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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폴 Oct 12. 2020

그래서 특별한 : 시적인 문장들이 빚어가는 죽음과 삶,

윌리엄 포크너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늘 우리 곁에 있는 주제, 죽음


우리 모두에게는 인지는 못해도 늘 가까이에 함께 하는 인생의 주제가 하나 있죠. 바로 ‘죽음’입니다.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멸해가는 행위’라고 철학적으로 말하기도 하죠. ‘삶 속의 죽음’이라는 이 명제가 잘 와 닿으시나요?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제목에도 죽음이 들어가지만, 가족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비교적 짧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포크너는 이 주제를 미국 남부의 가난한 가족이 겪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소설 속에서 죽은 이에 대한 슬픔이나 애도는 짧고, 죽은 이를 매장지로 옮겨 가는 여정 속에서 생기는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여정에는 온갖 일이 일어나는데, 그 일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들은 매장지인 도시에 가서 이루고 싶은 저마다의 소망을 하나씩 마음속에 갖고 있습니다. 즉 죽음 이후에도 남은 이의 삶은 계속되는 거죠.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거나 아니면 뉴스를 보면서 죽음에 대해서 짤막하게 떠올려 보거나 안타까워할 때가 누구나 있을 거예요. 실제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오래 슬퍼한 경험도 있을 거고요. 저의 서랍 깊숙한 곳에는 20년을 훌쩍 넘어 보관된 파스텔 색상 종이로 접은 종이학이 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멀리 떨어진 도시로 가는 저를 위해 직접 접어 선물해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 친구는 대학 진학 후 갑자기 신장이 나빠져 오래 입원을 했어요. 고 3 때는 미래를 같이 이야기하며 공부도 같이 하고, 긴긴 자율학습 시간에는 몰래 잡담도 나누던 친구였어요. 키가 정말 크고 늘씬해서 다리가 길고, 손가락까지 가늘고 길었죠. 늘 같이 도시락을 먹고, 같이 수험 준비를 하던 그 일 년이 생각납니다. 그 해 여름 대입을 위한 체력장 준비로 넓이 뛰기 연습을 할 때 반 친구들을 위해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여름 햇볕 아래서 모래를 만지며 모래를 편평하게 정리해 주던 친구 모습이 아직 기억납니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편지를 자주 보내주고, 제가 혼자 낯선 도시에서 외로울 까 봐 염려해주던 다정다감한 친구였어요.


입원기간이 길어져 병원의 공중전화로 가끔 연락하고 통화하곤 했는데, 몸상태가 나빠져서 점점 눈이 안 보이게 되던 어느 날 친구 언니가 대신 전화를 걸어 친구를 바꿔 주었어요. 친구는 전화기 너머 작은 목소리로 “보고 싶어!”라고 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엽서 끄트머리에 크게 써서 보내 준 ‘사랑해’라는 말도, ‘보고 싶어’라는 말도 오래 마음속에 남았지만, 다시는 친구를 볼 수 없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20대 초반 나이에 오랜 시간 슬퍼했습니다. 


그 당시 친구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감정과 생각들을 경험했는데, 그중에 내 친구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아무 일없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던 기억도 납니다. 친구의 죽음으로 슬픈 마음이 컸지만, 점점 친구의 부재가 익숙해지고, 친구가 곁에서 사라진 이후 겪었던 충격과 슬픔도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희미해지고 저는 또 계속 20대를 살아갔고, 그 종이학은 여전히 서랍 한편에 남아 있죠. 우리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목적지는 그냥 존재하지 않는 듯 잊히고, 눈 앞에 있는 크고 자잘한 일들에 파묻혀 매일을 살아가는 듯합니다.


난해한 포크너, 그래서 더 흥미로운 포크너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인 애디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 이후에 남은 가족들이 애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디의 관을 먼 곳으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이 펼쳐집니다. 눈에 띄는 점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의 표현은 거의 나오지 않고, 오히려 순간순간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가족들의 대처 방법입니다. 소설의 주요 소재가 엄마가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들이고 제목에도 ‘죽음’이 들어가는 부분이 익숙하지 않죠.


