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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폴 Aug 24. 2020

동시에 당신의 삶에 관한 것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2

내 삶에 관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삶에 관한 것


내 삶에 관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삶에 관한 것



1926년 울프는 43세에 ‘댈러웨이 부인’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런던도, 6월의 계절도, 문명도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소설입니다. 6월 중순의 런던 거리의 소리, 사람들 옷차림, 걸음걸이, 자동차, 광고, 꽃집 향기, 장갑 가게, 서점, 빅벤의 종소리까지 런던 거리의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울프의 런던에 대한 사랑이 담긴 소설이기도 해요. 등장인물이 걷는 길을 따라 런던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거든요. 독자들은 ‘토끼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런던 거리 사람들’과 함께 런던 거리를 걷는 기분을 가진답니다.



인물의 내면 묘사가 주를 이루니까 이해를 위해서 소설 속 인물들이 하루 동안 뭘 하는지 요약해볼게요. 첫 부분에선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저녁에 있을 파티에 쓸 꽃을 사러 집을 나서요. 꽃집까지 가는 길 곳곳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고 문득 과거 회상도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굉장한 폭발음이 나면서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부부가 등장합니다.



다시 클라리사의 의식으로 돌아 가 젊은 시절 별장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친구 샐리 시튼과 피터에 대한 회상이 이어져요. 꽃을 사고 집으로 돌아온 후 첫사랑 피터의 방문이 그려지고, 거리를 걷는 피터의 의식이 나오죠. 한편 정신과 의사인 윌리엄 브래드 쇼를 방문하는 셉티머스의 의식도 그려집니다. 저녁이 되어 파티가 시작되고, 윌리엄 브래드 쇼 부부가 셉티머스의 죽음 때문에 늦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순간 클라리사가 그 젊은이를 직접 몸으로 느끼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울프는 이 소설을 쓰기 전 1차 세계 대전을 경험했어요. 전쟁은 정신질환을 가진 울프에게 너무나 음울했어요.  ‘글을 더 쓸 수 있을까’하고 여러 번 걱정하기도 했죠. 그래서 이 소설 첫 부분에는 그 큰 전쟁이 지나간 후 안정을 찾은 런던 거리가 나오죠.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그 거리를 걸으며 6월의 활기와 소리와 촉감을 마음껏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수많은 생각들이 표면을 뚫고 올라와 피어나는 순간들을 보여주죠. 울프는 이런 순간을 ‘현재에서 더없이 충만하게 살고 있다는 충족감’이라고 표현합니다.



‘꽃은 자기가 사 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입니다.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에 쓸 꽃을 사러 가는 거예요. 파티를 연다니 문화적 공감이 덜 가긴 해요. (어린 시절 울프의 집에서는 사교모임이 많이 열렸던 것 같아요. 파티가 익숙할 거예요.) 더군다나 이 파티에는 총리도 참석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초대받죠. 클라리사는 파티를 여는 이유를 짤막하게 ‘봉헌’이라고 표현합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클라리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묘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녀는 늘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고 해요. 그렇게 다들 흩어져 있는 것이 유감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일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파티를 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설에는 같이 나누고 싶은 내용들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몇 가지만 같이 나눠보도록 할게요. 우선 소설 속에는 중심인물이 두 사람 있습니다.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과 워렌 스미스 셉티머스이죠. 셉티머스의 존재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의 ‘더블’로 설정한 인물입니다. ‘더블’은 또 다른 자아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 이름이 낯서니 두 사람 이름을 눈 여겨 봐주세요. 소설 읽기에서 이름이나 지명이 낯설면 흐름이 자꾸 깨지기도 하거든요. )



