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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켓의 역사

V2 로켓은 완벽하게 작동했다잘못된 장소에 떨어진 것을 제외한다면.-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악귀를 좆기 위해 시작한 불장난이 불꽃 튀는 전쟁으로 발전하고 또 불을 내뿜으며 솟아오르는 우주 개발로 이어졌다. 어쩌면 초기 인류가 처음으로 불을 이용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로켓의 발명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주에 대한 인류의 끊임없는 궁금증에 로켓은 시뻘건 화염으로 불을 지펴주었다.  

로켓의 발명은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리고 인류가 로켓으로부터 얻은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로켓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복원한 조선시대 로켓 신기전



1.1 로켓의 발명


  ■ 로켓의 시초

     

2006년 1월 29일 중국 허난성 한 마을에서는 폭죽 창고가 폭발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6명이 사망했다. 이날은 음력 1월 1일로 중국의 춘제(春節) 기간이었다. 2016년 1월에는 장시성의 폭죽 공장이 폭발해 1천 명 이상이 대피하기도 했으며 2019년 춘제 때는 중국 남부 룽안현(隆安县)의 불법 폭죽 판매점이 폭발해 주택 4채가 불타고 5명이 숨졌다. 2021년 1월에는 닝샤 자치구에서 부서진 맨홀 뚜껑 사이로 폭죽을 던진 11세 소년이 맨홀 아래 가득 차 있던 가스가 폭발하면서 사망하기도 했다. 중국은 매년 춘제 기간에 크고 작은 폭죽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인명이나 재산 피해뿐만 아니라 폭죽으로 인한 소음과 대기오염도 심각한 수준이다. 2017년 춘제 기간 중 중국 내 62개 도시의 초미세먼지 수치는 500㎍/㎥를 넘었다(초미세먼지 76㎍/㎥ 이상이면 ‘매우 나쁨’이다). 이 정도면 대기상태가 공기 반 먼지 반인 수준이다. 폭죽에 의한 대기오염은 중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9년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에 따르면 중국의 춘제 이후 경기도의 대기 중 중금속 농도가 13배 증가했다. 바람을 타고 바다 건너 우리나라까지 폭죽이 날아온 것이다.

급기야 중국 당국은 춘제 기간에 폭죽의 사용을 금지했다. 499개 도시에서는 폭죽을 터트릴 수 없게 했고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폭죽을 사도록 하는 구매 실명제를 시행했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명절에는 폭죽으로 큰 불꽃과 소리를 내야 하는데, 폭죽 사용을 막으면 명절 같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대기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는데도 중국인들은 왜 설에 폭죽을 쏘려고 하는 것일까?

니엔을 쫓는 중국의 사자춤

중국에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무서운 괴물 ‘니엔(nián)’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    다. 얼굴은 사자처럼 납작하고 몸은 개와 비슷한 니엔은 1년 내내 잠을 자다가 섣달그믐날(음력 12월 마지막 날) 깨어나서 1년 동안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온다. 니엔은 잡식성 괴물이라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든 잡아먹었다. 사람들은 니엔을 피해 매년 섣달그믐이 되면 산속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섣달그믐날 모두가 떠난 마을에 홀로 남아 괴물을 맞이한다. 먹을 것을 찾던 니엔은 이윽고 노인의 집 앞에 다다른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괴물이 노인을 잡아먹었다면 전설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문 앞에 붉은색 종이를 붙여 놓고 니엔이 나타나자 대나무에 불을 붙였다. 대나무가 탈 때 나는 ‘탁탁’ 소리에 놀란 니엔은 그 길로 도망을 갔다. 산속으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은 노인이 니엔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섣달그믐에 모닥불을 피우고 대나무를 태워 니엔을 물리쳤는데, 괴물 니엔은 다름 아닌 해를 뜻하는 ‘년(年)’이다. 중국 사람들도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괴물에 잡아먹히는 것만큼 두려웠던 모양이다. 중국인들이 춘제에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해마다 찾아오는 괴물 니엔(年)과 같은 악령들을 물리치기 위해 대나무를 태웠던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춘제에 대나무가 아닌 화약을 폭발시키지만 이름은 여전히 폭죽(爆竹)이다.

