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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로켓을 만든 사람들

■ 로켓 공학의 아버지 – 폰 브라운

     

누가 처음 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말은 역사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된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지나간 일에 대해 습관적으로 ‘만약’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오늘 아침에 통학버스를 놓치지만 않았더라도 방과 후에 청소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과 같은 비교적 사소한 것에서부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이 했다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지구의 표면이 달라졌을 것이다.’나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 부부가 암살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와 같은 큰 규모의 가정도 있다(물론 크레오파트라의 코 높이보다 나의 지각이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외에도 역사적 가정에 대한 예를 들자면 이 책의 전부를 모두 채우고도 모자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에 대한 가정을 주제로 한 책은 이미 많이 출판되었다.

로켓의 역사도 예외는 없다. 1926년 로버트 고다드(Robert Goddard)가 최초의 액체 로켓을 발사한 이래 로켓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1년에 100발 이상의 로켓이 발사된다. 고다드가 발사한 로켓은 2.5초 동안 불과 56m를 날았지만, 이제는 100t 이상의 화물을 고도 160km 이상의 지구 저궤도로 한 번에 나를 수 있다. 100t은 질량 100kg인 사람 1,000명이다! 로켓 기술이 이렇게 발전하게 된 이면에도 많은 역사적 가정이 있겠지만, ‘폰 브라운의 어머니가 그에게 천체 망원경을 선물로 주지 않았다면,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Sputnik -1를 쏘아 올릴 수 있었을까?’나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에 폰 브라운이 미국이 아닌 소련으로 갔다면 아폴로 11호는 달에 갈 수 있었을까?’와 같은 가정은 흥미롭고 중요하다.

1960년 48세의 폰 브라운

폰 브라운이 처음부터 로켓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폰 브라운의 어린 시절 꿈은  음악가였다. 아버지 덕분에 10살 때 독일 클래식 음악을 접하게 된 폰 브라운은 기숙학교에서 첼로 교습을 받고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 그리고 ‘제3 현악 4중주곡’으로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독일의 저명한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능숙하게 연주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연주 실력뿐만 작곡에도 재능이 있어 15세 때 이미 자신의 작품을 작곡했다. 이 정도 이력이면 폰 브라운이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폰 브라운이 음악가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로켓에 미친 만큼 음악에도 미쳤다면, 세계적인 음악가로 명성을 떨쳤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인간의 달 착륙이나 화성 탐사선 같은 것은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못했을 수 있다. 다행히 아마추어 천문학자였던 어머니로부터 선물로 받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하면서 폰 브라운의 미래는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수많은 로켓의 제작과 비행을 조율하고, 지휘하는 최고의 로켓 연주자가 되었다.

천문학이나 로켓 공학 분야는 열정만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폰 브라운은 열세 살 되던 해에 베를린 남서쪽에 있는 에테르스부르크(Ettersburg) 성의 기숙학교에 입학했지만, 로켓 공학에 꼭 필요한 수학이나 물리학에 재능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수학은 0점을 맞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선물해준 망원경으로 달과 우주를 관측하며 천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헤르만 오베르트(Hermann Oberth)의 ‘행성으로 가는 로켓(Die Rakete zu den Planetenräumen)’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주여행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16세 때 독일 북부 북해에 있는 스피크루크(Spiekeroog) 섬의 기숙학교로 전학 간 폰 브라운은 로켓에 빠져들면서 자신이 혐오하던 수학과 물리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수학과 물리학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OPEL-RAK 궤도 차량이 질주하는 모습

    이 당시 폰 브라운이 로켓에 얼마나 빠져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독일의 자동차 회사 오펠(Opel)을 창립한 아담 오펠(Adam Opel)의 손자인 프리츠 폰 오펠(Fritz  von Opel)과 막스 발리에르(Max Valier)는 1928년 세계 최초로 대규모 로켓 차량 프로그램인 Opel-RAK을 개발했다. Opel-RAK은 자동차, 궤도 차량, 비행기에 로켓을 장착하여 구동시킨 것인데, 고체 연료로 작동된 로켓 자동차의 속력은 시속 238㎞에 달했으며 궤도 차량의 최고 속도는 시속 290km에 이를 정도였다. 1920년대에 지상에서 이렇게 빠른 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너무 빠른 탓에 세 번째로 개발된 궤도 차량 Opel-RAK3는 궤도를 벗어나 폭발해 버렸다)