댈러웨이 부인은 남편이 하원의원이고, 열아홉 살의 아름다운 딸이 있고, 얼마 전 앓은 감기로 수척해졌지만 ‘삶을 최대한 즐길’ 줄 아는 영국의 상류층 부인입니다. 반면 셉티머스는 시인이 되려는 꿈을 안고 런던이라는 대도시로 상경한 청년입니다. 런던에서 스미스라는 성이 아주 흔하다고 합니다. 흔한 이름답게 셉티머스는 평범하게 미래를 꿈꾸던 청년이었습니다. 미스 포울에게 셰익스피어를 배우다가,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사명감을 느껴 자원입대했어요. 가까운 사이로 지내던 상사 에반스의 죽음 이후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자살합니다. 울프는 처음에는 작품 끝에 댈러웨이 부인이 자살하는 것으로 설정했다가 셉티머스의 자살로 변경했다죠.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런던 거리에서 꼭 한번 서로를 스쳐 가긴 하지만 서로를 알고 있다거나 연관은 없어요. 이 부분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울프가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고 인물 뒤로 아름다운 동굴을 판다고 했었죠. 우선 외모를 비슷하게 설정해요. 두 사람 모두 매를 닮았어요. 마지막에 셉티머스가 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소설 첫 부분에 클라리사가 창가에 서 있는 모습과 겹쳐지죠. 두 사람 모두 ‘태양의 열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절을 표현해요. 이 구절은 셰익스피어 <심벌린>에 나와요. 이 부분은 죽음과 연관이 있어요. <심벌린>에서 이 구절이 장례식 부분에 나오거든요. 소설 마지막의 셉티머스 죽음과 피터가 말하는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영혼의 죽음’과도 연관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가장 강렬한 일치는 마지막 부분에 나와요. 셉티머스의 죽음이 파티장에 알려지자, 클라리사가 그의 죽음을 직접 자신이 체험하듯 느끼거든요.



셉티머스는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셉티머스는 소설 속에서 현실의 표면을 꿰뚫어 그 이면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나와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메시지를 지닌 청년으로 묘사되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마음의 병이 깊어진 환자입니다. 그는 비정상을 경험하는 인물,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파괴된 삶을 살고, 고립된 정신만 남은 인물이에요. 더 이상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무감각 속에서 공포와 환영 속에 살아가요. 가장 안타까운 존재로 나옵니다.



동네 의사가 셉티머스를 만나보지만 치료가 어려워 보이자 더 유능한 의사가 있는 할리 스트리트로 보냅니다. 셉티머스 부부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도 브래드쇼 박사에게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클라리사가 꽃집에 있을 때 ‘쾅’하는 폭발음이 들리는데, 그 순간 셉티머스도 그 소리에 넋이 나가죠. 전쟁터가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그의 곁에는 이탈리아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영국으로 온 이방인 루크레치아가 슬픈 표정으로 따르고 있어요. 남편 셉티머스가 자꾸 ‘죽어버리겠어’라는 끔찍한 말을 하니까 무섭고 외롭고 괴로워해요. 그래서 길을 지나가는 낯선 이들에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아무리 ‘나는 혼자다’라고 절규해도 남편 셉티머스는 시종일관 혼자만의 것을 보고 혼잣말만 합니다. 소설 속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고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크레치아가 표현하는 셉티머스의 모습은 그를 아주 잘 나타내고 있어요. 한번 같이 읽어 볼게요.



 ‘누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누구나 전쟁에서 죽은 친구가 있다. 누구나 결혼을 하면 뭔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셉티머스는 무시무시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이상해졌다. 사람들이 침실 벽 뒤에서 말한다고 했다. 또 뭐가 보인다고도 했다. 강가에 서 있을 때는 갑자기 ‘자 우리 이제 죽자’고 말했다.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이야기했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때는 멀쩡하다.’




소설 속에는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합니다. 물리적인 시간과 의식의 시간 또는 심리적인 시간 이렇게 두 가지예요. 이 심리적인 시간은 기억과 연상에 의해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의식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느라고 시간 흐름이 뒤죽박죽 섞여서 길을 잃고 헤맬 즈음 빅벤의 종소리가 울립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빅벤 종소리는 물리적인 시간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우리의 시간이 유한함을 알려주는 거죠.



울프는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동 중인 사회 제도를 보여주고 그것을 비판하는’ 작업도 합니다. 이 소설 속에는 영국 사회의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등장하거든요. 왕이 존재하는 영국은 지금도 계급 사회죠. 왕족과 귀족이 존재하고, 상류층, 중산층, 노동자 계층이 구분되어 있어요. 이 계급의 기호는 사용하는 언어나 생활양식 즉 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데 이 소설에서 그런 부분이 잘 나타나 있어요.



댈러웨이 부부, 윌리엄 브래드쇼, 영국 여왕 혹은 수상은 지배 계층이며, 파티를 준비하거나 열심히 일하는 하녀들은 하위 계층 사람들이죠. 그리고 소설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부부와 댈러웨이 집의 가정교사 미스 킬먼은 소외계층입니다. 소설 곳곳에 영국 여왕이나 왕가가 상징하는 영국에 대한 충성심 혹은 일체감이 드러난 부분들이 있어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담긴 부분이죠.



