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 May 05. 2020

계획에 대하여.


어릴 때부터 나는 ‘계획충’이었다. 새해만 되면 온갖 버킷 리스트와 그에 따른 계획들을 다이어리에 적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고, 실천한 건 하나도 없으면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해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계획을 공들여 세울수록 목표와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그렇게 계획을 세우는 게 하나의 징크스가 되었다. 예를 들면, 빵 섭취를 줄이겠다는 계획을 짜는 순간부터 빵에 대한 욕구가 상승한다거나 운동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하기 싫은 맘이 배로 커지는 식이다. 이건 참을성이 부족해서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론 계획을 통해 제대로 이뤄낸 게 없으니 이 방법은 나와 안 맞는 게 분명했다.


스스로도 이런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던 중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반가운 대사를 발견했다. 아버지 ‘기택’이 아들 ‘기우’에게 하는 말이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No Plan.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중략)
그니까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잘못될 일도 없고,
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다 상관없다는 거야.


이제 나는, 나의 징크스에 대해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매년 의식 치르듯 써댔던 새해 계획이나 버킷 리스트 같은 것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계획충 DNA’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대신 오늘 해야 할 일 같은 것을 메모처럼 적는 것으로 계획 욕구를 해소했다. 대체로 업무에 관한 거나 마트에서 뭘 사야 한다 정도의 소소한 내용인데, 돌이켜보니 오히려 예전보다 많은 것들을 실천하고 있었다. 애써 계획표에 욱여넣었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하나의 습관이 된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되면
재미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어느 책에서 이 문장을 읽고 깨달았다. 내가 계획을 세움으로써 별 것 아닌 일상들까지 죄다 ‘해야 할 일’로 만들고 있었음을. 승부욕이 있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괜히 스트레스만 쌓이고 역효과가 났던 거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툭툭 해나가면 되는 거였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정말 드물다. 거창한 목표는커녕, 당장 오늘의 할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삶이니까. 다만, 그렇게 해낸 하루하루가 쌓여 계획에 없던 무언가가 이뤄질지도 모를 일! 오늘을 잘 버텨낸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계획 이상의 것들을 실천해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이름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