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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31. 2021

시아버지 마음은 다홍색

“아이고! 뭐 이런 걸 사 왔어요! 요즘 젊은 애들은 이런 거 안 해요!”     



어머니는 목도리를 보자마자 불평을 터트리셨다. 만두를 빚다 말고 부족한 재료를 사오겠다며 동네 아래 시장에 다녀오신 시아버지는 만두피와 더불어 털목도리 두 개를 사왔다. 다가오는 신정 연휴에 먹을 만두를 갓 결혼한 동서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 함께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며느리들 선물만 사 온 시아버지에 대한 불만인지, 요즘 젊은 애들의 패션에 대해 부족한 안목에 대한 아쉬움인지 아무튼 시어머니는 목도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둘이 하나씩 가지라며 목도리를 내밀었다. 목도리는 검정색 비닐 봉투에 들어 있었다. 하나는 다홍색과 분홍색이 번갈아가며 배색된 무늬였다. 나머지 하나는 갈색과 황토색의 목도리였다. 둘 다 마음에 안 들었다. 하긴 어머니 말씀처럼 결혼한 지 삼 년차의 젊은 새댁이 하기에는 확실히 나이 들어 보이는 스타일이긴 했다. 



산뜻한 빨강도 아니고 애매하게 다홍이라니 난감한 색이었다. 그래도 우중충한 갈색보단 촌스러운 다홍이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선택권은 다양하지 않았다. 동서는 할 수 없이 남아 있는 황토색의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동서의 표정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님, 감사해요. 예쁘게 잘 메고 다닐께요.”     



며느리로서 할 수 있는 만큼의 환한 미소와 함께 감사의 말을 전했다. 봉투에서 목도리를 꺼냈다. 문제는 배색만이 아니었다. 분홍과 다홍의 각각의 칸이 올록볼록 모양을 지녀 스타일 역시 난감했다. 과연 매고 다닐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시어머니의 불퉁한 일갈에 시아버지는 조금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삼십년 가까이 아들만 둘을 키운 시아버지가 혼자서 며느리의 취향에 맞는 패션 아이템을 고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하지만 막내며느리까지 들인 올해에는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며느리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시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시장에서 혼자 어색한 모습으로 선물을 골랐을 시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무뚝뚝하고 덩치만 큰 아들들을 제치고 며느리 몫을 챙긴 시아버지의 마음이 분홍과 다홍 사이의 미묘한 색깔 조합마저 보기 좋게 만들었다.



묘하게 촌스럽지만 내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겨울용 소품이었던 시아버지의 목도리를 나는 꽤 한참 동안 두르고 다녔다. 이걸 메고 다닐까 의심스러웠는데 겨울마다 다홍색 목도리를 찾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가지고 있는 겨울 목도리만 여남은 개도 넘는데 왜 하필 가장 촌스러운 목도리에 그다지도 집착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세대를 뛰어넘는 취향의 다홍색 목도리는 시아버지가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시아버지는 2007년 갑작스러운 실족사로 그 어떤 한마디 유언 비슷한 말씀도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시아버지의 큰 며느리로 살았던 6년이라는 세월은 시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시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내 기억 속 시아버지는 평생을 경찰로 근무하셨고, 몸이 아픈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많이 도우셨으며, 20년 넘게 살아 온 성남의 구식 주택 이곳저곳을 돌보던 세심한 분이셨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삶의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사람은 시어머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딱 십 년이 지났을 때, 어머니는 지나가는 말로 이제 와 고백하건데 한동안 정신병원을 다녔다고 하셨다. 더 이상 깊은 말씀은 없으셨지만 시어머니에게 아버님의 자리란 그 만큼이었던 것이다. 자식인 우리로서는 상상으로라도 가늠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 글을 쓰던 어느 여름날, 글을 마무리하다 말고 시아버지가 주신 목도리를 찾아 대대적으로 옷장 정리를 했다. 하지만 1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목도리를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님의 마음과 기억마저 같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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