셉티머스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는 외부적 힘이 작용합니다. 셉티머스를 지배하고 벌을 내리려는 자들이 셉티머스를 죽음으로 내몰아요. 대표적인 인물이 윌리엄 브래드쇼 박사죠. 윌리엄 경은 균형 감각을 신처럼 떠받들고 숭상함으로써 번영한 사람입니다. 이 균형감각은 영국 전체를 번영하게 만들었다고도 믿죠. 그래서 영국의 광인들을 격리시키고 출산을 금지하고 절망을 처벌하고 부적응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퍼뜨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 균형감각은 장애를 가지거나 질환을 가진 사회의 약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합니다. 셉티머스도 격리되어 요양소로 보내지려 하자 자살을 선택했던 거죠.



소설을 읽으면 1930년 당시 영국 사회를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워요. 정신과 의사인 브래드쇼가 돈을 많이 버는 내용도 그래요. 1930년대 의사로 자수성가한 인물이거든요. 잠깐 살펴볼게요. 윌리엄 브래드쇼는 자기 영혼의 조력자인 회색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이 자동차를 타고 왕진을 다녀요. 부유한 환자들을 왕진 갈 때마다 매 초마다 황금이 쌓여갔죠. 존경과 찬탄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죠.



몸은 뚱뚱해졌지만 왕족을 만나고, 아들은 이튼 스쿨에 보내죠. 소매상의 아들이었던 윌리엄 브래드쇼는 자기 손으로 일구어 황금 벽을 세우고 그 벽은 점점 두터워졌어요. 훌륭한 기술, 정확한 진단, 연민을 가지고 인간의 영혼을 이해하는 의사로 평판이 났죠. 브래드쇼가 셉티머스를 보는 순간 바로 심각한 환자라고 판별합니다. 그래서 격리 요양소로 보내려고 합니다. 셉티머스는 이런 브래드쇼의 본성이 자신을 덮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소설에는 울프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나오기도 해요. 울프가 셉티머스의 정신분열증 환자의 세계를 실감 나게 묘사하는 것도 작가의 자전적 요소와 연결되어 있어요. 우리가 통상적으로 정신이상자라고 단정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과연 부정적으로 다루어도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그들을 정신이상자로 만든 원인이 우리 사회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물론 셉티머스는 영국을 위해 자원했던 전쟁 후유증으로 무감각을 경험하고 정신질환을 얻은 거죠.



셉티머스가 울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어요. 그는 극심한 정신발작에 시달리며 울프 자신이 경험했던 소통할 수 없는 정신 상태와 정확히 상응하는 인물이거든요. 울프는 자주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리와 오랜 시간 힘겹게 싸웠어요. 울프의 일기에는 그리스어로 노래하는 새가 등장하기도 하죠. 소설 속에도 그리스어로 노래하는 새가 똑같이 나오기도 해요. 정신질환을 가진 셉티머스는 끊임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쓰고 표현해요. 아마 이 셉티머스 부분이 나오니 더 읽기가 난해할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셉티머스의 말들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해요.



셉티머스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클라리사는 셉티머스 자살에 대해 이해하죠. 그러면서 자살을 삶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자 의사소통의 한 방법으로 이해해요. 물론 이 부분은 소설 속의 극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셉티머스가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이를 계기로 영혼의 자유와 독립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합니다. 만난 적 없는 한 청년의 죽음 소식을 듣고 이렇게 생각하기가 어려울 텐데 소설에서 이 두 사람은 ‘더블’이니까 가능한 것 같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실제로 울프 자신도 자살로 삶을 마감했어요.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3월 런던을 떠나 남편 레너드와 살던 뭉크 하우스 근처 우즈 강으로 사라졌어요. 20 여일 후에 먼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죠. 남편이 유태인이었고, 전쟁의 공포, 소설을 쓸 수 없는 상황, 정신적인 안정을 취할 수 없는 상황 등이 울프를 힘들게 했고, 그녀는 먹을 수도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환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더 이상 레너드에게 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울프가 마지막에 입고 있었던 코트 주머니에는 돌멩이들이 들어 있었다고 해요. 울프는 수영을 잘했는데,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 본능적으로 살려는 욕구가 나올 까 봐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고 강 속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해요.



