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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will touch the future, I teach.” - 73초 만에 사라진 꿈

     

예정된 발사일인 1월 22일로부터 벌써 5일이 지났다.

오늘은 발사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지만, 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지상 장치와 연결된 해치(hatch) 손잡이가 분리되지 않아 손잡이를 제거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에 풍속이 발사 한계치를 넘어 버린 것이다. 결국 다시 하루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발사된 컬럼비아호가 착륙 예정일인 1월 16일보다 이틀이나 늦은 1월 18일에 도착하는 바람에 챌린저호의 발사는 이미 두 차례나 연기되었다. 그리고 비상착륙 장소인 세네갈 다카르의 기상악화와 새로 지정된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야간 착륙 불가 문제로 발사가 다시 미루어졌다. 이대로 발사가 계속 늦어진다면 이후 예정된 우주 왕복선 운용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챌린저호 승무원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매컬리프이고 앞줄 가운데가 사령관 스코비다.

    발사가 취소되면서 발사 장면을 직접 보기 위해 케네디 우주센터에 모였던 많은 사람과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사람들의 실망도 컸다. 그러나 가장 허탈한 사람들은 승무원들이었다. 크리스타 매컬리프(Christa McAuliffe)와 여섯 명의 승무원은 챌린저호의 좁고 불편한 의자에 누운 채로 몇 시간 동안 묶여 있다가 해치를 열고 나와 승무원 숙소로 돌아갔다. 여러 번 반복된 일이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1981년 첫 번째 우주 왕복선이 발사된 후 앞선 24번의 발사과정에서 계획대로 발사된 것은 불과 아홉 번 뿐이었다. 짧게는 2분 18초 만에 발사가 재개되었지만, 길게는 74일 동안 발사가 미루어진 때도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문제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주 왕복선 발사는 여름휴가를 가기 위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여러 번의 발사 연기에도 불구하고 챌린저호에 관한 관심은 여느 때보다 높았다. 미션명 STS-51L로 명명된 챌린저호의 주요 임무는 나사의 전용 통신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리고 76년 만에 다시 지구를 찾아온 핼리혜성을 관측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최초의 민간인 우주 비행사 매컬리프가 진행할 우주 수업이었다.

우주 수업은 재선에 성공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선거 공약 중 하나인 ‘우주 교사 프로젝트(Teacher in Space Project)’에 의해 추진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젝트에 지원한 교사는 무려 11,000여 명이나 되었다. 나사가 추진한 이 프로젝트의 표면적인 목표는 우주 왕복선에 관한 관심과 우주 비행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막대한 돈이 드는 우주 탐사에 대한 지원을 끌어내려는 또 다른 목적이 숨어 있었다(우주 왕복선 발사 초기에 나사가 예측한 우주 왕복선 발사 비용은 한화 100억 원 정도였지만 2011년 실제 계산된 발사 비용은 5,000억 원이 넘었다!).

    1985년 7월 19일. 11,000여 명의 신청자 중 최종 결선에 진출한 10명이 백악관에 초청됐다. 조지 부시 부통령은 이들 중 뉴햄프셔주 콩코드 고등학교의 사회 교사인 크리스타 매컬리프가 우주 수업 교사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과학 교사가 아닌 사회 교사가 선발된 것은 다소 의외였다. 이후 매컬리프는 400시간의 다양한 우주 적응 훈련을 거친 끝에 최초의 민간인 우주 비행사가 될 준비를 마쳤다.

조지 부시 부통령이 우주 교사 프로그램에 선정된 매컬리프에게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1986년 1월 28일 화요일.

매컬리프와 6명의 승무원은 다시 챌린저호의 좁고 불편한 의자에 몸을 묶었다. 매컬리프는 “너무 기대됩니다. 넷째 날에 실시할 우주 수업을 꼭 지켜봐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챌린저호에 몸을 실었다.

나사 관계자는 오전 9시 38분에 챌린저호를 발사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이마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미국 최남단에 있는 플로리다의 평년 1월 온도는 영상 20도 내외였으나 1986년 겨울에 몰아친 한파로 온도가 영하 1.1℃까지 떨어져 있었다(케네디 우주센터의 1월 28일 기온은 1년 중 가장 낮았다). 나사 관계자는 온도가 낮더라도 시야가 확보된다면 발사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챌린저호가 발사되기 1년 전인 1985년 1월 23일에도 추운 날씨로 디스커버리호의 발사가 하루 연기되었지만, 이번에는 최초 계획에서 다섯 번이나 발사가 연기됐기 때문에 나사는 큰 문제가 없는 한 발사를 강행하려고 했다.

미국 플로리다 케네디 우주센터에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다른 우주 왕복선의 발사 때보다 두 배나 많은 850여 명의 기자가 모였고, 약 2,500만 명의 학생들이 텔레비전으로 발사 장면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주센터의 관람석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발사 장면을 직접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거기에는 매컬리프의 부모님과 남편 스티븐, 아홉 살인 아들 스콧과 다섯 살인 딸 캐롤라인도 있었다. 매컬리프의 아들 스콧은 10여 명의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우주로 떠나는 엄마를 지켜보기 위해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자, 가자!(There they go guys!)

