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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폴 Dec 15. 2020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돌아보는가? 후회하는가?


이 남자는 지금 낯선 공간에 있습니다. 우주복을 입은 채로 공간 속에 떠 있다는 말이 정확하겠습니다. 이 남자 앞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상들이 그를 둘러싸고 큐브 모양으로 겹쳐져 있습니다. 남자는 그중 한 영상을 들여 다 봅니다. 자신과 딸이 함께 있는 ‘과거’ 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혼자 절규합니다. “가지 마. 보내지 마. 아빠한테 가지 말라고 해. 아빠한테 말해 머피, 가지 말라고 말해.”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들이 과거를 바꾸라고 우릴 데려온 게 아니야.  내가 날 데려온 거야. 3차원의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5차원의 세상으로 데려온 거라고.”



2014년 개봉 후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입니다. 남자는 영화의 주인공 쿠퍼이고, 5차원의 공간에 있습니다. 5차원!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영화는 이 새로운 차원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킵 손이 영화 내용에 대해 자문한 것으로 유명하죠. 5차원 공간을 위해 웜홀 이론, 일반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중력장, 다중우주이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려운 이론들은 그냥 뒤로 미뤄버리죠. 5차원 공간에서는 과거 순간이 모두 현재처럼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과거를 볼 수 있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점은 더 흥미로웠습니다. 현재에서 과거를 들여 다 봐도 지난 과거에 대해 개입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 시간 속에서 딸 머피가 아빠를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만류합니다. 하지만 쿠퍼는 뿌리치고 우주여행을 떠납니다. 물론 그 우주여행 덕분에 5차원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딸 머피에게 중력을 이용해 모스부호를 보내고, 그 암호를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인류를 다른 행성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성공시킵니다.



과거에 대해서는 ‘돌아본다’ 라거나 ‘후회한다’라는 서술어가 주로 연결됩니다. 보편적 시간 인식은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미래로 흘러간다고 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5차원으로 갈 수도 없고, 과거로 되돌아 가지도 못합니다. 그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고,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는 붙잡기 어려워하며, 미래는 불확실해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정 시공간 속에 위치합니다. 시간 인식은 필연적입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인간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주변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지구 상의 모든 개개인이 인지하는 2020년 11월 어느 하루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때도 자신만의 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다른 속도로 돌아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자주 언급합니다.  이 시에는 한쪽 길을 선택한 결과로 가지 못한 다른 길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길을 가볼 수 없는 필연적인 존재이죠.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가지 않은 길’의 첫 부분입니다. 두 갈래 길을 앞에 두고 어느 길로 갈지 안타깝게 멀리 내다보고 있죠. 하지만, 그 선택의 순간이 지나면 다시 내가 지나온 길과 가보지 못한 길을 되돌아봅니다.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복잡한 메커니즘에 대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간결하게 말합니다. “후회를 최대한 즐기라. 슬픔을 억누르지 말라. 후회를 보살피고 소중히 여기다 보면 그만의 존재 목적을 가질 때가 올 것이다. 깊이 후회하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 남아 있는 나날>은 스티븐스라는 대저택의 집사가 나옵니다. 그는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합니다. 이 재구성 방식에는 숨은 의도가 있습니다. 직업은 집사이며 35년간 같은 집에서 한 사람을 섬기며 일 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는지 무엇을 숨기는지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숨겨진 진실이 나옵니다. 인물을 설정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이시구로의 방식이 독자를 매혹시킵니다. 



우선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생했습니다. 그 후 다섯 살 때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영국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문예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영국인으로 귀화했습니다. 하지만 첫 두 소설의 배경은 일본입니다. 사람들은 이시구로가 영국 작가인지 일본 작가인지 궁금했죠. 질문을 했고 이시구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상상의 산물입니다. 일본은 강한 정서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이시구로는 영국에서 성장하면서 머릿속 상상으로 자신만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실제 일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시구로의 특별한 태생이 관심을 끌지만, 그의 작품은 보편성이 더 부각됩니다. 작가 자신도 “나는 ‘인터내셔널 한 ‘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인터내셔널 한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세계 전역의 독자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비전이 담긴, 그렇지만 상당히 단순한 소설이라고 나는 믿는다. 대륙을 넘나들지만 세계의 어느 후미진 한구석에서도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는 인물들을 품고 있는 그런 소설 말이다.”라고 덧붙였죠.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은 영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므로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과거 이야기는 충분한 공감을 전합니다. 소설 끝 장면에서 이 주인공은 낯선 도시의 낯선 공원에 앉아 가로등이 켜질 때 사람들이 서로 웃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습니다. 그 순간 주인공의 가슴에 몰아치는 회한이 우리에게도 전해옵니다. 이시구로가 영국 특정 공간의 특정 직업군인 인물을 보편적 내러티브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시구로는 특정 상황 속의 뛰어난 보편적 주제로 201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이유는 ‘우리 삶의 비극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계속되지만 이시구로 소설 속 인물들은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고 가치를 지키며 살아간다’였습니다. 사건의 중심 속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 상황이 과거로 물러나야 어렴풋이 그 의미가 보이고 ‘후회’라는 감정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후회는 현재에서 과거를 들여다보지만 되돌릴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생겨 납니다. 



