디서 누구와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한국에 가면 길 하나 잘못 물었다가 북한에 다다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개그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몇 해 전에, 유럽에서 온 해외 유학생이 나에게 일반적으로 영어 사용이 어려운 한국생활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만큼 해외에서 생각하는 한국 내의 영어는 먼 옛날 성공적인 영어 몰입식 교육이 아닌 일본의 문법 번역식에 제한된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고종 23년에 설립된 왕립 육영공원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현대식 영어학원과 같았다. 미국에서 온 청년 원어민 영어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직접 한국인들을 가르쳤다. 100% 원어민 수업으로 진행된 이 영어학원(!)에서는 8개월 만에 3천 단어를 외우는 열성적인 학생들 때문에 곧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어교재를 보면 무척 구체적인 영어 발음 표기에 놀라게 된다. 오렌지는 '오란쥐'로 러브는 '을노ㅇ브', 브이는  'ㅇ뷔'로 표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영어는 출세의 지름길, 즉 폐지된 과거제도를 대신하게 되었고 많은 지식인들과 사회의 리더들이 영어를 통해 서구 사회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항상 뒷전에 밀려나 있던 여성들도 영어를 습득하면서 유학을 떠나 더 심도 있게 공부를 하기도 했고, 배운 여성들(!)의 움직임은 여성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출처: “을노브가 무엇이오” 영어에 푹 빠졌던 조선, 일제의 교육이 망쳐놨다)


영어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뛰어난 사람이 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업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어가 한국 근대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금만 살펴보아도 '영어'라는 언어에 늘 따라붙는 우리가 가진 인식이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영어는 나라를 지키거나 바꿀 수 있는 기회였고, 나와 내 가정을 대한민국 땅을 넘어 저 미지의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는 발판이었다. 아니, 어쩌면 영어는 지금도 우리네 삶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영어는 도구일 뿐인데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내게 영어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나에게 영어는 외국어의 의미를 넘어서 매일 내가 써야 하는 일상의 수단이자 삶의 방법이다. 때로는 어떤 이의 문장이 내뿜는 콘텍스트나 리퍼런스를 이해할 수 없어서 내가 이 땅에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끝내 상기시켜주는 못된 친구이기도 하다. 가끔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속 시원하게 내뱉게 되어서 낯선 뿌듯함을 안겨주는 서프라이즈 선물 같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건 영어는 나와 아주 가까운 자리에 항상 있다는 점이다.


고군분투하며 영어를 공부하는 ELL의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영어 단어가 들리지도 않고, 영어 문장이 읽히지도 않아 애를 먹었던 10대의 내가 떠오른다.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해도 해도 내가 부족하다는 자존의 문제였다. 영어를 얼마나 수월하게, 유창하게 하느냐가 나의 존재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어른의 자리에서, 영어라는 큰 스트레스를 짐덩이처럼 머리에 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인정을 하게 된다. 동시에 영어는 절대 '나'를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며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소통'하게 하는 '도구'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한다.


ESL이라는 단어가 ELL로 바뀐 것만 봐도 언어의 국제적 흐름이 제2외국어에서 다국어로 변해가고 있음을 몸소 느끼게 된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처럼 언어의 관점에서도 제2외국어가 아닌 다국어를 논하는 다국어 사회로 향해 가는 중이다. 다국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다문화 사회. 다양성과 포용성이 중요해지는 만큼,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영어로 다가가고 마음으로 포용하다


어느 여름방학, 책 100권을 읽어보라던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다. 나는 50여 권을 읽었다. 그때 영어가 한결 쉬워졌음을 체험했다. 한국 친구들과 만나서 한국 책을 읽고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을 즐겨하던 나는 매우 더디게 영어실력이 향상되었다. 나는 항상 부족하다 생각했고, 쑥스러움에 문장을 던지기가 어려웠다. 영어가 단순한 소통의 도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습득이 아닌 대화에 좀 더 초첨을 맞추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쉽다. 나의 성향과 성격 그대로 나를 드러내도 괜찮다는 걸 알았더라면, 완벽함보다는 표현에 더 초첨을 맞추었을 텐데, 이 점도 아쉽다. 


아이들이 학교생활 중에 영어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자꾸 다른 문화권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 나의 문화,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연습을 하기를 권한다.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지고, 모르는 단어가 많은 책을 자꾸 펼치는 연습을 하기를 바란다. 이런 연습들을 통해서 우리는 점수를 잘 받기 위함이 아닌 친구를 만들고 타인을 더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영어를 만나게 된다. 소통의 도구로 영어를 사용하다 보면 사람을 넘어서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을 얻게 되고, 나와 다른 문화와 의견을 수용하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된다. 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종이 쪼가리로 전락하지만, 식견은 우리 속에 영원히 남는다. 


영어를 일상생활의 언어로 사용하게 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각기 다른 환경과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이 언어를 배웠다. 내가 얼마나 많은 단어와 표현을 아느냐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내게 영향을 미친 건 나의 마음가짐이었다. 다국어 사회에서 내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을 때, 저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조금 다른 이야기를 가진 한 사람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쉽게 입술을 열고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소통이 시작되자 훨씬 빠르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민 20년 차, 아직도 영어를 공부한다


영어는 소통의 수단이자 기한이 없는 배움 거리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100세의 철학자로 유명한 김형석 교수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비결로 공부를 꼽았다. "항상 공부를" 하고 "뭐든지 배워야" 정신이 늙지 않고, 그중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독서"를 추천했다. 영어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 영화를 보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바로 뜻을 찾아보고 머리나 노트에 저장하는 습관. 아마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할 영어공부 방법일 것이다. (출처: 김형석 "100년 살아보니 알겠다,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두 부류")


올해로 이민 20년 차가 되었다. 현지 비영리기관에서 일을 하고, 중국계 캐내디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더니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이 영어로 이루어진다. 주변이 온통 원어민들인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가 잠시 케이타운에 있는 한아름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있을 때면 내가 캐나다에 사는 한국계 이민자임이 실감이 난다. 집에서 신랑과 부부싸움을 하다가 말이 탁 막히면, "나 ESL이야!" 라며 버럭 하고는 곧바로 웃을 수밖에 없는 이민자. 내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제2외국어라는 사실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당연히 나는 영어가 제1언어인 캐나다에서 외국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요즘처럼 당당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이민자로, 나의 고향이 아닌 이민 거주국인 캐나다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영어를 공부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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