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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로켓 개발 경쟁

■ 미국과 소련의 경쟁    

    1676년 2월 어느 날 로버트 훅(Robert Hooke)은 광학에 대해 한창 논쟁 중이던 뉴턴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에는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킨 구절이 들어 있는데, 대략 내용은 이렇다. “데카르트가 한 일은 좋은 조치였습니다. 당신은 몇 가지 방법을 추가했는데, 특히 얇은 판의 색상을 철학적으로 고려했습니다. 만약 내가 더 멀리 본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논란을 일으킨 구절은 마지막 구절이다. 얼핏 보기에는 자신의 업적이 갈릴레이와 같은 위대한 ‘거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겸손함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뉴턴이 훅을 조롱한 것으로 해석한다. 선천적으로 몸이 왜소했던 훅은 척주 후만증(일명 곱사등)을 앓았는데, 이런 훅에게 ‘거인’이라는 표현을 써 조롱했다는 것이다. 마치 어떤 여자가 사이가 좋지 않은 키 작은 남자에게 “저는 키 큰 남자만 좋아해요.”라는 쪽지를 건넨 것과 마찬가지다.

1689년 46세의 뉴턴
후크로 추정되는 초상화. 뉴턴이 후크의 초상화를 대부분 태워 버렸다.

훅이 편지를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이가 나빴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뉴턴과 훅은 중력, 천문학, 광학 등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Principia)를 출판했을 때 훅은 만유인력의 역 제곱 법칙이 자신이 고안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뉴턴은 훅의 연구는 수학적 증명이나 다른 증거도 없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라며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훅은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뉴턴의 재능을 시기했고, 일기장에 뉴턴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쓸 만큼 증오했다. 뉴턴 역시 자신의 이론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훅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1703년 훅이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훅이 죽은 후 영국 왕립학회 회장이 된 뉴턴은 그의 논문과 원고를 모두 불태웠고, 왕립학회에 걸려있던 훅의 초상화도 치워 버렸다.

훅과 뉴턴의 싸움과 같은 치열한 경쟁은 과학 분야에서 심심찮게 일어난다. 19세기 말에 벌어졌던 에디슨과 테슬라 사이의 전류 전쟁이나 파스퇴르와 코흐 사이에 벌어졌던 탄저병 백신 전쟁도 그런 싸움이다. 이런 싸움은 감정적으로 격화되어 죽을 때까지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과학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는 꽤 긍정적이다.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과학은 혹독한 비판과 시행착오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훅과 서로 죽이고 싶을 만큼 싸웠던 뉴턴도 훅과 주고받은 편지로 잠자고 있던 천문학에 관한 관심이 다시 일깨워졌다고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에게 고백하기도 했다. 수십 년에 걸친 훅과 뉴턴의 싸움이 당사자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싸우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고 그에 따라 인류의 과학도 진보했다.

로켓 기술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아주 빠르게 발전했다. 차이가 있다면 뉴턴과 훅처럼 개인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간의 싸움이라는 것이다(물론 파스퇴르와 코흐의 탄저병 백신 전쟁도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경쟁이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두 생물학자의 싸움이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이 났다. 독일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곧바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바로 로켓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런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V2 로켓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기였다. V2 로켓은 기존의 대포와는 다른 차원의 무기였다. V2 로켓은 자이로스코프가 내장되어 있어 스스로 평형을 유지하며 비행할 수 있었고, 아날로그 컴퓨터로 비행시간을 설정하여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첨단 무기였다. 전쟁 후반기에는 무선 유도 장치까지 장착했다. 미국과 소련은 로켓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말에 개발된 핵폭탄을 로켓에 장착한다면 전차, 대포, 전투기와 같은 2차 대전의 주력 무기들은 한낱 장난감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V2 로켓에 관심을 기울인 나라는 미국이나 소련뿐만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나라가 로켓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나라가 개발 모델로 삼은 것은 V2 로켓이다. 폰 브라운을 데려간 미국은 V2 로켓을 기반으로 레드스톤, 주피터-C와 같은 로켓을 만들어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소련은 패망한 독일의 로켓 공장에 남아 있던 로켓과 부품들을 모두 가져가 V2 로켓을 복제한 R-1 미사일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1957년 R-7 로켓을 개발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다.

