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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Nov 20. 2024

서울대병원 유방외과 첫 진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22년 유방암진단 투병일기 기록합니다.  - 현재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암환자예요. 





가슴에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지고 유외과에서 "암"이란 얘길 들었다. 

그렇게 한 번의 충격을 겪고 3주 뒤 나는 서울대병원 유방외과에서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다시 검사해 보죠."


그때도 사실 묻고 싶었다. 다시 검사해서 암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인가.

근데 나는 꾹꾹 그 질문을 참았다. 어차피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몇 번을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암선고. 어차피 최종적으로 다시 듣게 될 것이 뻔한데 그날은 의사의 표정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왼쪽 종양은 암이 맞고 크기는 2센티 하나 1센티 하나 해서 3센티 정도로 보입니다. 림프 전이가 있고 오른쪽 종양은 양성으로 보입니다."


워낙 환자가 많아서 그럴까. 의사의 표정에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마치 감기환자처럼 느껴지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코감기도 있고요, 몸살도 좀 있네요. 코로나는 아닌 것 같으니 일단 치료해 봅시다.'


정도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른쪽에 있다는 양성종양도 그냥 들었다면 걱정을 했을 텐데 암이 아닌 양성종양이란 말이 그렇게 반갑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럼 수술하나요?"

"항암먼저 합시다. 호르몬성이어서 효과를 크게 기대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사이즈를 좀 줄인 다음에 수술 날짜 잡아봅시다."


(의사의 말이 그렇게 길고 다정하진 않았다. 그런 정도의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암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 이상의 충격이 다가왔다. 수술도 아닌 항암을 먼저 해야 한다는 소리.

나는 그때 벌써 머리는 다 빠지고 변기통을 붙들고 먹은 걸 다 토해내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허상처럼 내가 암이란 사실이 느껴지더니 의사가 내뱉는 무덤덤한 '항암'이란 단어에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종양내과로 일정 잡고 6개월 뒤에 봅시다."


이렇게 무서운 말을 하는 의사가 미웠다.

나는 6개월 동안 항암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궁금한 게 있어도 나는 물을 수가 없었다. 진료실 밖은 그 의사를 만나러 온 환자들로 미어터졌다. 진료시간 5분, 아니 3분도 긴 것이라 해야 할지.





나는 유방외과에서 종양내과로 보내졌다. 

의사가 잡아주는 예약스케줄을 기다리는 동안 진료실 밖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함께 간 남편은 처음 암진단을 받았던 때 이후, 내게 하지 않는 말들이 있었다. 내가 싫으니 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말들이기도 했다. 


"괜찮아?"

"어때?"

"어떻게 해."



등등 ,... 나도 모르겠는데 묻는 말들, 대답할 말은 뻔한데 대답하기 싫은 말들, 걱정하는 눈빛, 단어,...


그냥 모조리 다 싫은 걸 수도 있다. 

그래도 착실하게 그 모든 내가 듣기 싫은 말들을 다 하지 않아 주었다. 나는 그냥 감기 진료를 보기 위해 온 환자처럼 처방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기에 몸살까지 걸린 거 맞는데 코로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면 참 좋겠다. 


진료실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5분 컷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는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늘 오는 진료를 보러 온 듯 무심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앉아있었을까? 사실은 무서움이 너무 밀려와서 온몸에 힘이 다 빠졌던 것이 맞다. 


그날 나는 두 번째로 눈물이 터졌다. 

천천히 일어나서 나는 화장실로 움직였다. 큰 울음이 터지진 않았지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지난 3주간이 더 불안하고 무서웠지 이젠 치료를 시작하게 될 게 아닌가. 근데 진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걸 못 물어보고 나는 화장실 의자에 쪼그려 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기 간호사님. 교수님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네. 잠시만요."


눈물 콧물 다 닦고 나는 환자가 막 문을 열고 나온 진료실에 다시 들어갔다. 


"항암 하면 살 수 있는 거죠. 항암하고 수술하면 살 수 있는 거죠."

"해봅시다."


맞다. 100% 확신을 줄 수는 없는 그 이상하고 묘한 대답. 근데 나는 그게 힘이 됐다. 

해봅시다. 의사는 해봅시다. 했고 나는 할 수 있다 했다. 뭐든 다 한다고 했다. 


그날 두 번째로 울고 나는 6개월 항암을 하는 동안 막막하고 무섭고 두려워서 울지는 않았다. 물론 아파서 운 적은 있다. 그건 빼고, 내가 암이란 사실에 절망하며 울진 않았다. 무조건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해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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