포크너 소설은 읽기가 어려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포크너의 문체가 난해하고 어렵기도 하고, 소설 구성이 복잡하며, 포크너 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나오는 미국 남부의 역사가 무겁고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56년 한 인터뷰에서 두세 번 읽어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독자들에게 어떤 읽기 방법을 제안하겠느냐고 묻자, 포크너는 ‘그럼 네 번 읽어요”라고 대답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길이가 다른 소설에 비해 짧은 편이고, 여러 화자가 등장해서 각각 몇 페이지 분량의 독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비교적’ 읽기 쉬운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도 ‘미국 소설의 서사 구조에 혁신을 가져온’ 소설로 평가받을 정도로 새로운 면이 많긴 합니다. 기법이 새로운 데다,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은유적 표현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죽은 엄마의 관을 싣고 매장지로 가는 여정 속에서 가족들이 겪는 일들을 읽으면서 오히려 삶이란 무엇인지 톺아보게 합니다. 포크너가 여성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도 살펴보면 좋습니다.


거기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면이 발견되는 소설이고, 포크너 소설을 접하고 싶은 분들이 처음 읽기에 좋습니다. 아 그래서 포크너 소설이구나 하고 경험해 보기에 좋은 소설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라고 여겨지는 부분들도 모두 1930년 대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1930년대 실험적인 기법의 소설을 능동적으로 읽는 경험은 소설 읽기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줍니다. 더불어 소설 곳곳에는 인생에 대해서 짤막하게 묘사하는 시적인 부분들이 ‘역시나 포크너!’ 하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독특한 이야기와 시적인 표현들과 실험적인 기법이 돋보이는 흔치 않은 소설이죠.


제목이 독특하고,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하며, 시적인 상징들이 낯설기도 하지만, 스토리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각 인물들의 내적 독백은 시를 읽는 것처럼 아름다울 때도 있습니다. 화자의 내적 독백이 길이가 대부분 짧기 때문에 연결해서 읽지 않아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여느 소설들과 다소 다른 부분들과 마주치는 순간이 있더라도 그 부분 또한 이 소설만이 가진 부분이므로 당황하지 않고 지나가면 됩니다.


우선 윌리엄 포크너는 어떤 작가인지, 이 소설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이 소설이 조금 더 익숙해집니다. 포크너는 미국 남부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포크너 소설에는 ‘요크나파토파’라는 가상의 도시가 있어요. 이름이 생소하지만 포크너 소설에 여러 번 나옵니다. 이 가상도시는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답니다. 


포크너 자신이 1897년 미시시피 주 뉴올버니에서 태어나서 옥스퍼드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 옥스퍼드가 포크너 소설 속 허구적 공간의 기초가 된 겁니다. 그는 ‘고향의 작은 우표’를 소재로 삼는 것이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란 도시 옥스퍼드를 ‘제퍼슨’이라는 고장으로 바꾸고, 라페이엣 군을 상상의 장소 ‘요크나파토파’ 군으로 바꾸어서 소설 속에 담았어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도 그곳의 가난한 백인 가족을 다루고 있어요.


포크너는 미시시피 대학에 잠깐 다니다 학교와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했어요. 처음에는 소설이 아니라 시를 먼저 썼던 거죠. 그래서인지 포크너의 문체는 그 어떤 작가보다 시적인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셔우드 앤더슨이 시인이 되길 열망했던 포크너에게 시보다는 산문에 더 재능이 있을 거라며 소설을 쓰기를 권유했다고 해요.


포크너는 곧 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에서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지만 출판사 편집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 미시시피 대학교 내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됩니다. 우체국 창구 뒤에서 늘 글만 썼거든요. 1926년 첫 소설을 썼고, 1929년에는 포크너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6월에는 어릴 적 친구 에스텔과 결혼을 했고, 10월에 포크너 대표 소설 <소리와 분노>를 출간했거든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포크너가 <소리와 분노> 집필 후 바로 쓰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는 포크너의 창작 에너지가 최고일 때였습니다. 이 소설은 1929년 10월 말에 쓰기 시작하여 그 해 12월 중순에 마쳤죠. 6주 정도 걸린 이 작품에 대해 포크너 자신은 “두 손을 등에 묶어 놓고도 이러한 작품을 쓸 수 있었다.”라고 직접 말했어요. “원고지 위에 첫 낱말을 쓰는 순간 마지막 낱말이 무엇으로 끝나며 어디에서 마지막 마침표가 찍히게 될지도 미리 알고 있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어요. 창작 에너지가 최고조였다는 것을 포크너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소설 집필 당시 포크너의 상황도 흥미롭습니다. 이 소설을 쓸 때 포크너는 결혼 후 생활을 위해 발전소 화부로 일하며, 한밤중에 손수레에 석탄을 실어다 보일러에 붓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을 쓸 당시의 상황에 대해 포크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상태에서, 즉 밤 12시와 새벽 1시쯤 전기 발전기 옆에서 이 작품을 썼습니다. 글을 쓰기에 그 발전기 소리는 이제까지 내가 들어 본 소리 가운데에서 가장 멋들어진 소리였어요”라고 말이죠.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라는 제목이 특별하죠. 포크너에게 제목에 대하여 물어보니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를 언급했어요. <오디세이> 11편에서 오디세우스가 지하세계에서 만난 아가멤논에게 그가 죽은 이유를 물어보니 아가멤논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그 개 눈을 한 여인은 내게 등을 돌렸고 내가 하데스로 가는데도 손으로 내 눈을 감겨주지 않았소.”라는 장면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 간단히 부연 설명을 하자면, 아가멤논의 부인이 클리타임네스트라예요.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자 부인이 슬펐거든요, 거기다 남편이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를 첩으로 데려오죠. 그래서 아가멤논을 죽여 복수하는 장면입니다. 소설 제목을 소설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복수’ 부분은 약간 연관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런 거대한 복수가 나오진 않지만 ‘소소한’ 복수에 공감이 충분히 됩니다.