Opel-RAK의 주행은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었는데, 로켓 자동차와 비행기의 놀라운 속도와 폭발음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흥분한 관중들 사이에는 폰 브라운도 있었다. 16세의 사춘기 소년 폰 브라운은 마치 요즘 청소년들이 아이돌에 열광하듯이 로켓 자동차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따라 하듯이 직접 로켓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장난감 마차에 폭죽을 붙인 후 베를린 시내로 끌고 가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으로부터 추진력을 받은 마차는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시내를 내달렸다. 마차는 사람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다가 나무를 들이받고 겨우 멈추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폰 브라운은 아버지가 데리러 올 때까지 경찰서에 갇혀 있어야 했다.(아마 연방정부 농업부 장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더 이상의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같으면 포털사이트의 검색 순위에 오르고 그날 밤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되었을 것이다. 뉴스의 제목은 아마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고교생의 장난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시내’, ‘촉법소년 나이 낮춰야!’, ‘청소년 범죄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 우주로 향하는 로켓-헤르만 오베르트

1929년은 폰 브라운의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여전히 고등학생이었던 폰 브라운은 이 해에 로켓 자동차 Opel-RAK를 개발했던 발리에르와 몇몇 과학자가 공동 설립한 우주비행협회(Verein für Raumschiffhrt)에 가입했다. 우주 비행 협회는 세계 최초의 로켓 클럽이었다. 독일 로켓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협회는 한때 회원이 1,000명에 달하기도 했는데, 1928년 최초로 액체 연료를 연소실에서 폭발시키고 동시에 펌프를 이용해 냉각시키는 액체 연료 로켓을 개발했다. 폰 브라운도 이 협회에서 액체 로켓 엔진 개발에 참여하면서 그는 인생의 멘토가 된 ‘거인’을 만나게 된다.

헤르만 오베르트

오베르트는 1894년 루마니아의 시비우(Sibiu)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쥘 베른(Jules     Verne)의 공상 과학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From the Earth to the Moon)’를 읽고 로켓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베르트는 이 책을 거의 외울 정도로 여러 차례 읽었고 14살 때는 학교에서 로켓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쥘 베른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오베르트는 1923년 폰 브라운에게 로켓에 대한 영감을 줬던 ‘행성으로 가는 로켓’을 썼다. 쥘 베른이 쓴 책은 오베르트에게 로켓에 관한 흥미를 느끼게 했고, 오베르트가 쓴 책은 폰 브라운에게 로켓에 관한 영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독서 명언을 떠올리게 한다.

오베르트가 로켓에 관하여 쓴 책들은 많은 사람에게 로켓에 대한 꿈을 가지게 했고 이는 결국 아마추어 로켓 그룹인 우주 비행 협회(Verein für Raumschiffhrt)를 탄생하게 했다. 우주 비행 협회를 설립하고 세계 최초의 로켓 차량 Opel-RAK을 개발했던 막스 발리에르와 프리츠 폰 오펠은 모두 오베르트의 제자였다. 오베르트는 이 협회에 가입한 열성 팬들에게 멘토 역할을 했으며 폰 브라운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29년 오베르트는 액체 연료 로켓 모터의 정적 화재 테스트에 18세의 폰 브라운을 참여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폰 브라운은 본격적인 로켓 과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폰 브라운은 오베르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오베르트는 슬라이드-룰(slide-rule)을 이용하여 우주선의 가능성에 대해 수학적으로 분석된 개념과 디자인을 제시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는 내 인생의 인도자이며 로켓과 우주여행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처음으로 접하게 한 사람입니다. 우주 비행 분야에 대한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야 합니다.”