사실 춘제에 괴물 니엔을 물리치기 위해 폭죽을 사용했다는 전설은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초에 등장했다. 이 전설은 춘추전국시대(B.C.770~B.C.221)의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난폭한 원숭이를 쫓아내는 방법에서 유래된 듯하다. 산도깨비라 불리는 이 원숭이는 배가 고프면 민가로 내려와 곡식을 약탈하고 사람도 해쳤을 것이다. 요즘도 공포탄을 쏘거나 큰 고주파 음을 내 농작물을 훼손하는 멧돼지나 새를 쫓아내듯이 옛날 사람들도 난폭한 원숭이를 쫓기 위해 큰 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원숭이를 쫓기 위해 처음에는 대나무를 태워서 소리를 냈지만 아마 내성이 생긴 원숭이가 더는 겁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대나무 안에 초석(질산칼륨 결정)과 유황, 숯(이 세 가지는 화약의 기본 재료이다)을 넣고 밀봉한 후 불 속에 던졌다. 폭발 소리는 훨씬 더 커졌고 원숭이를 물리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밀봉이 완전히 되지 않은 몇 개의 대나무가 폭발해서 터지는 대신 초석과 유황, 숯의 연소로 인한 반작용으로 모닥불 밖으로 튀어 나갔을 것이다. 이것이 고체 연료 로켓의 시초로 추정된다.


■ 무기로 발전한 로켓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사용했던 폭죽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을 물리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7세기 무렵 발명된 화약 제조기술은 점차 발전하여 송나라 때인 1040년에는 허난성 부근에 화약 공장이 세워질 정도로 발전했다. 이와 더불어 화약을 이용한 무기 제조기술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유럽에서는 전쟁에서 여전히 활, 창, 도끼, 돌과 같은 무기들을 사용하던 시기였다.

화룡경에 나오는 화전

12세기에는 로켓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나는 불 창’인 비화창(飛火槍)이 개발됐다. 비화창은 불화살인 화전(火箭)의 일종이다. 화약이 발명되기 전에는 단순히 불을 붙인 화살을 화전이라고 했지만, 화약이 발명된 후에는 화약을 넣은 약통(대나무나 종이로 만든 통)을 화살에 매단 후 약통에 불을 붙여 쏘는 것도 화전이라고 했다. 화약이 연소하면서 만드는 추력을 이용해 화살을 더 멀리 보내는 방식으로 액체나 고체 연료를 태워 추력을 얻는 현대 로켓과 같은 원리다. ‘화전’이란 단어는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쓰이는데, ‘로켓(rocket)’을 중국어로 바꾸면 ‘火箭’이다. 예를 들면 ‘창정 로켓’은 중국어로 ‘長征 火箭’이다.

일종의 미사일인 비화창은 1232년 금나라가 몽골군과 맞서 싸울 때 사용됐다. 금나라는 길이 2.4m의 비화창(飛火槍)과 진천뢰(일종의 수류탄)를 사용해 몽골군을 막아냈다. 이때 몽골군은 큰 석궁의 일종인 노포를 사용했다. 그러나 비화창이 현대의 미사일처럼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강한 기마병을 앞세운 몽골군에 금나라는 결국 멸망한다. 금나라를 제압한 몽골군은 카이펑 등지에서 화약 무기들을 노획하고 화약 기술자들을 몽골로 끌고 갔다.

1259년 몽골제국이 정복한 영토. 고려는 공물을 바치는 나라로 분류됐다.

