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소소한데 마음의 크기는 커져가는 신기한 밴쿠버 생활
고등학교 시절 합창부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있다. 그는 중국인 엄마와 캐네디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된 후에 미국에서 일을 하면서 전 세계, 특히 유럽과 중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그가 밴쿠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다운타운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뉴욕에 있을 때 차이나타운과 소호를 거닐면서 수다를 떨고 왁자지껄 웃던 우리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유쾌하고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많았다.
우리의 다음 주제는 자연스럽게 '밴쿠버'로 흘러 넘어갔다. 밴쿠버에서 계속 살고 있거나, 밴쿠버에 살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친구들, 그리고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가 다시 밴쿠버로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게 하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밴쿠버는 친구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국제도시라고 알려져 있고,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 1, 2위를 다투는 이곳에서 왜 이와 같은 뉘앙스의 푸념이 반복하여 들려올까.
도심에서 고개만 살짝 돌리면, 산과 산이 겹쳐진 전경을 볼 수 있다. 차를 타고 조금만 더 달리면 해변에 닿는다. 밴쿠버는 자연과 매우 가까이에 위치한 도시이다. 도시 왼쪽에서 반대편 오른쪽으로 가는 데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생각보다 그 규모가 매우 작아서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시골 감성을 가진 국제도시라고 볼 수 있다.
밴쿠버의 시골 감성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리치먼드 Richmond에 위치한 밴쿠버 국제공항이다. 밴쿠버를 대표하는 공항으로 이름에는 '국제'가 붙어 있지만, 코로나 이전에 해마다 8백만에서 많게는 천오백만의 여행객을 기대하는 곳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1년에 7백만 명의 사람들(2021년 통계)이 거치는 공항이 되었다. 한국의 인천공항이 코로나 직전인 2019년에 7천117만 명의 이용객을 맞이했던 걸 보면 소소한 밴쿠버 공항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공항의 크기만큼 사람들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줄이 그어져 있는 듯하다. 식당이나 바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뉴욕에 살 때는 동네 앞 길거리에서 누구와도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중에 아직도 인스타를 통해 안부를 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등학교 동창과의 대화에서도 친구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밴쿠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좀 reserved 한 것 같아."
Reserved는 마음을 쉬이 털어놓지 않고 주저하는 성격을 표현하는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바운더리가 있고, 그 선을 넘어서까지 친구가 되거나 생판 모르는 남을 자신의 반경 안으로 포함시키는 갑작스러운 일이 이곳에서는 극히 드물다.
도시 자체로서의 밴쿠버도 변화에 느린 편이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음식 배달 서비스가 상용화되었고, 아마존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온라인 주문 후 수일을 기다려야 물건을 받는 일상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 방문했을 때 여기가 어딘가 싶을 정도로 변해있던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 밴쿠버는 몇 해가 지나도 비슷하거나 똑같다. 우리가 시골에 가면 느끼는 감정이 밴쿠버에 고스란히 있다.
캐나다 동부에 있는 토론토나 미국의 뉴욕, 한국의 서울 등의 대도시에 가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면 밴쿠버가 얼마나 작은 도시인지 실감이 난다.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할머니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정체되어 있는 듯한 도시와 사람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여유롭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지나치는 건물과 자동차들,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에서 '이곳은 여전하구나, '라는 혼잣말을 하게 될 정도로.
공부를 마치고 밴쿠버로 완전히 돌아오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에는 많은 점이 걱정스러웠다. 당시에도 밴쿠버가 가진 여러 특징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활발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뉴욕과 서울을 등지고, 닫혀있고 멈춰있는 이 도시에서 내가 과연 나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심심하거나 지루해지면 나는 또 어딜 가야 하나, 질문하자니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계속 옮겨 다니는 인생이었기에 이곳에 친구도 많지 않고 아는 사람도 적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일구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한국계 캐나다 이민자, 한 명의 교민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영원히 '집'이라는 건 없겠구나, 깨닫고 나니 덜컥 겁이 났었다.
나는 밴쿠버에서 결혼을 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밴쿠버라는 나의 거주 공간과 그 안을 이루는 나의 커뮤니티에 대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밴쿠버는 서식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이곳을 채우는 건 나의 몫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밴쿠버를 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어린 시절 내가 자랐던 전라도 시골의 장점들이 떠올랐다. 시골에 가면 도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정돈할 수 있고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속도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처럼, 밴쿠버가 지닌 시골 감성이 우리 가족에게 그런 고마운 여지를 선사한다.
친구를 만들기 이토록 어려운 도시에서 나의 사람을 만났다는 것,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누군가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곳에서 나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 이처럼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을 보면 어쩌면 밴쿠버에서 나만의 공동체 -- 가족을 넘어서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 -- 를 이루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천천히 움직일 뿐 아예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다. 지금의 밴쿠버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이민을 결정하고 있고, 전에 없던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밴쿠버 국제공항은 2037년까지 3천5백만 명의 여행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로 늘린다고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으로도 새로운 건물들이 매일 들어서고 있다. 내가 마음의 문을 닫지만 않는다면, 변화를 겪고 있는 동네 안에서 함께 변화를 도모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믿는다.
과거 사람들은 미국인과 캐나다인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캐나다인들의 과한 다정함을 꼽았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보이면 몇 분이고 같은 자리에 서서 가게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모습. 그게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캐나다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용하고 친절한 이들이 조용하고 친절하게 살 수 있으려면 나름의 규칙 같은 게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그들의 reserved 한 면이다. 보이는 모습 뒤에는 그 모습을 만들어낸 이유와 조건이 있는 것처럼, 캐나다인의 친절 뒤에는 철저한 바운더리가 있는 것이다.
다 마음에 들지 않고 다 완벽할 수 없는 이곳을 나의 터로 선택해 살고 있다. 넓지만 좁고, 도시이지만 시골 같은 밴쿠버에서 나와 나의 가족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도시가 가진 풍부한 특징들을 활용해서 나와 대화가 통하고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만남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지금것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밴쿠버의 특성을 밴쿠버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어느 지역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나는 내게 주어진 공간 안에서 누구보다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중인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준비는 내가 사는 도시의 크기를 키워줄 순 없지만, 적어도 내 마음의 크기만큼은 더 크고 더 위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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