그리고 포크너는 소설을 쓸 때는 이렇게 썼다고 말했어요. “내 경우 이야기는 하나의 아이디어나 기억 혹은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그림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사실 별것 아니다. 그런 아이디어나 기억, 그림이 떠오르는 순간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그로 인해 어떤 사건이 뒤따라올지 설명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다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쓸 때도 “나는 한 가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자연재해를 생각해 내어 그들에게 그것이 일어나게 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포크너가 이 소설의 구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지만, 자신의 소설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나 해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유명하답니다. 즉 모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는 거죠.


포크너는 1949년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노벨상 수상 당시의 일화도 포크너가 어떤 작가인지를 말해줍니다. “직접 상을 받으러 갈 수는 없을 거예요. 너무 먼 곳입니다. 나는 여기서 농사짓는 사람이라서 집을 비울 수가 없어요.” 그러고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장작을 팼습니다. 결국 설득되어 스톡홀름으로 갔고 빌린 양복을 입고 인상적인 수락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상이 한 인간으로서의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일에 즉 영광을 위해서 라거나 특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라는 재료로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을 창조하기 위해 인간 정신의 고통과 땀을 통해 이룩한 필생의 작업에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포크너는 아주 성실하게 글을 쓴 작가인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고는 7시부터 2시까지 일했습니다. 그리고 특별 제작된 종이 위에 나중에 고쳐 쓸 수 있도록 여백을 넓게 두고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 

시적인 문장들이 빚어가는 죽음과 삶, 기묘한 이야기들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는 한 가족이 만들어가는 열흘 간의 그로테스크한 여행기입니다. 우리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는 이야기죠. 작가가 직접 ‘삶과 죽음은 이런 거랍니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한 편의 소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읽고 나면 한 사람의 생애와 그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과 죽음, 그리고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소설의 중심은 번드런 집안의 아내 애디가 죽자 남편이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디의 관을 싣고 40마일 떨어진 매장지 제퍼슨으로 가는 이야기예요. 한 가족이 이 상황에서 ‘물’과 ‘불’로 인한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이 전개됩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여 끝내 제퍼슨에 도착해 관을 매장하지만, 기이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습니다. 