폰 브라운은 1969년 아폴로 11호 발사와 1985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의 발사 때 독일에 있던 오베르트를 초대했다. 오베르트는 그가 평생 꿈꾸었던 우주로 향하는 인류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후 1989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폰 브라운의 바람대로 달의 뒷면에 있는 지름 60km의 크레이터와 1971년 3월에 발견된 소행성에 ‘오베르트’라는 이름을 붙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현대 로켓의 아버지 – 로버트 고다드

폰 브라운에게 로켓에 대한 영감을 준 또 한 명의 거인은 현대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고다드다. 고다드는 1926년 3월 16일 매사추세츠주 오번(Auburn)에서 세계 최초로 액체 추진제를 사용한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이는 라이트 형제가 1903년 12월 7일 최초의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 1호를 12초 동안 하늘로 날린 것에 버금가는 사건이다. 고다드가 처음 쏘아 올린 로켓은 불과 2.5초를 날아 고도 12.5m에 도달하는 데 그쳤지만, 이후 계속된 기술 개발을 통해 고도가 2,590m에 이르렀다.

로버트 고다드

    고다드는 로켓의 자세 제어를 위해 자이로스코프(gyroscope)를 로켓에 다는 기술과 터보 펌프를 이용해 추진제를 엔진에 공급하는 방식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기술들이 국가의 도움 없이 고다드 개인의 역량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고다드의 로켓 기술에 큰 관심이 없었고, 로켓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더욱이 언론은 고다드의 연구에 대해 조롱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1920년 1월 12일, 고다드는 스미소니언 재단(Smithsonian Institution)의 지원으로 ‘극단적인 고도에 도달하는 방법(A Method of Reaching Extreme Altitudes)’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대기권을 벗어나 진공에서 로켓이 비행할 가능성에 대해 뉴턴의 운동 제3 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를 이용해 설명했다. 다음날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진공에서 로켓이 비행할 수 있다는 설명은 역학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며 고다드가 고등학교 교육도 받지 않은 것 같다고 비난했다. 1929년 고다드의 로켓 실험이 시행된 후 우스터 지역 신문은 ‘달을 향해 쏜 로켓은 목표물에서 238,799와     마일(약 384,228km로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 벗어났다.’라는 제목을 1면에 달았다. 고다드가 발사한 로켓이 불과 수십m를 비행하는     데 그친 것을 조롱한 것이다. 고다드는 결국 이런 부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사장소를 매사추세츠에서 뉴멕시코주 로즈웰(Roswell)로 옮겨야 했다.고다드가 미국에서는 찬밥 대우를 받았지만, 당시 미국의 적국이었던 독일 과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고다드의 기술들을 눈여겨보았고 그가 개발한 터보 펌프와 자이로스코프 기술을 V2 로켓에 그대로 적용하였다. 1945년 봄에 고다드는 자신이 일하고 있던 메릴랜드의 해군 연구소에 노획된 V2 로켓을 검사하고 나서 “독일 사람들이 내 기술을 훔쳤다.”라고 했다. 물론 V2 로켓은 고다드의 로켓보다 훨씬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원천은 고다드의 것이었다. 1963년 폰 브라운은 로켓의 역사에 대해 회고하면서 로버트 고다드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고다드의 액체 연료 실험은 우리에게 수년간의 작업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했고, V2 로켓의 개발을 몇 년 앞당길 수 있게 했다.”

고다드가 개발한 최초의 엑체 로켓

고다드는 1945년 평소 앓고 있던 폐결핵이 인후암 악화하면서 6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 묻혔다. 그가 최초의 액체 로켓을 발사했던 장소는 국립 사적지(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 1959년 메릴랜드주 그린벨트(Greenbelt)에 설립된 나사의 외계 우주 탐사 위성 관제 센터의 이름은 ‘고다드 우주 비행 센터’로 지어졌으며 달의 분화구 하나에도 고다드의 이름이 붙여졌다. 고다드는 평생 214개의     특허를 얻었는데, 죽은 후에 인정된 것이 131개이다. 