중국은 동맹관계였던 소련에서 수입한 R-2 로켓을 복제해 둥펑-1(東風-1) 미사일을 만들었다. 중국은 둥펑 미사일을 개량하여 창정(長征) 로켓을 개발하였으며 창정 5호는 2020년 7월 탐사선 텐원(天問) 1호를 화성에 보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를 연상시킨다. V2는 R-1을 낳고, R-1은 R-2를 낳고 R-2는 둥펑-1을 낳고 둥펑-1은 창정과 그 형제들을 낳고….

이 밖에 프랑스가 개발한 액체 연료 로켓 베로니크(Véronique)의 개발에도 페네뮌데에서 일했던 독일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이렇듯 로켓의 역사에서 V2 로켓과 폰 브라운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아이언 맨(Iron Man)의 역사를 얘기할 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미국의 로켓 개발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재빨리 독일의 페네뮌데 공장에서 V2 로켓의 엔진과 동체, 추진제 탱크, 자이로스코프와 같은 주요 부품들을 노획해서 뉴멕시코주로 가지고 갔다. 그 양은 무려 화물열차 300칸이 넘었다. 그리고 V2 로켓의 유도, 항법 및 제어 시스템과 같은 로켓의 운용과 관련된 소프트웨어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폰 브라운을 미국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나치는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독일의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내가 못 먹을 바에는 차라리 침을 뱉겠다는 생각이었다. V2 로켓의 개발을 주도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도 당연히 제거 대상이었다. 나치를 위한 헌신이 헌신짝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나치 친위대의 감시를 받고 있던 폰 브라운은 다행히 처형 직전 탈출에 성공했고 그가 선택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폰 브라운은 그와 함께 연구하던 동료 과학자들을 데리고 미국에 투항했다. 

미국에 도착한 폰 브라운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부근인 텍사스의 포트 블리스 미군 기지로 보내졌다. 폰 브라운이 미국에 온 사실은 한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미국의 필요로 데리고 왔지만, 공개적으로 선전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는 엄연히 나치 협력자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온 폰 브라운의 위상은 독일과 미국 사이의 거리만큼 달라졌다. 피네뮌데의 로켓 공장에서는 수천 명의 엔지니어를 지휘하던 최고 책임자였지만, 미국에서는 투항한 패전국의 과학자에 불과했다. 그는 공학 학사 학위를 가진 26세의 육군 소령 짐 해밀(Jim Hamill)의 관리를 받았다. 미국에 함께 온 독일 과학자들은 여전히 그를 ‘교수님(Herr Professor)’이라고 불렀지만 해밀은 그를 단지 ‘베르너’라고 불렀다. 달라진 위상과 함께 낯선 환경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폰 브라운은 포트 블리스가 ‘진심으로 애착이 가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미국에 함께 온 수석 설계 엔지니어 발터 라이델(Walther Reidel)은 폰 브라운이 “미국 음식은 맛이 없고, 닭은 고무 같아서 싫다.”라는 말을 했다고 신문 인터뷰에서 밝혔다.

폰 브라운에게 맡겨진 임무는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V2 로켓의 제작과 운용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폰 브라운에게 새로운 로켓 개발 임무를 맡겼다면 단기간에 소련을 압도할 수 있었겠지만,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런던과 앤트워프에 떨어진 수천 발의 로켓을 만들던 사람에게 로켓 개발 임무를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폰 브라운의 기술 전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로켓 기술은 생각처럼 빨리 발전하지 못했다. 단지 V2 로켓을 조립해 발사해보는 수준이었다. 로켓 기술이 독일보다 25년가량 뒤져 있던 상황에서 단지 독일에서 가지고 온 로켓 부품을 조립해 본다고 해서 기술이 갑자기 향상될 수는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로켓 개발 계획을 조정하는 단일 지휘체계가 없다는 것이었다(지금의 NASA는 1958년 이후에 설립되었다) 전쟁 직후 독일에서 가지고 온 로켓 부품은 군과 민간 연구소로 보내졌고 각 기관은 정보 공유 없이 개별적으로 로켓 발사 시험을 하고 있었다.