도대체 애디는 왜 자신의 관을 그 먼 곳까지 가서 묻어 달라고 했는지 궁금해지죠. 놀랍게도 이 유언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소한 복수입니다. 소설 제목에 나온 ‘복수’의 의미와 약간 연관이 있죠. 주인공 애디의 독백은 소설 중간 부분에 딱 한 번만 나옵니다. 하지만 이 독백에는 애디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 애디의 복수 이유, 그녀 삶의 비밀, 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생각, 언어의 한계 등에 대해 심오하면서 잘 이해되도록 풀어 가고 있거든요. ‘애디는 죽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독백이 가능하지?’라는 의문은 접어 두시고 계속 읽어 가다 보면 많은 부분이 맞춰지고 이해가 됩니다. 보편적인 예측에서 다소 벗어날 때가 있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소설 속의 번드런 가족은 남부의 가난한 백인 가족입니다. 포크너가 이 소설을 썼던 그 해 미국은 주식이 대폭락 하는 대공황이 시작되었어요. 전반적으로 그전부터 가난이 지속되었고, 미시시피 주 델타 지역의 지형 특성상 대홍수가 자주 일어났어요. 그래서 이 소설 속의 가족도 정말 가난합니다. 자기 땅을 소유하는 경우는 드물고, 집 건물 자체도 아주 낡고, ‘짚으로 만든 침대’와 ‘옥수수, 목화 농사’, 아들들이 죽어가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벌목으로 3달러’를 벌어야 하고, 엄마의 관은 직접 짜야하는 정말 가난한 삶을 사는 가족이에요. 그 가난 속에서 죽은 애디가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았 을지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는 실험적인 소설 기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1인칭 시점의 화자가 나오거나, 3인칭의 전지적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죠. 하지만 이 소설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가 여러 명 등장합니다. 무려 15명의 화자가 등장하고, 그중 번드런 가족 화자는 8명 이에요. 번드런 가족 구성원은 애디 다음으로 아버지 앤스, 다섯 아이들인, 캐시, 달, 주얼, 듀이 델, 바더만이 있습니다. 코라와 툴은 이웃에 사는 농부 부부입니다. 그 외 이웃 농부, 의사, 목사, 약사, 종업원 등의 화자가 나옵니다. 이렇게 화자가 많아도 포크너가 친절하게 각 화자가 바뀔 때마다 제목처럼 이번 차례에는 누가 말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에 특별히 헷갈리지는 않아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15명인 데다 소설 전체는 5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떤 장은 “엄마는 물고기다.”처럼 한 문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각 문장 앞에 숫자를 매겨 순서를 나타내는 부분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험적이라고 이름 붙인 겁니다. 15명이 대부분 내적 독백을 합니다. 독백의 형식은 소설에서는 드문 형식이에요. 그리고 각 인물들이 표현하는 독백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에 대한 시각이나 의견이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소설에서도 벌어지는 사건은 하나인데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화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보니 독자가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는 영역이 늘어나는 거죠. 하나의 진실을 바라보는 시각과 의견이 다양할 수 있음을 알 수도 있고요. 나아가 ‘삶의 실체는 파악하기 어렵다.’는 주제로도 이어집니다.


이런 실험적인 부분은 애디 대사 중에 “처녀 적 내 몸의 모양은         이다.”처럼 글자 없이 비어 있는 여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애디의 관을 짤 때는 관모양의 도형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실험적인 면이 있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빈 여백을 보게 되면 비어 있는 공간의 의미가 그 부분의 맥락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거든요. 


그리고 시제가 현재시제와 과거 시제가 섞여 나오기도 해요. 흔히 소설은 현재 시제보다 과거 시제로 많이 표현되어 있죠. 이 소설에서는 ‘말한다’라는 현재 시제도 있고, ‘말했다’라는 과거 시제도 있어요. 굳이 의미를 붙여 보자면 포크너가 인터뷰에서 ‘과거는 없고 현재만 있다’고 말한 부분과 연관을 지어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소설은 특히 독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필요하므로 왜 현재시제로 표현했을지는 읽어가면서 생각해 보기로 해요.


소설 내용도 여느 소설과 다른 특별한 부분이 나와요. 이와 관련해서 특별한 부분은 둘째 아들 달 부분에서 나오는데, 달의 독백 부분을 읽을 때 이 인물 많이 독특하구나 하고 느끼실 거예요.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을 보고 표현하거든요. 이런 특별한 인물인 달의 독백이 소설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도 특별하죠. 


이런 달에 대해 형인 캐시는 소설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합니다. “가끔씩 난 확신할 수가 없다.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미치거나, 완전히 정상일 수는 없을 거다. 마음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는 것이 쉽진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여겨지지만, 달이라는 인물의 독특함은 미리 알고 읽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달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 지도 이 소설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답니다.


죽음 이후 이 가족들이 겪는 일들과 그 일들에 대한 반응을 보면 번드런 가족은 복잡한 감정으로 얽혀 있는 가족임을 알 수 있어요.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과는 다른 부분들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가족의 성인 번드런은 영어 단어의 ‘짐’과 연결해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반면 몇 가지 힘든 일에도 불구하고 애디의 ‘관’을 결국 매장하는 이 가족들을 보면 가족이란 서로 내적 외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번드런 가족들의 공통 감정 중 하나는 증오와 미움입니다. 미움의 경우 나의 비밀을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겨 나기도 하고, 부부관계에서 생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애디가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농사일까지 해야 하는 삶은 많이 고달팠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서 애디와 앤스는 삶의 태도와 방식이 다름을 알 수 있어요. 이 부부의 관계는 파국이에요. 소설에서 단 한번 나오는 애디의 독백 부분에서 앤스에 대한 애디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애디는 남편 앤스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이미 내게 있어 이미 죽은 존재였다”고요. 그리고 아이가 다섯인 이유도 앤스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거든요. “주얼에 대한 속죄로서 앤스에게 듀이 델을 낳아주었다. 그리고 주얼 대신 가질 수도 있었을 앤스의 아이를 대신해서 바더만을 낳아주었다.” 애디의 삶은 고난이었던 것 같아요. 