1969년 7월 17일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다음 날, 뉴욕 타임스는 ‘정정(A Correction)’이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를 실었다. 세 단락으로 된 이 기사는 1920년 뉴욕 타임스가 고다드의 보고서를 비난했던 사설을 요약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추가 조사와 실험을 통해 17세기 아이작 뉴턴의 발견이 확인되었으며 이제 로켓이 대기뿐만 아니라 진공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히 확립되었습니다. 타임스는 오류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뉴욕 타임스가 고다드를 조롱한 지 49년이 지난 후이며 고다드가 사망한 지 23년이 지난 후였다.


    ■ V2로켓의 개발-발터 도른베르거

발터 도른베르거

오베르트와 고다드가 폰 브라운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지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람은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 소장인 발터 도른베르거(Walter Dornberger)다. 우주 비행 협회에서 불과 스물한 살이었던 폰 브라운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이 대학을 졸업하자 나치 독일 로켓 연구소에 그를 취직시킨다. 폰 브라운과 도른베르거는 나치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V2 로켓을 개발하고 이는 연합국을 향해 날아갔다. 폰 브라운의 꿈은 여전히 우주에 있었지만, 실상은 수천 명을 살상한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V2 로켓이 우주가 아니라 런던과 앤트워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본 폰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V2 로켓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잘못된 장소에 떨어진 것을 제외한다면.”

비록 폰 브라운이 나치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명 살상용 무기를 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나치 친위대에 가입한 나치당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가 전후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큰 발자국을 남겼지만, 여전히 ‘나치 협력자’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다.

2021년 한 해 동안 지상에서 우주로 발사된 로켓은 135발이다. 2~3일에 한 번씩 무엇인가가 지구를 탈출한 셈이다. 여기에 로켓과 원리가 거의 같지만 무기로 사용되는 토마호크나 ICBM과 같은 미사일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로켓이나 미사일은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다. 바로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 V2 로켓이다.

독일 피네뮌데 박물관에 전시된 V2 로켓

V2 로켓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승전국(프랑스, 영국 등)과 맺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차와 전투기 보유에 제한을 받자 과학 분야에서 연구되던 로켓을 무기로 개발한 것이다. V2라는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어 Vergeltung에서 첫 글자를 따왔는데, Vergeltung은 ‘보복’이라는 뜻이다. 게르만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비뚤어진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히틀러에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는 용납할 수 없는 역사였고, 반드시 보복해야만 했다.

V2 로켓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런던

    V2 로켓은 1944년 9월 실전 배치되어 파리를 향해 두 발을 발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향해 3,000발 이상이 발사됐다. 유럽 국가 중 V2 로켓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벨기에와 영국이다. 독일군은 1944년 10월부터 그 이듬해 3월까지 벨기에 앤트워프에 1,610발, 런던에 1,358발의 V2 로켓을 쐈다. 이로 인해 앤트워프에서 1,736명, 런던에서 2,754명이 사망했다. 단순히 계산한다면 V2 로켓 1발당 대략 1.5명 정도가 사망한 셈이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단 3일 동안 네 번의 공습으로 독일 드레스덴에서 22,000명 이상을 숨지게 한 것에 비하면 V2 로켓의 위력이 높지 않다. 이는 전쟁이 독일에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부품의 수급과 품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불량품이 많이 발생    한 탓이다. 게다가 V2 로켓의 핵심 기술이었던 유도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명중률은 더욱 낮아졌다. 만약 V2 로켓의 개발이 1년 정도 일찍 시작되었다면 세계 지도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사실 V2 로켓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런던보다 독일 페네뮌데(Peenemünde)의 로켓 공장이다. 독일이 점령지인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에서 끌고 온 무고한 시민과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유대인 등 2만 명 이상이 열악한 환경에서 V2 로켓을 만들다가 숨졌다. 당시 페네뮌데 공장의 로켓 제작 책임자는 폰 브라운이었고 이 문제는 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폰 브라운의 발목을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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