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이사를 꽤 다녔다. 소설 속 누구처럼 매년 이사해야 하는 고단한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초등학교만 3개를 다닐 정도였으니 이사 경험이 적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모두 비슷한 곳에 위치한 학교들이어서 거리가 아주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A 국민학교에 1982년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니고, B 국민학교에서 2년을 수학한 후, C 국민학교에서 졸업했다.
나의 첫 학교인 A 국민학교는 소사동에 있었다. 초록색 펌프의 마당집에서 이사 간 곳이 소사동이었다. 하지만 그 동네에서는 고작 1년을 살았을 뿐이다.
A동에서 B동으로 이사 간 것은 82년 초 겨울방학이었다. 아직은 1학년이 끝나지 않아 봄 방학 전까지 일주일정도 등교를 해야만 했다. 새 학년에 새 학교로 전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엄마는 2월 봄방학 전까지는 A 국민학교에서 1학년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이사 간 B동 집에서 A 국민학교까지는 거리가 꽤 멀어서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만 했다. 첫날은 할머니가 같이 학교에 오고 가면서 버스 노선과 내려야 할 정류장, 그리고 정류장에서 집까지의 길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혼자 버스로 통학을 하라는 엄마와 할머니의 통보는 나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워낙에 겁 많고 소심했던 나에게 낯선 길을 일주일씩이나 버스로 통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혹시라도 버스가 늦으면 학교에 지각할까 봐 가슴 졸이고, 버스정류장을 착각해서 잘못 내릴까 봐 전날 이부자리에서부터 걱정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일주일동안 아무 사고 없이 버스 통학을 잘 끝냈지만 여덟 살짜리 소심한 꼬마에게는 파란만장 모험 가득한 통학 길이었다.
이사 때문에 학교 통학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일은 또 있다. B 동으로 이사 후 나는 두 번째 학교인 B 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2학년이 시작하는 새 학기 첫날에 맞추어 전학을 갔기에 크게 학교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학 가던 첫날 엄마는 나와 함께 학교에 갔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집에서 학교까지 온 길을 따라 반대로 오면 집이 나온다며 혼자 하교하라고 했다.
난 예나 지금이나 소문난 길치다. 학교가 파할 때까지도 혼자서 어떻게 집에 가야 하는지 아침의 등굣길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나는 고작 아홉 살이었고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길도 낯설었지만 사람은 더욱 낯설었다. 물어볼 친구도 없었고 물어본다 해도 나에게 익숙한 지명은 그저 우리 집 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정문을 나선 후, 나는 익숙한 동네가 나올 때까지 한참을 헤매야 했다. 눈물이 찔끔거렸지만 울고 나면 진짜로 집을 못 찾을 것 같아 참고 또 참았다. 이쪽 길로 갔다가 아닌 것 같아 반대편 길로 갔다. 집 근처처럼 보이는 익숙한 곳이 나올 때까지 갔다가 아니면 또다시 학교로 왔다. 학교에서 다시 집으로 가는 길처럼 보이는 골목길을 따라 익숙한 곳이 보일 때까지 걸었다. 그러길 몇 번, 드디어 내가 놀던 집 앞의 익숙한 골목길을 찾았을 때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집으로 뛰어갔다. 내 집이 주는 안락함과 평온함을 난 이미 아홉 살 인생에서 알았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늘 이런 식이었다. 대학교 2학년 난생 처음 미국으로 연수를 떠날 때도 엄마는 담담한 얼굴로 나를 혼자 보냈다. 빅사이즈 캐리어백 두 개를 들고 등에 배낭을 멘 나에게 엄마는
“전공이 영어인데 무슨 걱정이니. 비행기 표에 써져 있는 거 잘 읽어보고 공항에서 번호 잘 보고 나가면 다 할 수 있다.”
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표 한 장 달랑 들고 아메리칸 에어라인에 몸을 실은 것이 스물 두살의 일이다. 비행기라곤 달랑 한번 타본 데다가 국적기도 아닌 비행기라 승무원에게 말 한마디 시키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아껴보겠다며 환승까지 해야 하는 여정이었으니 나의 첫 미국행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촉박한 비행기 환승 시간에 쫓겨 LA공항 내에서 쫒기는 마음으로 달음박질치던 스물두 살의 나는 이제 스무 살짜리 딸을 둔 엄마가 되었다. 큰딸이 대학기숙사로 떠나던 날, 혈혈단신으로 나를 미국으로 보내던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하니 마음이 서늘해졌다. 큰 딸을 안아주고 아무 때나 전화하면 달려오겠다는 나에게 다짐하는 말을 하고 돌아온 다음 날,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외국에 나가 본 적도 없고 비행기도 한번 밖에 안 타봤는데 나 혼자 미국 보낼 때 걱정 안 됐어? 난 큰애 기숙사만 들어갔는데도 너무 걱정 돼”
“넌 야무져서 걱정 하나도 안했는데....”
엄마는 여전히 태연하다. 그리고 아직도 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 A 동 버스정류장에서 학교 갈 버스를 기다리던 여덟 살짜리의 동동거리던 발을, 종례 후 혼자서 집에 돌아가야 할 걱정에 아침에 온 길을 수십 번 되뇌던 아홉살짜리의 콩닥대던 심장을, 낯선 LA 공항에서 영어라는 언어 하나에 매달려 시카고 행 비행기의 라스트 콜을 들으며 보안요원이랑 큰소리로 싸우던 스물두 살짜리 동양인 여자애의 소심한 영어 발음을.
이젠 엄마한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엄마, 나를 키운 팔 할은 엄마의 무심한 듯 무모한 용감함이야. 나 하나도 안 야무져. 나 완전 소심하고 완전 덜렁대거든. 엄마가 날 야무지게 키운 거지. 근데 이렇게 키워줘서 고마워,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