몽골이 지금의 중국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만족했다면 세계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은 중국 내에만 머물지 않았고 강력한 기마병을 앞세워 사방으로 정복 활동에 나섰다. 13세기 몽골군이 침공한 지역은 생각보다 넓다. 고려와 일본,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동과 같은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은 물론이고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빈까지 몽골군 기병의 말발굽이 들이닥쳤다. 사방으로 세력을 넓힌 몽골제국은 결국 역사상 가장 큰 단일제국으로 기록됐다(대영제국의 면적이 가장 컸지만 하나로 연결된 영토는 몽골제국이 가장 크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인식했던 세계관으로 볼 때 몽골제국은 세계를 정복한 셈이다. 몽골군이 유럽을 휩쓸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화약과 흑사병이다. 둘 다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폴란드 역사가 얀 들루고스(Jan Długosz)는 1241년 몽골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레그니차(Legnicą)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몽골군이 강력한 총을 사용했다고 ‘폴란드 역사’라는 책에 기록했다. 그리고 전쟁터 근처 수도원에 숨어서 전쟁을 지켜보던 가이슬러(Geisler)도 몽골군이 용 머리가 그려진 둥근 나무통에서 로켓 다발을 쏘는 모습을 봤다. 이후로 폴란드 사람들은 로켓을 '중국의 불을 뿜는 용'이라고 불렀다. 금나라의 화약 무기 기술이 몽골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군은 슬로바키아를 공격할 때도 화전을 사용해 사원을 불태웠으며 1258년에는 화전과 진천뢰를 사용해 바그다드 성을 공격했다. 화전이 몽골군의 주력 무기는 아니었지만, 활이나 창을 들고 몽골군을 맞이했던 유럽의 병사들 머리 위로 길이 2m의 비화창이 날아다녔다면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바그다드는 13일 만에 함락되었으며 몽골군은 수많은 주민을 학살하고 모스크, 도서관, 병원을 파괴하는 등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특히 역사, 의학, 천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귀중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어 지혜의 집이라 불리던 바그다드 대도서관이 파괴되면서 이슬람 황금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됐다.

몽골군의 침략으로 아랍 지역은 큰 피해를 본 대신 화약과 로켓 기술을 얻었다. 1280년 핫산 알라마가 지은 군사 서적에 어뢰형 로켓 모형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아랍은 이때 이미 로켓 기술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로켓 기술은 곧 유럽으로 전파되어 1379년 베네치아-제노바 전쟁(Venetian–Genoese wars)과 1429년 백년전쟁의 막바지인 오를레앙 공방전에서도 사용됐다.


■ 다단계 로켓의 발명

16세기 중반 불꽃놀이에 관한 책을 출판할 정도로 불꽃놀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독일    의 요한 슈미틀랩(Johann Schmidlap)은 불꽃이 더 높은 곳에서 터지게 하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다단계 로켓을 발명했다. 2단이나 3단으로 설계된 슈미틀랩의 로켓은 1단계의 로켓이 다 타버리면 작은 로켓이 순서대로 연소하면서 더 높은 고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슈미틀랩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우주로 나가는 모든 로켓에 기본적으로 쓰인다. 이처럼 유럽으로 전파된 로켓과 화약 기술은 전쟁에서 주력 무기로 쓰이기보다는 불꽃놀이 같은 오락용으로 더 많이 쓰였다.

슈미틀랩의 다단계 로켓

로켓이 주력 무기가 되지 못한 이유는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에서 로켓의 역할은 질보다 양이었다. 로켓보다는 화포가 더 효율적일 수 있었지만, 화포 역시 긴 장전 시간과 낮은 명중률 때문에 공성전에는 여전히 투석기나 화살과 같은 재래식 무기가 쓰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서 사용한 우르반(Urban) 대포는 270kg짜리 돌을 1.6km나 날려 보낼 수 있었지만 한번 발사 후 다시 장전하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종일 발사해도 여덟 번을 쏘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거기다가 요즘처럼 박격포 계산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목표물을 공격할 수 없었다. 물론 운이 좋아 적의 성벽을 정확히 맞춘다면 그 위력을 상당히 컸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69문의 화포를 운용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3중 성벽을 뚫었고 공성전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불행히도 멸망하고 동시에 로마제국 2,2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18세기가 지나면서 비로소 유럽의 군사 전문가들은 로켓 무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    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뜻밖에도 인도다. 18세기 들어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속셈을 가지고 네 차례 인도와 전쟁을 치르는데, 이때 인도는 마이소르 로켓(Mysorean rocket)을 사용해 영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마이소르 로켓은 길이 20cm의 약통을 길이 1m의 대나무에 부착한 것인데, 대나무의 앞쪽에 칼날을 달아 살상력을 높였다. 마이소르 로켓이 유럽의 로켓과 다른 점은 철제 약통을 쓴 것이다. 유럽식 로켓은 종이 약통을 사용해 화약을 많이 넣으면 큰 압력을 견딜 수 없어서 멀리 가지 못했다. 철제 약통을 사용한 마이소르 로켓은 약 500g의 화약으로 900m를 날아갔다.