1989년 출간된 <남아 있는 나날>은 달링턴 홀이라는 잉글랜드 대저택에서 평생 집사 일을 해온 스티븐스 이야기입니다. 스티븐스는 35년 간 달링턴 홀의 집사였습니다. 달링턴 홀은 그에게 하나의 세계였으며, 생활공간이자 사무실이었습니다. 소설은 1956년 8월쯤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요 이야기는 스티븐스가 1913년부터 1953년까지 달링턴 홀에서 일하던 때의 일들입니다. 스티븐스가 이 과거 이야기들을 어떤 방식과 어떤 순서로 드러내는지가 중요합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소설 첫 부분에서 스티븐스는 1인칭으로 자신이 며칠 동안 여행에 대한 상상에 붙들려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패러데이 어르신의 안락한 포드를 타고 나 홀로 즐기게 될 여행, 잉글랜드의 수려한 산하를 거쳐 서부 지방으로 나를 데려다 줄 여행, 그리고 예상컨대 무려 닷새나 엿새 동안 나를 달링턴 홀에서 떼어 놓을 여행이다.” 이 부분에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이어 “이 여행의 발상 자체가 패러데이 어르신의 지극히 고마운 권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덧붙입니다. ‘주인 나리가 권유해서 할 수 없이 떠나긴 하지만 나는 그 여행이 기대된다’로 해석됩니다. ‘계속해서 ‘나는 이런 여행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주인 나리가 가라고 하시니까, 거기다 켄턴 양이 카드도 보냈고, 더군다나 우리 달링턴 홀에 인력 보충이 필요하니까 겸사겸사 간다는 뜻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이 사람 왜 자기 여행이 업무의 연장임을 강조하지?’라고 물음표를 붙여봐야 합니다. 스티븐스는 과묵한 인성의 전형적인 잉글랜드인입니다. 스티븐스에게는 직원 추가 고용의 업무 연장의 여행인데, 미국인 주인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런, 이런, 스티븐스. 여자 친구 얘기로군요. 게다가 당신 나이에 말이오.” 이쯤에 이르면 말수 적고 진지한 늙은 집사의 태도에 웃음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마저 미국식 유머로 이해해보려고 서툰 노력까지 합니다. 이렇게 스티븐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본마음은 감추고, 외부 사항이 자신을 움직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스티븐스는 여행 목적은 인력 보충임을 자꾸 강조하며 솔즈베리부터 웨이머스까지 6일간의 자동차 여행을 떠납니다. 혼자 여행은 생애 처음이며, 여행복으로 고급 양복을 차려 입고, 미국인 주인 존 패러데이가 제공하는 포드 자동차를 타고 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멋진 영국 신사입니다. 여행 이틀 동안은 영국 경치의 뛰어남과 영국 집사의 품위에 대해 장황한 말들을 이어갑니다.



이 여행은 스티븐스가 새로운 패턴의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달링턴 홀을 세상의 전부로 알아온 스티븐스는 여행에서 달링턴 홀의 과거와 그 속의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를 가집니다. 달링턴 홀을 벗어남은 스티븐스에게 낯섦 속에서 자기 인생을 더 넓게 바라볼 시간을 제공합니다. 심리적 거리 이론이 있습니다. ‘시간적, 공간적 거리와 해석 수준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이론입니다. 늘 머무는 장소에서는 눈 앞의 것 만을 헤아리게 됩니다. 평소 가보지 않은 장소를 찾고, 평소 만나지 않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일종의 ‘환기’ 작용이 발생해 그전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됩니다. 