애디의 아버지는 애디에게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 말은 2013년 제임스 프랭코 감독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의 첫 장면에도 나와요. 감독이 이 소설을 오랫동안 좋아했고, 이 말도 좋아했다는군요. 소설 속 애디는 이런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비밀과 이기적인 생각, 피가 다른 아이들”을 키우면서 점차 이 말을 실감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독자인 우리는 애디의 비밀이 무엇인지 , 피가 다른 아이들이란 무슨 의미인지 읽어가면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애디가 독살해서 죽이고 싶은 만큼 미운 앤스를 견딘 건 셋째 아이 주얼 때문이라고 나오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애디의 비밀도 알 수 있어요. 주얼의 이름과 주얼의 탄생 배경은 19세기 미국 문학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를 떠오르게 합니다. 애디가 주얼이 자신의 ‘십자가’인 동시에 ‘구원’이라고 하고, 자신을 ‘물과 불에서 구해낼’ 거라는 말도 하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 꼭 한번 찾아보세요. 호손의 소설 한 부분을 포크너 소설에서 찾는 재미가 있어요.


애디와는 다르게 앤스는 게으르고 뻔뻔하고 무능한 가장입니다. 이웃의 눈에도 앤스는 “어차피 자기 자신 외엔 책임질 수 없는 인간”으로 비칩니다. 앤스가 하는 행동 하나 말 하나 모두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인물입니다. 그래도 앤스 독백을 읽어 보면 이런 사람도 나름 자기의 변명은 있습니다. 그리고, 딸 듀이 델에게 하는 아버지로서의 말과 캐시의 부러진 다리를 처리하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앤스의 결정을 보면 정말 ‘독살’하고 싶었다던 애디의 심정을 백배 공감할 수 있어요. 애디가 왜 독백에서 앤스에 대해 그런 감정을 절절히 표현하는 지도 공감되고요.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인물이거든요. 


그리고 소설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결말입니다. 우선 그 하이라이트의 주인공은 남편 앤스입니다.  ‘죽음’이라는 소재가 있어 분명히 어두운 분위기도 있지만, 결말을 보면 또 코미디 같은 부분도 있어요. 결말에는 애디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그녀의 관을 우여곡절 끝에 매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이 가족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 하는데, 그 중심에 앤스의 뻔뻔한 행동이 있어요. 포크너의 이런 결말이 인생의 보편성인지 소설 속 앤스의 특징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번드런 가족이 매장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소설의 중심이어서 자칫 이 번드런 가족에게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빠져 버리기 쉬운데, 번드런 가족이 아닌 외부 화자가 알맞은 때에 등장해 실제 이 가족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객관적인 해설을 전해줍니다. 한여름에 허름한 마차에 탄 한 무리의 가족이 지나갈 때 얼마나 악취가 나는지, 앤스는 얼마나 우둔한지, 애디가 독특한 마을 주민이었는지, 번드런 가족들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전달하고 해설도 곁들여 줍니다.


번드런 가족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이들이 이웃집 코라와 툴 부부입니다. 코라는 이웃에 볼 수 있는 남의 이야기 잘하고, 남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나 관심 많은 그런 인물입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합니다. 병아리가 뱀 때문에 죽어서 병아리 가격이 치솟고 자신은 계란을 먹을 수도 없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그렇지 않은 애디를 비난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모든 현상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시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는 인물이죠.


