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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폴 Aug 24. 2020

순간, 단면 자르기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1


그 순간들이 모여서


오늘 걸으셨나요? 걸을 때 어떤 생각하셨어요? 어디에 있든 온갖 생각이 떠오르지 않나요? 생각이란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고 떠오르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런던 거리를 걷는 소설 속 인물들의 다양한 순간을 보여줍니다. 거리의 모습도 묘사하지만 마음속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죠. 울프는 이 순간을 ‘존재의 순간’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그 순간이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고 믿었거든요.


울프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내 순간을 자세히 들여 다 보게 돼요. 가끔은 지나간 한 순간을 꺼내 보게도 되고요. 그 순간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 인생을 이루죠. 수많은 순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음 세 가지를 꺼내 봅니다.


 그 날은 고향으로 가는 KTX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 지하통로를 급히 걸었어요. 마지막 순간에는 어린 두 아이들을 끌다시피 하며 뛰었어요. 겨우 기차에 올랐고, 우리 좌석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이미 누군가 앉아 있는 거예요. 승무원이 오시고 우리 기차표를 유심히 본 후 말했어요. 고객님 이 표는 어제 출발한 기차표입니다. 잘못 타셨습니다.’


또 어느 날은 운전면허를 딴 후, 첫 운전의 목적지인 학교로 출발했어요. 언덕에 있는 학교였는데 언덕을 매끄럽게 잘 올라갔죠. 바로 눈 앞에 주차장이 보였고, 너무 이른 안도를 했는지, 그만 옆에 주차된 차를 박아버렸어요. 쿵 하는 폭발음이 들렸고, 초보 운전자는 무슨 일인지 살펴보려고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죠. 그 순간 지나가는 학생이 말했어요. 어 차 굴러가요!’ 브레이크를 걸지 않은 차가 뒤로 굴러가고 있었어요.


더 먼 옛날 그때는 대학 2학년이었고, 결석으로 점수를 더 깎이면 위험 해져 교수님께 사정을 했어요. 교수님께서는 그 당시 배우고 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씨’가 들어간 문장을 써오라고 하셨어요. 얇고 푸른 표지를 가진 그 책을 훑어본 후 ‘씨’가 들어간 문장을 잔뜩 써 갔죠. 물론 ‘씨’가 너무 많아 딱 한 페이지만 써 가긴 했어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 ‘씨’는 (도대체) 어디 있니?’ 제가 써가야만 했던 ‘씨’는 바다 ‘씨’였던 거예요. 저는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알파벳 ‘씨’를 써갔어요. ‘역시 우리 교수님은 창의적이고 멋진 분이셔. 이건 정말 벌 다운 벌이야.’라고 생각하면서요. ( 소설 첫 페이지에는 ‘바다’가 나오지 않습니다. )


우리가 경험하는 매 순간은 늘 처음이죠. 신기하게도 끊임없이 새로운 순간들이 생겨납니다. 순간 속에는 만남, 오해, 아픔, 여유, 기쁨, 감동, 실망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죠. 가끔 그 순간들이 표면 위로 올라오면 웃기도, 후회하기도, 아파지기도 하죠. 우리는 이런 수만 개의 기억과 생각과 생의 ‘순간’을 가진 존재들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표면 뒤에 있는 실체에 다가가기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면 울프가 표면으로 길어 올리려고 골똘히 생각했던 ‘존재의 순간’들을 만날 수 있어요.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만의 내밀한 기억과 이야기를 들려주거든요.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두 자신의 속마음과 생각을 혼자 말하듯 드러낸다는 거예요. 서로 주고받는 대화보다 그저 일상적인 기억, 생각, 느낌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이 규칙이나 질서 없이 떠오르는 대로의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 울프 소설의 특징이에요. 소설의 형식에서 보자면 이런 의식의 흐름은 독자에게 친절한 방법은 아니에요. 하지만 울프가 빚어내는 이 ‘순간들’이야말로 존재의 한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지적이고 창조적이며 정열적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는 삶의 ‘한 순간’을 붙들어 일단정지시킵니다. 그 후 그 순간을 얇게 잘라내 죠. 그다음 결이 하나하나 보이도록 자세히 묘사하려고 시간을 들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닌 삶의 진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은 울프만의 방식으로 쓴 울프만의 소설이 됩니다.



울프 삶의 순간을 몇 가지 들여 다 보면 울프만의 소설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이해하기 수월 해집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1월 레슬리 스티븐과 줄리아 스티븐의 여섯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빅토리아 시대가 끝나고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아주 빅토리아적인 가정에서 출생했어요. 어린 울프는 펜을 잡을 수 있었던 3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매우 감수성 풍부한 아이였고, 집 안의 스토리텔러였어요.