1958년 9월 발사되는 레드스톤 로켓

결국 미국 정부는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폰 브라운에게 로켓 개발 임무를 맡겼다. 뉴멕시코에서 앨라배마 헌츠빌(Huntsville)의 육군 로켓 연구소로 근무지를 옮긴 폰 브라운은 V2 로켓을 개량해 미국 최초의 핵 탄도 미사일인 레드스톤을 개발했다. 하지만 미국의 로켓 개발은 여전히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었다.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과 공군에서도 로켓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들은 협력보다는 경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침 지구 물리학계 과학자들이 1957년을 ‘국제 지구 물리 관측의 해’로 지정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기념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육·해·공군은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로켓을 개발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최초’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단어였다. 육군은 폰 브라운의 주도로 레드스톤 로켓을 개량한 주피터-C 로켓을 만들었고, 해군은 뱅가드 로켓, 공군은 아틀라스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다. 성능 면에서는 단연 주피터-C 로켓이 가장 앞서 있었고 성공 가능성도 가장 컸다. 아직은 미국에 폰 브라운을 따라올 만한 로켓 과학자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선택한 것은 해군의 뱅가드였다. 미국 정부는 나치 독일 출신의 과학자가 개발한 로켓으로 최초의 인공위성이 발사되는 장면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 스푸트니크 쇼크

한편 소련은 폰 브라운을 미국에 뺏기긴 했지만, 나머지 독일 과학자들과 피네뮌데에서 가지고 온 많은 양의 로켓 부품이 있었다. 그리고 소련이 미국과 다른 점은 국가의 주도와 통제 아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로켓 개발에 매진한 것이다. 거기다가 소련에는 폰 브라운에 버금가는 로켓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СергейКоролёв, 1907~1966)가 있었다.

폰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코롤료프도 우주와 로켓에 관심이 많았다. 스물두 살 때인 1930년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코롤료프는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코롤료프가 우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폰 브라운이 우주 비행 협회에 가입해 로켓 개발로 우주여행의 꿈을 키웠던 것처럼 코롤료프도 소련의 유명한 로켓 연구 그룹인 ‘반작용’에 가입해 활동했다(로켓의 발사 원리인 뉴턴의 운동 제3 법칙 ‘작용과 반작용’에서 이름을 따왔다). 1933년 이 그룹에서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URD-X를 발사했다. 동료의 모함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수용되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낸 코롤료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로켓 개발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폰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요구하는 무기 개발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우주에 있었다.

코롤료프의 뛰어난 능력과 중앙 통제식 로켓 개발 정책으로 소련은 냉전 초기에 미국을 압도했다. 미국의 로켓 개발이 지지부진하던 사이 1957년 8월 소련은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R-7을 개발했다. R-7은 3메가톤의 수소 폭탄을 싣고 7,000km를 날아갈 수 있었다. 공군력이 미국에 비해 약했던 소련이 핵폭탄이나 수소 폭탄을 비행기에 싣고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게 되었다.

로켓을 바라보는 소련 정부와 코롤료프의 관점은 사뭇 달랐다. 소련 정부가 생각하는 로켓은 오로지 미국을 타도할 수 있는 무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코롤료프에게 로켓은 우주를 나갈 수 있는 수단이었다. 코롤료프는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싶었다. 1954년 코롤료프는 R-7을 이용하여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고 소련 정부에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소련 정부는 인공위성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955년 미국 아이젠하워 정부가 인공위성 발사 계획을 발표하자 상황이 변했다. 소련으로써는 무엇이든 미국에 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던 시기였다. 소련 정부는 코롤료프의 인공위성 발사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1957년 10월 4일.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실은 R-7 로켓이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되었고 잠시 후 스푸트니크 1호는 지구 궤도에 올랐다. 스푸트니크 1호는 지름 58cm, 질량 83.6kg에 불과했지만, 인류가 쏘아 올린 최초의 인공위성이 되었다. 스푸트니크의 발사는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발사가 성공할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금요일이었던 그날 밤 미국의 과학자들은 워싱턴 D.C.의 소련 대사관에서 ‘국제 지구 물리 관측의 해’ 기념 학술 세미나를 마치고 소련 과학자들과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미국 과학자들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소련이 발사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스푸트니크 1호가 지구를 두 바퀴나 돌고 난 후였다.