이렇게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울프는 글을 쓰다 막히면 집 주위를 산책하곤 했어요.  ‘댈러웨이 부인’ 속에도 걷는 장면이 유난히 많아요. 거기다 이 소설은 런던 걷기로 아주 유명한 작품이에요. 한때 울프의 연인이었던 비타 색빌 웨스트는 울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어요. “ ‘댈러웨이 부인’이 내게 영원히 남긴 것은 다시는 런던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6월의 런던 전부가 당신의 소설 첫 이십여 장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요.



울프는 1920년 대 6월의 런던 고급 주택가인 웨스트민스터를 비롯하여 런던의 상업지구인 본드 스트리트, 옥스퍼드가, 도심 속 녹지 세인트 제임스 파크, 리젠트 파크, 트러팔가 광장 및 버킹검 궁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 폴 성당에 이르기까지 런던의 웨스트엔드 거리의 모습과 소리와 느낌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내고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걷는 플리트 스트리트, 스트랜드 거리도 포함됩니다.



울프는 자신이 태어난 켄싱턴 거리를 비롯하여 어린 시절부터 런던의 거리들이 익숙했어요.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여름 여름 휴가지인 콘월의 탤런드 하우스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도 매일 산책을 나갔어요. ‘등대로’를 쓸 때도 산책을 하는데 문득 여러 생각들이 물밀 듯 밀려왔다고 합니다.



걷기가 울프에게는 창작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소설 속 인물에게는 자아 탐색 혹은 존재를 들여다보기, 자기 생각을 들여다 보기 방법이 되는 거죠. 거리를 걷는 것은 자아를 확장하는 장치이기도 하죠. 부산하게 움직이는 런던 거리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사회적 역할은 지워지고 자신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되거든요. 실제 울프도 몽크 하우스 주변을 걸으면서 자신이 집필 중인 소설 속 문장을 큰 소리로 말하면서 문장의 리듬을 느끼곤 했답니다.



끝으로 울프가 표현하고자 한 존재의 두 가지 모습도 잘 찾아보시기 바라요. 울프가 말하길 ‘존재는 표면과 깊이라는 두 가지 층을 가진다’고 했어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지니는 의미나 속임수에 대해 다루기도 했어요. 옷을 아주 잘 차려입는 상류층이 나오고, 할리 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의사 윌리엄 브래드쇼도 외관을 존중합니다. 상류층의 훌륭한 외관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외관은 남루하고 초라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클라리사의 딸 엘리자베스의 역사 가정교사 미스 킬먼입니다. 그녀는 ‘무섭게’ 똑똑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역량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근근이 가정교사로 생활을 합니다. 이 미스 킬먼이 늘 입고 다니는 옷이 인상적입니다. 바로 노란색 방수 코트입니다. 세상에 대한 격렬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 자신의 육체가 지닌 볼품없음,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으로부터의 모욕을 떨쳐 버리기 위해 신에 대한 믿음에 의지합니다.



울프의 서술 방식을 조금 더 맛보기 위해 미스 킬먼 부분을 짧게 인용해볼 게요. 같이 읽어봐요. 인상 깊답니다.

 

‘미스 킬먼은 층계에 서 있었고, 방수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것은 값이 쌌고, 둘째 그녀는 마흔 살이 넘었으며, 끝으로,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가난했다. 수치스러울 만큼 가난했다… …그런데 그녀는(미스 킬먼)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못생기고 가난했으니까… 타는 듯한 괴로움을 안고서, 미스 킬먼은 2년 3개월 전에 교회로 돌아섰다.’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얼핏 복잡해 보여도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읽다 보면 다양한 삶의 순간이 어우러진 인생 이야기임을 알 수 있어요. 파티가 끝나갈 무렵 인생에서 자기만의 목소리가 만들어진 피터, 샐리, 클라리사가 하는 말은 그런 인생에 대해 요약해줍니다.



파티 끝 무렵 피터는 이렇게 말하죠. ‘인생은 그리 간단치가 않은 것 같아요’. 샐리는 이렇게 대답해요. ‘우리 모두가 수인 아니겠어요? 자기 감방의 벽을 긁어 댄 사람에 관한 멋진 희곡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거야말로 인생의 참모습이라고 느꼈어요—감방 벽을 긁어 대는 것이 인생이지요.’


정말 마지막으로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소설이 결말을 향해 갑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겠지. 우리는 늙어 갈 거야. 중요한 한 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 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셉티머스)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중심을 비켜가므로 점점 중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이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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