스티븐스가 30 년 이상 머물며 일한 달링턴 홀은 그에게 전부였습니다. 이 곳을 떠나 낯선 장소로 간다는 사실 자체가 달링턴 홀과 달링턴 경 그리고 그곳에 바친 스티븐스의 시간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합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달링턴 홀과 달링턴 경에 대한 짤막한 의견을 내놓을 때마다 스티븐스의 진심이 점점 드러납니다. 과장되었던 위대한 가문과 위대한 집사에 대한 숨은 민낯이 드러나는 거죠. 우리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스티븐스를 따라 여행을 하고, 그 속에서 점점 드러나는 진실을 같이 들여다봅니다. 6일간 6 곳의 여행지를 거쳐 가면서 과거 영국의 영화와 달링턴 경을 존경하며 헌신해 온 자신의 인생의 허상을 조금씩 발견해갑니다.



스티븐스의 서술 방식은 강조입니다. 집사의 품위, 달링턴 경의 훌륭함, 집사로서 자신의 본분을 강조합니다. 이 태도에는 의도가 감춰져 있습니다. ‘진실’을 숨기려는 의도입니다. 핵심은 말하지 않고 주변부를 과도하게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자기기만’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죠.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사람은 우선 하나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척할 뿐입니다. 나아가 진실은 숨기고 다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거나 합리화합니다. 우리는 스티븐스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면 됩니다. 자기기만은 의도적으로 이루어지거든요. 자신이 말하는 바를 믿도록 의도적으로 진실을 숨기고 속여갑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는 진실에 대한 자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시구로가 스티븐스의 과거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 훌륭합니다. 일반적인 여행 이야기 속에 슬쩍 과거를 하나씩 엮어가는 솜씨가 뛰어납니다.



스티븐스는 의도적으로 과거 기억을 재구성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억이 카메라처럼 순차적으로 정확하게 작동한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죠. 카메라처럼 목격한 사건을 모두 기록하여 원할 때 꺼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기억은 사실 구성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 ‘편집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뇌 속에 기억되어 있는 경험과 정보의 조각들을 모아서 재구성 작업을 거친 것들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 스티븐스가 과거 경험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행이 시작되자마자 스티븐스가 쏟아내는 영국적인 경치의 위대함에서 영국 집사의 위대함에 이르기까지 스티븐스가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거죠.



스티븐스 화법은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스티븐스의 말은 모순이 교차합니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위대한 나리였음을 단언합니다. 독자들이 꼭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화법을 사용합니다: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달링턴 경에 대해서 어리석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내가 그분과의 관계를 좀 난처해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그러한 처신 뒤에 깔려 있는 생각도 그런 것들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달링턴 경께서 그분에 대해 엉터리 소리를 해 대는 사람들 대다수를 난쟁이로 만들어 버릴 만큼 도덕적으로 대단한 거인이셨다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러셨던 분이라고 서슴없이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지의 낯선 사람이 “그래, 노인장이 정말 그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라고 물을 때는 “아, 아니오. 나는 미국 신사이신 존 패러데이 어르신께 고용된 몸이오. 그분이 달링턴 가문으로부터 그 저택을 사셨거든요.”라며 사실을 가립니다. 이런 모순된 모습은 스티븐스가 했던 다른 확신의 말들에 의심을 갖게 합니다. 스티븐스는 이런 말도 합니다. “집사의 의무는 훌륭하게 봉사를 하는 것이지 중대한 나랏일에 끼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사의 임무에 대해 미리 규정해서 알려줍니다.