울프의 오빠와 남동생은 캠브리지 대학을 다녔지만, 딸들은 정규 교육 대신 부모님이 가르치는 가정교육을 받았어요. 이 부분에 대해 버지니아는 계속 분개합니다. 20 세기 여성 진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을 거예요. 19세기 후반 영국 중산층의 딸들은 대부분 필요한 부분만 집에서 배운 후 결혼을 하는 게 흔히 있는 일이었어요. 다행히 이 집안은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울프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지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혜택의 공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격려도 있었죠. 어린 울프는 자기가 이런저런 책을 읽고 있음을 뽐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러한 지적인 집 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울프에게 가장 큰 정서적 영향을 준 인물은 어머니였어요.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울프의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은 49세에 사망하는데 그 당시 울프는 13살 소녀였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울프에게는 ‘도끼로 휘두르는 듯’한 충격적인 일이었어요. 이때 울프는 평생 그녀를 힘들게 한 첫 번째 정신질환을 경험합니다. 울프는 어머니 죽음 이후 마흔이 될 때까지 어머니에게 ‘사로잡혀’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매일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보고, 뭘 말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우울이 심해졌고 버지니아는 그런 아버지와 함께 점점 정서적 불안을 경험합니다. 아버지 죽음 바로 직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태어난 집을 떠나 블룸즈버리로 이사하면서 여러 번의 죽음과 그들을 지켜보던 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어요. 결혼 후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먹지도 못하고, 요양원으로 가기도 했지만, 남편 레너드의 정신적 신체적 지지의 도움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레너드가 부여하는 안정감과 사랑과 지원이 있어서 울프의 집필 활동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울프의 남편 레너드는 울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온 마음으로 지지했죠.



블룸즈버리로 이사 가면서 이 형제자매들과 울프는 여러 종류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게 됩니다. 특히 울프는 소설은 왜 온통 전쟁, 정부, 축구에 대해서만 쓸까 의문을 가졌어요. 왜 쇼핑하는 여성이나 요리를 하는 여성에 대한 소설은 왜 없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인간관계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서로 말로 표현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에 관심이 더 갔죠.



울프는 언니 바네사와 정말 친했어요. 언니는 화가였어요. 초상화를 그릴 때 사람을 그리면서 눈코 입이 없는 얼굴 자체만 그렸어요. 옆에서 이런 표현 방식을 지켜봐 온 울프는 이런 실험적 방식을 소설 속에 표현해보려고도 했어요. 결혼 후에는 남편 레너드와 집 지하에 인쇄기를 갖다 두고 호가스 출판사를 차렸어요. 이 출판사에서 울프의 작품을 펴냈는데, 이렇게 자기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출간하니까 울프는 자유롭게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 볼 수 있었어요. 이러한 여러 과정을 통해 울프가 그 당시 전통적인 소설 기법을 거부하고 그녀만의 새로운 소설 기법인 ‘의식의 흐름’대로 쓸 수 있었을 거예요.



소설을 쓰는 방식도 새로웠지만, 울프가 쓰려는 내용도 정말 시대를 앞서 갔습니다. 울프는 일상의 ‘한순간’을 잘라내어 그 속에 삶의 진실을 담고자 했다고 말씀드렸었죠. 울프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방법으로 존재의 순간을 포착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합니다. 울프는 일기를 많이 썼는데, 그 속에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소설을 쓸 때 나는 바로 이 문제, 즉 내 내밀한 기록에서는 비존재라 불러온 것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종종 좌절감을 느꼈다. 일상적인 나날에는 존재보다 비존재가 훨씬 많다.’



‘비존재’가 무엇인지 울프가 ‘일기’에 쓴 내용을 다시 살펴볼게요. 울프는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며 많은 부분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죠. 걷고, 먹고, 사물을 보고, 할 일을 처리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세탁하고 책을 읽고 등등. 이렇게 별 다른 특징이 없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을 ‘비존재’라고 이름 붙였어요. 그래서 울프는 진정한 소설가라면 이 두 가지 존재인 ‘존재와 비존재’를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설 속에 나타내려고 애를 쓴 거예요.



울프는 ‘동굴 파기’ 소설 작법에 대해 말하기도 했어요. 동굴을 판다니 의아하시죠. 울프의 동굴 파기는 이런 거랍니다. ‘나는 내 인물들의 등 뒤로 아름다운 동굴을 판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들, 인간다움과 유머, 깊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동굴들이 서로 이어지고, 각기 현재의 순간에 밝은 데로 나온다.’ 이 동굴 파기 방식을 소설 속에 잘 녹여 넣는 데 자그마치 1년이 걸렸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울프는 등장인물들의 내적인 경험을 주로 묘사합니다. 이 등장인물들은 함께 있기도 하고 따로 떨어져 있기도 해서, 독자는 자유자재로 인물들의 마음속을 넘나들며 그들의 의식의 흐름을 읽어 갈 수 있습니다. 소설은 이미지나 기억 묘사, 내적인 사색 과정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울프 소설 읽기가 어렵게 느껴지고, 많이 읽지 않은 유명한 소설로 남아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차근차근 읽으면서 지금 이건 누구의 의식을 담은 순간인지 밝혀내다 보면 정말이지 새로운 소설의 매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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