애디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오만함을 지닌 외로운 여자, 40마일이나 떨어진 친정 제퍼슨에 묻어달라는 유별난 여자’라고 설명하는 인물도 이웃집 코라이며, 애디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코라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임종을 맞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하며, 애디가 얼마나 불쌍한 임종을 맞이 하는지 알려주는 인물도 코라입니다. 코라의 독백은 소설 첫 부분부터 나오고, 계란으로 케이크를 만들어서 파는 이야기를 하다가, 병상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애디의 모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요.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애디의 죽음에 대해 가족 구성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고, 각자 매장지에 가서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마음에 하나씩 품고 가고 있다는 부분도 흥미로워요. 온전히 장례를 위한 행렬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애도 한 켠에는 그와 별개로 읍내에 가면 읍내에 가면 이루고 싶은 소망들이 자리 잡고 있거든요. 캐시는 읍내에서 무엇을 얻고 싶었는지, 특히 외동딸 듀이 델의 이야기는 애디가 죽어가는 시점부터 무언가 혼자 고민 중인데 그 부분은 무엇인지, 읍내에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지 듀이 델의 비밀을 알게 되면 이 소설이 지닌 포크너의 특징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포크너 소설에는 듀이 델처럼 미혼의 어린 나이에 임신하는 여성이 자주 등장하거든요. 엄마 없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순진한 남부 시골 십 대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 꼭 확인해 보세요.


매장지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기괴한 이야기들, 특히 다리를 다친 첫째 아들을 어떻게 다루는 지도 찾아보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고, “사람은 말이나 노새와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까. 좀 다른 것이 있다면 말이 나 노새가 좀 더 지각이 있다고나 할까.”라는 번드런 가족에 대한 이웃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결말과 기괴한 이야기들이 독특함을 주기도 하지만, 포크너가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을 표현하는 방식도 돋보입니다. 포크너의 표현들이 섬세하고, 시적이고, 상징적이거든요. 번드런 가족들이 독백에서 드러내는 언어 표현들이 아주 뛰어나거든요. 고요한 밤 물을 마실 때의 달콤함이라든지, 모성이라는 단어가 가진 한계라든지, 존재의 핵심을 꿰뚫는 예리한 표현들까지 포크너의 표현들이 가진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요약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꼭 직접 읽고 음미해야 하는 부분이랍니다. 


막내 바더만과 달이 전달하는 독백이 실제 소설 속 인물의 특징과 어울리지 않게 고급 어휘를 구사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소설 속 인물을 창조할 때 포크너가 가진 고민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포크너는 자신의 소설에서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자아’가 아니라 자신의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고유한 자아’를 그리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이런 인물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그런 부분이 소설 인물들의 언어 표현에 담겨 있구나 이해하면 되거든요.


마지막으로 소설의 시작 부분을 짧게 설명할게요. 시작 부분을 무사히 읽고 뒤로 넘어 가야 소설 끝부분의 하이라이트를 확인할 수 있잖아요. 소설의 첫 부분 배경이나 분위기가 낯설 수 있거든요. 소설의 시작은 달의 독백으로 시작됩니다. 미국 남부의 목화밭을 걸어가는 달과 주얼이 나오고, 이들은 일을 끝내고 목화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예요. 그리고 집 마당에서 큰 아들 캐시가 엄마를 위한 관을 짜기 위해 톱질을 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소설이 시작된답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소재, 전개되는 이야기, 기법 등 어느 하나 평범한 부분은 없는 소설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인생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고, 어느 부분에서는 삶의 보편성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결국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길에 대해서도요.  소설에서 죽음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부분이 한 부분이 나오는데 애디를 보러 온 의사가 이렇게 말해요. “나는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 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 소설 전체의 이야기도 죽음으로 인한 변화,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견디는 가족의 다양한 모습들, 영원히 집을 떠난 엄마에 대한 이야기로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 한다’는 이 사실 속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았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죠. ‘죽음’을 이야기하다 보면 꼭 ‘삶’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소설 속에도 ‘죽음’을 매개로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요. 이 소설에서 포크너는 삶이란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바람도 소리도 없이 피곤하게 반복하는 지친 몸짓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강이나 땅처럼 불투명하고, 느리고, 때로는 폭력적인 것들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 천천히 인간의 삶을 형성하고 창조해 내고 있”다고요. 그래서 포크너가 이 소설 안에서 삶이 가진 피로함, 반복성, 불투명성, 폭력성, 운명적인 부분들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죽음’과 관련하여 셰익스피어 <햄릿>의 한 구절과 포크너 자신이 낙마 사고로 사망하기 전 ‘죽음’과 관해 언급한 표현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잠시 음미해보기로 해요. “죽는 것은 잠자는 것—그것뿐이지. 잠으로써 마음의 고통과 육체가 상속받은 수많은 충격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열렬히 바라는 삶의 완성.”이라고 햄릿이 말했고, “그 순간, 찰나, 밤, 어둠, 잠. 그때는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했던 일을 영원히 치워버릴 것이고, 그러면 그 일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라고 포크너는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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