2007년 우크라이나에서 발행된 스푸트니크 발사 50주년 기념우표. 왼쪽이 코룔로프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말 그대로 ‘스푸트니크 쇼크’였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미국의 30%에 불과한 후진 농업국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것이다. 충격이 더 컸던 것은 소련이 그동안 로켓 개발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첩보 위성이 지상에 있는 1cm 크기의 물체를 판독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지름 58cm의 인공위성이 미국에 던진 충격은 공포에 가까웠다. 이제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스푸트니크 대신 핵탄두를 미국으로 쏘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실제로 1960년 발사된 스푸트니크 4호의 잔해가 미국 위스콘신주에 떨어졌다).

그러나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는 시작에 불과했다. 소련은 한 달 뒤인 11월 3일 스푸트니크 2호에 개(라이카)를 태워 우주로 보냈다. 최초로 생명체를 우주로 보낸 것이다(안타깝게도 라이카는 귀환 도중 사망했다). 이후 소련은 우주와 관련된 대부분의 ‘최초’ 기록을 세웠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1961년 4월,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인(1963년 6월,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최초의 우주유영(1965년 3월, 알렉세이 레오노프)은 모두 소련의 차지였다.


■ 미국의 달 탐사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로 큰 충격에 빠진 미국은 부랴부랴 인공위성 발사를 추진하지만, 큰 망신을 당한다.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에 성공한 지 두 달이 지난 1957년 12월 6일 인공위성을 싣고 발사된 뱅가드 로켓은 발사 후 1.2m를 상승하고 2초 만에 발사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뱅가드의 엄청난 폭발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결국 폰 브라운이 다시 소환되었다. 1958년 1월 31일 폰 브라운의 주도로 개발된 주피터-C 로켓은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지구 궤도에 올렸다.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었다.

소련에 이어 미국도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했지만,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컸다. 1958년 5월 소련이 발사한 스푸트니크 3호의 질량은 1,327kg에 달했지만 같은 해 7월에 미국이 쏘아 올린 익스플로러 4호의 질량은 불과 25.5kg이었다. 로켓이 실어 나를 수 있는 물체의 무게는 곧 로켓이 실어 나를 수 있는 폭탄의 무게로 치환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익스플로러 1호. 오른쪽 앉은 사람이 폰 브라운

미국은 결국 1958년 10월 NASA(미항공우주국)를 설립하고 막대한 예산을 우주 개발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958년의 NASA 예산은 연방정부 예산의 0.1%였지만, 1966년에는 4.41%까지 증가했다. 여러 개의 ‘최초’를 소련에 빼앗긴 미국은 좀 더 큰 계획을 세웠다. 1962년 9월 12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라이스 대학(Rice University)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We choose to go to the Moon)” 달에 사람을 보낼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그것도 1960년대가 가기 전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남은 기간은 8년도 되지 않았다. 무모해 보였지만, 이미 소련은 1959년 9월에 루나 2호를 달 표면에 충돌시켰기 때문에 미국의 처지에서는 달에 사람을 보내는 이벤트 외에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의 기술력으로는 무모한 계획처럼 보였다. 그리고 미국 국민의 58%가 이 계획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무런 근거 없이 소련에 대한 경쟁심만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었다. 유인 달 탐사 아이디어는 폰 브라운의 생각이었다. 폰 브라운은 이미 달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는 대형 로켓 개발을 구상하고 있었고, 미국 정부는 폰 브라운의 아이디어를 검토한 후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했다.

육군 로켓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던 폰 브라운은 1960년 새로 설립된 나사에 합류하여 로켓 개발 임무를 맡았다. 폰 브라운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나사는 폰 브라운이 육군 로켓 연구소에서 개발 중이던 새턴 로켓을 나사에서도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사실 이 문제로 폰 브라운의 나사 합류가 1년 정도 늦어졌다). 케네디 대통령이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하기 전 폰 브라운은 이미 새턴 로켓의 개발을 연구하고 있었다.