챌린저호 발사대에 매달린 고드름

9시 38분 발사 예정이었지만 다시 2시간이 연기되었다. 발사 타워 파이프의 물이 얼지     않도록 밤새 수돗물을 흘렸는데, 영하 13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로 발사대가 고드름으로 뒤덮였다. 고드름의 길이는 30cm에서 60cm에 이르렀다. 고드름이 녹아 우주 왕복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미 떨어진 고드름이 우주 왕복선 표면이나 엔진에 충격을 줬을 수 있으므로 우주 왕복선의 손상 여부를 점검하고 고드름을 제거해야 했다. 매컬리프와 승무원들은 꼼짝없이 좌석에 묶인 채로 하늘을 향해 누워있어야 했다. 그리고 챌린저호도 혹한의 날씨 속에 발사대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날은 우주 왕복선 발사일 중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되었다. 다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오전 11시 37분 53초. 드디어 스페이스 셔틀의 주 엔진에 점화 명령이 내려졌다. 챌린저호 사령관 딕 스코비(Dick Scobee)가 “자, 가자!(There they go guys!)”라고 외치자 미션 스페셜리스트 주디스 레스닉(Judith Resnik)이 “좋아요!(All right!)”라고 응답했다. 오전 11시 38분. 드디어 최초의 민간인 우주 비행사를 태운 챌린저호가 굉음과 눈부신 불꽃을 내뿜으며 케이프 커내버럴(Cape Canaveral)의 39-B 발사대를 차고 올랐다. 우주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는 크리스타 매컬리프의 오랜 꿈도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추위에 온몸을 떨며 이를 지켜보던 관중들과 TV를 보며 숨죽이던 시청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챌린저호는 발사 후 40초 만에 음속을 돌파하며 지상 5,800m 지점을 지나 순조롭게 우주를 향해 날아갔다. 이때까지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관람석의 사람들이나 챌린저호의 승무원들은 물론 지상 통제 센터의 요원들조차도 챌린저호의 성공적인 발사를 의심하지 않았다. 챌린저호의 고도는 이미 10,000m를 넘었고 속도는 음속의 1.5배를 넘었다. 지상 통제 센터는 발사 후 68초가 되자 챌린저호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도록 지시했다.


리처드 코비 : “챌린저호, 출력 최대로(Challenger, go at throttle up)”

딕 스코비 : “알겠다. 출력 최대로!(Roger, go at throttle up)”


그러나 이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지상 통제 센터의 CAPCOM 리처드 코비와 챌린저호 사령관 딕 스코비와의 대화가 끝난 지 불과 3초 만이었다. 조종사 마이크 스미스(Mike Smith)의 “어~오...(Uh-oh...)”라는 짧은 탄식과 함께 챌린저호는 14,600m 상공에서 갑자기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며 폭발하고 말았다. 발사장에서 수 km 떨어진 관람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챌린저호는 지상으로부터 15km 가까이 되는 곳에서 폭발했기 때문에 이것이 정상적인 발사과정 중의 하나인지 사고인지 바로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으로 발사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에게는 방송국 카메라의 망원렌즈에 의해 폭발 장면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시청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곳은 지상 통제 센터였다. 그동안 우주 탐사 과정에서 여러 번의 사고가 있었지만 한꺼번에 우주 비행사 7명을 잃어버리는 대참사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폭발 직전까지 어떤 문제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다.

고도 14km에서 폭발한 챌린저호
충격에 빠진 매컬리프의 가족들

챌린저호는 산산이 부서진 채 대서양으로 하나둘씩 떨어졌다. 우주를 향해 치솟던 불과 수초 전의 맹렬한 기세와는 달리 긴 연기 꼬리를 달고 소리 없이 바다로 천천히 추락했다. 7명의 승무원도 챌린저호와 운명을 함께했다. 승무원 중 최소 3명은 폭발 후 바다에 추락하기 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챌린저호의 폭발과 함께 매컬리프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우주 수업도 대서양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챌린저호의 비극적인 사고로 우주 왕복선 프로그램은 2년 8개월 동안 중단됐다. 그리고 1988년 9월 29일 챌린저호가 발사되었던 케네디 우주센터의 39-B 발사대에서 디스커버리호(Discovery:회복)가 우주로 출발하면서 프로그램은 다시 시작됐다. 큰 상처를 입은 우주 탐사의 꿈을 회복하는 순간이었지만, 14년 후인 2003년 2월 1일에 지구로 귀환하던 컬럼비아호가 텍사스 상공에서 폭발하면서 7명의 승무원이 다시 희생됐다. 공교롭게도 발사와 귀환의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해 로켓을 이용한 우주 탐사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인스피레이션 4호에 탑승한 민간인 우주인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업 우주 관광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21년 7월에 민간 우주 기업 블루 오리진(Blue Origin) 우주 캡슐을 탄 민간인이 최초의 우주여행에 성공했고, 2021년 9월에는 전문 우주 비행사의 탑승 없이 순수 민간인 4명 만을 태운 스페이스 X의 인스피레이션 4호(Inspiration 4)가 고도 585km까지 올라간 후 지구로 돌아왔다(평균 고도 400km의 국제 우주정거장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로켓을 이용하여 너무 빠른 속도로 우주로 나가고 돌아오는 방식은 챌린저호나 컬럼비아호가 직면했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느리지만, 좀 더 안전하게 우주로 갈 수는 없을까?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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