인도 병사가 마이소르 로켓에 불을 붙이는 모습. 인도를 여행한 영국의 화가 로버트 홈이 그린 그림

마이소르 로켓으로 인도는 1792년과 1799년에 벌어진 마이소르 전투에서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몽골에 진 금나라처럼 결국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비록 인도가 패하긴 했지만, 마이소르 로켓은 군사용으로 실전 배치된 세계 최초의 철제 로켓으로 기록되었다.

로켓의 뜨거운 맛을 본 영국은 전쟁이 끝난 후 인도에서 600개의 발사대와 1,600개의 로켓을 노획해 영국으로 가져갔다. 군인이자 발명가인 윌리엄 콩그리브(William Congreve)는 마이소르 로켓을 개량해 사거리를 2.7km로 늘인 일명 콩그리브 로켓(Congreve rocket)을 개발했다. 콩그리브 로켓은 앞부분에 기름과 천을 넣어 목표물에 화재를 일으키거나 화약과     파편을 넣어 폭발할 때 살상력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됐다. 콩그리브 로켓은 주로 해상의 배 위에서 발사하는 형태로 설계됐는데, 1806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실전 배치됐다. 1807년 덴마크와의 전투에서는 코펜하겐에 무려 25,000발의 로켓을 퍼부어 많은 집과 창고를 불태웠다.    콩그리브 로켓의 화력에 자신감을 얻은 영국은 1813년 4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무려 22시간 동안 미국 델라웨어주 루이스(Lewes)에 로켓 포격을 가했다. 신무기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는 순간이었다. 상륙했다. 그러나 콩크리브 로켓은 마이소르 로켓에 비해 사거리나 폭발력이 향상됐지만, 명중률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정확성보다는 양에 의존하고 있었다.

콩그리브가 쓴 책에 나오는 배에서 발사되는 콩그리브 로켓

로켓의 낮은 명중률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영국의 윌리엄 헤일(William Hale)이다. 헤일은 1844년 로켓이 회전하면서 날아가도록 설계해 비행 안정성을 높인 기술로 특허를 받았다. 헤일이 고안한 로켓이 처음 사용된 곳은 1846년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벌어진 텍사스 쟁탈 전쟁이었다. 미국은 50개의 로켓과 150여 명의 병사로 구성된 포병대대를 투입해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전쟁에 패배한 멕시코는 텍사스를 미국에 내줘야만 했다. 멕시코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포병대대는 해산되고 로켓들은 창고로 보내졌다.

로켓이 다시 소환된 것은 1861년 남북 전쟁 때지만 아직은 대포의 화력을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1866년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로켓 여단은 후방 장전식 대포와 폭발하는 탄두를 사용하는 프로이센군을 만나 7주 만에 패하고 만다. 이전까지 대포는 전장식으로 포탄이 발사되는 앞쪽 구멍으로 화약을 장전하는 방식이었다. 후방에서 장전하는 대포는 이전 대포보다 발사 주기가 훨씬 짧았기 때문에 로켓보다 훨씬 큰 효과를 발휘했다. 로켓은 다시 설 자리를 잃었고 20세기가 될 때까지 전쟁터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헤일 로켓

그리고 로켓을 무기로만 연구하던 시대에 로켓으로 인류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폰 브라운(Von Braun)은 20세기 로켓 기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과학자였다. 폰 브라운은 그야말로 로켓에 미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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