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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양 Apr 20. 2024

고양이 손녀라니..

어느 날 갑자기 집사가 되었습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 때문에 늘 혼자였다던 어린시절. 하지만 나에게도 든든한 존재였던 외할머니가 곁에 계셨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내 책가방을 대신 메고 등교를 함께 했던 외할머니가 외삼촌네와 함께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어느 날 길 가던 동네사람에게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사 왔다. 전세를 전전하던 우리 집이었기 때문에 강아지를 갖고 싶다고 졸라본적도 없는데 엄마가 직접 강아지를 사 오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게 나의 첫 번째 강아지였다. 이름은 초롱이로 지었다. 반지하에서 여러 집이 함께 사는 주택에서 메인인 가운데 집으로 이사를 간 우리 집 마당에 묶어둔 초롱이는 어느 날 줄이 끊겨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형편이 좀 나아진 우리 집은 빨간색 벽돌 2층 주택의 1층으로 이사를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하얀색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발바리라 불리는 믹스견이었지만, 하얀 털이 이쁜 암컷 강아지였다. 역시나 이름은 초롱이로 지었다. 넓지도 않은 좁은 마당에 살던 초롱이는 하교하고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엄마아빠가 싸우는 날이면 초롱이를 붙잡고 울었고, 외로울 때는 초롱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함께 지낸 지 몇 해가 지나 초롱이는 아무도 모르게 새끼를 낳았고 그중 모두가 죽고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하얀색 순백의 초롱이의 새끼는 검은색이어서 어린 나에게 충격을 줬지만, 새끼를 씻기고 함께 살 준비를 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빠와 엄마가 분주하더니 아빠는 초롱이와 새끼를 데리고 나갔다. 그게 초롱이와의 마지막이었다. 적어도 인사라도 할 시간을 줬더라면 덜 슬펐을까. 아무런 얘기도 없이 아빠는 두 아이를 팔고 왔다. 그 후로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엄마는 내가 많이 슬퍼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위층에 살던 집주인 새댁이 몇 번의 유산을 해서 예민해져 엄마에게 갑질을 했었다고 한다.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니, 아줌마는 그 나이가 돼서 남의 집에 세 들어 산다니 등 몹쓸 소리로 엄마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고, 그 갑질에 엄마는 초롱이를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초롱이를 보낸 그날은 나에게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엄마에게는 선명했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딸이 애지중지하던 친구를 보내고 울던 모습에 집 없는 설움을 절실히 느꼈을 엄마였다. 그 후로 내가 성인이 돼서도 엄마는 절대 강아지는 키우지 말라고 늘 말씀하셨다. 키우는 것보다 이별할 때 슬픔이 더 크기 때문에 나를 걱정해서 절대 동물한테 정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엄마였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고양이를 주워왔다니 엄마는 놀라수밖에 없었다.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다고 하니 엄마의 첫마디는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하냐"라는 말이었다. 키우는 걱정보다 이별했을 때 혼자 남을 나의 마음을 걱정하는 엄마였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매일같이 전화해서 가을이의 안부를 묻는 엄마였다. 엄마의 꽃무늬 손수건은 지금도 가을이의 이불로 쓰고 있는데 낯가림이 심한 가을이가 유일하게 엄마에게는 곁을 준다. 조카가 왔을 때는 하악질을 해서 마음에 상처를 주던 가을이가 엄마만 오면 가서 냄새를 맡고 헤드번팅까지 해준다.


이번 설날에 조카와 엄마가 우리 집에 왔는데 농담으로 가을이를 대동해 "할머니 간식 사 먹게 용돈 주세요"라고 했더니 엄마가 용돈 2만 원을 주셨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 왠지 마음이 찡해졌다.


난임으로 힘들어하는 주변 지인들의 친정부모님을 보면 몸에 좋은 것을 챙겨주던데, 난임병원도 함께 가주고 잘한다는 한의원도 함께 다니면서 극성맞게 하던데 이상하게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딸이 감기만 걸려도 유난을 떨었을 엄마였지만,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이상하게 난임문제만은 관여하지 않았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라도 왜 마음이 쓰이지 않았겠는가. 내가 첫 번째 유산을 했을 때는 죽을 사들고 택시를 타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보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독하게 괜찮다고 했던 내가 더 마음이 아팠을 엄마였다. 첫 번째 유산 후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도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셨지만, 그때는 내가 위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 건성으로 대답하며 "괜찮아 그만 얘기해"라며 회피를 했었다. 그런 나에게 '병원은 잘 다니고 있는지, 결과는 어떤지 등' 궁금한 것들이 있어도 내 마음이 상할까 봐 더 이상 부모님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우리 엄마도 7년 만에 언니를 낳았고, 중간에 아이를 먼저 떠난 경험 후 40이 넘은 나이에 나를 낳은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엄마가 내 마음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엄마도 아이를 못 가질 때 10남매를 둔 큰엄마와 비교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시부모님의 핍박에 용하다는 점집도 찾아가 보고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사람의 속옷까지 구해보는 등 다양한 방법을 써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결국 19살에 결혼해 26살이 되어서야 엄마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미 그런 경험을 해본 엄마는 생각지도 않은 나이에 나를 가졌고, 반갑지도 않은 딸을 낳아 나의 탄생이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고 한다. 동네 창피한 일이었던 나의 탄생은 우리 집의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그런 내가 엄마를 닮아 아이를 낳지 못하니 누구보다 눈치를 봤던 건 엄마가 아니었을까. 돌아가신 아빠는 엄마가 아이를 낳지 못했을 때도 한 번도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난임이 되자 아빠는 엄마에게 "자네를 닮아서 그런가"라며 원망 아닌 원망을 했다고 한다.




그런 엄마가 사람도 아닌 고양이 손녀에게 용돈 2만 원을 주신다. 이번에도 엄마가 용돈을 줬더니 가을이가 고맙다며 엄마 다리사이에 가서 헤드헌팅을 하는데 어찌나 영특한지 우리 모두 놀랐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고 남편이 "근데 장모님은 무슨 용돈을 2만 원이나 주셔 천 원만 주셔도 되는데"라며 한마디를 했다. 생각을 해보니 정말 그랬다. 용돈을 주는 행위만 하셨어도 나는 기뻤을 텐데 거금 2만 원을 받는 고양이 손녀라니 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었다. 집안에서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우리 엄마가 고양이 손녀를 좋아하신다.


아니, 초롱이를 데려왔을 때처럼 우리 엄마는 반려동물로 인해 행복해하는 자신의 딸이 좋아 가을이를 이뻐하신다. 늘 "가을이 덕분에 네가 덜 심심하고 위안이 되겠다"며 단순한 동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중한 존재로 인정을 해주시는 것 같다. 용돈 받는 가을이를 보면서 고양이가 아닌 진짜 손녀였다면 우리 엄마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 전 엄마는 지금이라도 아이가 생기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무릎을 가지고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럼 우리 엄마 손녀가 학교 갈 때까지 보겠다며 100살까지 살겠네"라며 얘기했더니 엄마의 눈빛에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혼자남을 늦둥이 딸 때문에라도 오래 살아야 한다는 팔순노모를 더 장수하게 하는 방법은 역시 손녀일까.

나는 오늘도 마음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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