과거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을 위해 온몸 바쳐 일 하겠노라고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이 주인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고귀함과 존경할 만한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 이제부터 내 한 몸 다 바쳐 이분을 섬기겠다 라고 자기 자신에게 단언할 수 있는 순간.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의 거창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결코 있지 않다는 것. 따라서 현명하고 존경스럽다고 판단되는 주인에게 신뢰를 바치고 우리 능력이 닿는 한 열과 성을 다해 모시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남아 있는 나날>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버틀러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버틀러는 집사를 말합니다. ‘한 주인을 섬기기로 인생에서 결심하는 일’은 일반적인 사람이 인생에서 선택하는 가치관에 대한 은유입니다. 스티븐스는 존경할만하다고 판단한 달링턴 경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모셨고 정말 최선을 다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여행 첫째 날은 위대한 집사에 대하여, 그다음 아버지에 관하여 몇 장면을 회상합니다. 둘째 날은 켄턴 양에 대해 회상합니다. 켄턴 양은 결혼하기 위해 달링턴 홀을 떠난 과거 동료입니다. 셋째 날은 위대한 집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자동차 고장으로 낯선 사람과 만나고, 대화 중 드디어 달링턴 경의 생애 마지막 이야기가 정체를 드러냅니다. 스티븐스가 여러 번 강조했던 위대한 집사의 제1 조건은 위대한 가문과의 연계입니다. 그리고 ‘감정의 절제가 가능해야 하고, 강한 감정이 솟구치는 순간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이 위대한 집사 자격이라고 말합니다. 스티븐스는 과거에 이 신념을 위해서 애썼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런 스티븐스가 바뀐 태도로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과거를 재구성할 때 가장 핵심 요소가 강조에서 후회로 바뀌어 갑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처음부터 절대로 후회를 쏟아내지 않습니다. 그저 달링턴 홀에서 개최되고, 국제적인 명사들이 참석한 최대 만찬을 자랑합니다. 자신이 그 만찬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느꼈던 자부심을 말하고, 자신이 얼마나 직무에 충실한 집사였는지 강조할 뿐입니다. 달링턴 홀의 역사 중 스티븐스에게 가장 만족감을 준 일은 1923년 달링턴 홀에서 개최된 회담이었습니다. 이 날은 집사로서 스티븐스에게 잊지 못할 날이었죠. 스티븐스는 비밀 회담이 열리던 날 극도로 힘든 시간을 마무리한 후 자신이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중단된다면 한 나이 든 집사의 성공적인 과거 이야기로만 남게 되고, 소설은 힘을 잃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코 이 이야기는 위대한 집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실패, 그의 후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시구로가 스티븐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툭 하고 스티븐스의 눈물이 터지고, 우리도 그때서야 진실을 알게 됩니다. 스티븐스를 비난하기보다 공감하게 됩니다. ‘그랬던 거야. 스티븐스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야. 실제로 자신이 어떤 사람을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알았다고 해도 멈출 수 없었을 거야.’ 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과거에 대해 후회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우리는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임을 스티븐스와 함께 깨닫습니다.



후회의 가장 큰 요소는 스티븐스가 인간적인 감정을 숨기며 억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감정 통제는 위대한 집사의 조건입니다. 감정을 통제하는 순간에는 슬픔이나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다. 스티븐스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더욱더 자기가 정한 ‘의무’ 뒤에 숨어버립니다. 스티븐스가 아버지 임종 장면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부친께서 잠시 더 당신의 손을 쳐다보시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씀하셨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좋은 아버지였는지 모르겠다.” “네가 자랑스럽다. 좋은 아들이야. 내가 좋은 아버지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그러자 스티븐스는 “지금은 집안일이 너무 바쁜 것 같으니 아침에 다시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고 방을 나갑니다. 켄턴 양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이 싹틀 수 있는 상황이 많았지만, 집사의 품위 만을 강조하며, 동료끼리 사적인 감정을 억압하려 애쓰면서 켄턴 양과 거리를 둡니다.



자신이 존경하기로 결심한 달링턴 경의 본모습이 드러난 부분도 있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평생 억누르며 살았던 모습은 스티븐스의 뼈아픈 후회로 이어집니다. 진실은 가려져 있었던 겁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모셔온 달링턴 경의 흠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의미 없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달링턴 경은 농락당하고 있었죠. 나치들이 달링턴 경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했어요. 어쩌면 스티븐스는 ‘훌륭하고 숭고한 것들이 추악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분명 다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달링턴 경은 히틀러의 방문 초청을 수락하도록 총리를 설득하는 작업을 하고, 자신이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믿은 순진한 귀족이었거든요.


스티븐스는 깨닫습니다. 늦었지만 인정합니다. 인생에서 계속 나아가려면 자기 인생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솔직하게 자기 삶을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었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 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긴 세월 그분을 모셔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순간 스티븐스는 인정했고, 솔직 해졌습니다. 이런 순간을 맞이한 후에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죠.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는 순간”을 피하지 않고 직면합니다. 자책과 후회의 순간을 거쳐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일”임을 인지하고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깨닫습니다. 마지막 여행 날 켄턴 양이 달링턴 홀로 돌아오길 기대하며 만났지만 켄턴 양은 현재에 만족하며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켄턴 양의 말은 스티븐스 마음에 감정 변화의 회오리를 몰고 옵니다 : “그녀의 말속에 자신의 마음속에 슬픔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정합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실제로 그 순간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드디어 감정에 솔직해지는 순간을 맞이하는 거죠. 늦었지만 뒤늦게 눈물을 흘립니다. 현재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면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과거에 회한뿐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에게는 과거는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날들만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티븐스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 후 달링턴 홀로 돌아가서 미국식 농담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스티븐스는 농담에 대해서도 직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동안 이 문제로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농담에 응해야 하는 의무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열의를 다해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 직무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이 시대에 발맞추어, 전통적으로 내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직무들을 새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물론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농담이란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지금이 바로 농담으로 응해야 할 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합니다. 