폰 브라운은 나사에 합류한 이듬해인 1961년 1월부터 새턴 로켓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개량된 새턴 로켓은 새턴 V 로켓에서 정점을 이룬다. 새턴 V 로켓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괴물 로켓이다. 5개의 엔진을 하나로 묶은 1단과 2단, 그리고 한 개의 엔진이 탑재된 3단 로켓으로 구성된 새턴 V의 저궤도(고도 2,000km 미만) 화물 수송 능력은 무려 140t이다! 질량 100kg인 사람 1,400명을 지상 2,000km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최초 발사된 지 4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새턴 V의 탑재 능력을 넘어서는 로켓은 없다(스페이스 X가 개발 중인 초대형 발사체 스타십 헤비의 탑재 능력이 100t이다). 폰 브라운이 이런 로켓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폰 브라운은 처음부터 새턴 V를 달이 아닌 화성까지 보낼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새턴V 로켓 앞에 서 있는 폰 브라운

이후의 전개 과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 명의 우주인이 탑승한 아폴로 11호는 새턴 V 로켓을 타고 달까지 날아갔고, 1969년 7월 21일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달 표면에 남겼다. 소련이 세운 여러 개의 ‘최초’ 기록을 이 발자국 하나로 뭉개버렸다. 1958년 14kg에 불과한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겨우 발사했던 미국으로서는 감개무량한 일이었고 그 중심에 폰 브라운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 폰 브라운이 미군에 투항하지 않고 소련군에 투항했다면 아폴로 11호는 과연 달에 갈 수 있었을까?’ 이 가정은 클레오파트라의 코 높이보다는 중요한 것 같다.

아폴로 11호를 싣고 발사되는 새턴V 로켓

미국 국민은 아폴로 11호의 성공에 환호했고 나사는 그 이후 아폴로 17호까지 다섯 번 더 달에 유인 탐사선을 보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나친 예산 투입에 대한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다. 아폴로 프로젝트에 투입된 예산은 258억 달러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대략 2,570억 달러다. 이는 한화 약 308조로 2022년 대한민국 예산의 50%가 넘는다. 여론이 부정적으로 흘러가자 나사는 이후 계획되었던 아폴로 18, 19, 20호의 계획을 취소했다. 소련도 미국의 아폴로 계획에 맞서 달에 사람을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코롤료프의 주도로 달 탐사 로켓 N-1 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1966년 코롤료프가 수술 도중 사망한 후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N-1 로켓은 네 번의 발사에서 모두 폭발했다. 결국 소련은 1970년대 중반 달 탐사 계획을 포기했다. 미국과 소련의 유인 달 탐사가 중단되면서 두 나라의 우주 개발 경쟁의 열기도 식기 시작했다.


대신 미국과 소련은 태양계 탐사로 눈을 돌렸다. 1971년 소련은 마르스 3호를 최초로 화성에 연착륙시켰고, 금성 탐사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미국이 1972년 발사한 파이어니어 10호는 최초로 소행성대를 통과해 목성을 방문했으며, 그 이듬해 발사된 파이어니어 11호는 토성의 고리를 최초로 탐사했다. 1977년 발사한 보이저 1, 2호는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 공간으로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소유스 19호: “제발 엔진의 힘을 조심하게(폭소)”

아폴로 18호: “5m 이내로 접근했다. 3m, 1m, 접촉했다! 붙잡았다! 성공했다. 모든 상태는 훌륭하다.”     

1975년 7월 17일 대서양 상공 220km 부근에서 놀라운 장면이 연출됐다. 미국의 아폴로 18호와 소련의 소유스 19호가 도킹에 성공한 것이다. 우주선의 해치를 열고 두 나라의 우주인들이 우주 공간에서 손을 맞잡았다. 이른바 아폴로-소유스 테스트 프로젝트가 극적으로 성공하는 순간이다. 1960년대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이 조금씩 진정되면서 두 나라는 협력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해체 이후 미국과 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1998년 국제 우주정거장(ISS)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2011년 6월 엔데버호를 마지막으로 우주 왕복선을 퇴역시킨 후 러시아의 소유스호를 통해 국제 우주정거장에 승무원을 보냈다.

아폴로-소유스 도킹 상상도. 왼쪽이 아폴로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은 한때 인류를 제3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을 뻔한 위기를 몇 차례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로켓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마치 17세기 뉴턴과 훅의 치열한 논쟁이 당사자들의 의도와 다르게 인류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것처럼. 그러나 로켓을 통한 우주 탐사는 급격한 발전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류의 활동 영역을 더 넓은 우주로 확장되기 위해서 이 문제들의 해결은 필수적이다. 로켓 기술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 숨어 있는 심각한 위험들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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