‘농담’이라는 업무도 ‘버틀러’처럼 하나의 메타포입니다. 스티븐스는 미국 주인 패러데이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익살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익살이란 그 자체의 속성상, 예상되는 다양한 반응들을 제대로 따져 볼 새도 없이 입으로 내뱉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먼저 습득해 놓지 않으면 온갖 부적절한 말들을 내뱉게 될 위험이 엄청나게 크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결코 능숙해질 수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이렇게 위험 부담이 높은 바에야, 적어도 당분간 좀 더 숙달될 때까지는 패러데이 어르신을 상대로 그쪽 의무를 이행할 생각을 접는 것이 상책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부분은 농담과 인생이 가진 속성이 비슷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먼저 능숙하게 습득해 놓을 수도 없고, 한번 내뱉어지면 / 일어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소설의 마무리도 농담에 관한 다짐으로 끝납니다. ‘농담’이라는 임무를 잘하기 위해 다시 달링턴 홀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냅니다. 스티븐스의 마지막 결심은 이렇습니다. “내 모든 역량을 바쳐 농담이라는 직무에 접근한 적은 없는 듯하다. 내일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새로운 각오로 연습에 임해야 할 것이다.” 스티븐스는 늘 이렇게 최선을 다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위험이 생겨날 수 있는 농담처럼 인생도 그럴 수 있죠. 우리는 스티븐스처럼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인생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고 믿을 뿐이죠. 이 깨달음 뒤에도 아이러니는 남습니다. 스티븐스가 열심히 하려는 직무의 대상은 거대한 달링턴 홀 관리, 변절자로 기록될 달링턴 경 섬기기, 때로는 이해 불가능한 농담 잘하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이죠. 우리가 생애 매 순간 무엇을 위해서 나의 시간과 역량을 바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모르파티, 성찰하되 후회는 하지 않길


달링턴 홀의 주인은 새 미국인 주인으로 바뀌었고, 스티븐스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농담을 연습하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집니다. <인터스텔라>의 남자 주인공처럼 스티븐스가 자신의 과거의 한 장면으로 돌아간다면 스티븐스도 절규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말했을까요? 아마 그러지 않았을 듯합니다. 못했을 것입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결심한 대로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지나 보니 자신이 일 했던 그 시기 달링턴 홀에서 진행되던 국제적인 회의들, 달링턴 경의 어리석은 행보들을 스티븐스가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터미네이터의 힘을 가진다면 가능할까요. 스티븐스는 오로지 위대한 집사로서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맞도록 직무를 열심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아버지의 임종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사랑하는 여인은 그렇게 자신을 오래 바라보았지만 스티븐스는 애써 외면했던 것입니다. 돌아보니 회한이 밀려오고 눈물이 쏟아진 것입니다.



‘성찰하되 후회하지 마라.’ 몽테뉴가 들려주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지혜입니다. 몽테뉴는 ‘자신이 과거에 한 일 중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에는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 모습이 어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각기 다른 것처럼 다양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 방에 모여 있는 지인들에 대해서 어떤 판단도 내리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신이 행한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사고력과 관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과거에 보여준 다양한 모습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조각 한 조각 잇대어 만든 조각보와 같아서 일정한 모양도 없고, 구성이 매우 다양해서 한 조각 한 순간마다 각기 나름대로 행동한다.” 스티븐스도 아마 그 순간은 자기 나름대로 행동했을 겁니다. P.419



‘아모르파티’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트로트가 떠올랐죠. 트로트 노래 제목이 맞더군요. 힘 있는 퍼포먼스로 무대와 관객을 사로잡은 여성 트로트 가수가 분홍색 바지 정장을 입고 전자음악 비트에 맞춰 부르는 트로트였어요. 가사는 문학적인 함축성까지 담고 있었어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파티”



‘아모르파티’는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라’로 요약되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에게서 나온 단어이더군요. 후회 또는 회한은 필연적으로 과거 시제입니다. 내가 가진 조건, 내가 머물렀던 장소, 내가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서 선창에 불이 들어오고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소설 속 스티븐스에게 ‘아모르파티’를 들려준다면 스티븐스는 또 다른 농담이라고 이해했을까요? 우리 모두 스티븐스와 같은 내가 정한 가치를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한 사람의 ‘버틀러’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 나에게 주어진 두 갈래 길에 대한 선택권도 없는 상황들 속에서는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한다.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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