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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25. 2022

경쟁 프레젠테이션 PART 2.

광고인이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일까. 개인적으로는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난 뒤부터, 결과 발표가 나기 직전까지다. 이 시간은 그야말로 비무장지대이다. 출퇴근은 정상적으로 하지만, 내가 뭘하든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 근무태만의 라이선스를 받은 느낌이라고 해야 될까.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자유분방한 공기로 채운다. 그러다가 결과 발표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깨달으면 약간의 설렘과 긴장감이 감돈다. 로또결과를 기다리는 기분과 비슷하다.


솔직히 난 이 시간이 경쟁 프레젠테이션 승리보다 더 좋다. 보통 클라이언트로부터 승리 콜을 받게 되면 그 다음날 바로 클라이언트 사무실에서 미팅을 한다. 상견례, 요즘 이슈들에 대한 여담 등을 더하지만 메인 요리는 우리가 제안한 프레젠테이션 내용에 대한 리뷰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에너지 파동에 변화를 일으켜 내 몸을 다시 일에 맞춰야 한다. 괴로움의 시작이다. 그러다 보니 결과발표 전까지가 가장 좋은 것이다. 결과발표 때 패배 콜을 받은 회사는 눈물을 머금고 다른 클라이언트 건들을 물색해야 한다. 승리한 회사는 몸이 고달프고, 패배한 회사는 마음이 고달프다.


형식적인 웃음만 가득했던 미팅의 하이라이트. 경쟁 프레젠테이션 제안내용 리뷰. 좋은 부분에 대한 짧은 코멘트 이후 부족한 부분과 관련된 긴 논쟁. 소수의 경우에 한해서만 기존 제안 그대로 광고가 된다. 대부분은 대폭 수정을 거쳐 클라이언트 보고를 한 번 더 해야 한다. 리뷰를 마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제안내용 거의 절반이 날아갔다. 그런데 우리가 왜 선택이 됐지. 그러다 클라이언트의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묘하다. “저희가 준 과제 안에서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많은 고민” 보다는 “과제 안”에서다. 모든 광고회사가 오리엔테이션에서 똑같은 과제를 받았다. 하지만 오리엔테이션에서 밝혀지지 않은, 내부 사정에 기인한 이면의 맥락이 있다. 예를 들면, 모든 feature가 다 중요하다고 했지만 유독 한 feature를 결정권자가 중시한다. 그 곳을 잘 긁어준 광고회사가 승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 만큼 운도 잘 따라줘야 하는 싸움이다. 그 운은 질문에서 얻게되는 경우도 많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면 Q&A 시간이 있는데, 그 때는 모든 광고회사가 입을 다문다. 혹여 승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얘기를 다른 대행사와 공유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준비기간 중에는 정말 질문을 많이 하는 광고회사가 있는 반면, 소신대로 묵묵히 나아가는 광고회사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질문을 많이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오리엔테이션 때 밝히지 못한 비밀스러운 얘기나, 오리엔테이션 후 클라이언트 내부에 생긴 변화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이다.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광고회사 만의 세계에 빠져서 작업한다고 좋을 게 없다.


경쟁 프레젠테이션과 관련해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다른 요소를 제외하고, 순전히 아이디어를 기준으로 광고회사가 선정됐으면 좋겠다. 다른 요소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광고회사가 제 살 깎아먹기 방식으로 승리한다면 우리의 가치는 떨어진다. 잘못된 관행이 정착된다. 뛰어난 아이디어를 지닌 작은 업체들의 발디딜 곳이 점점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클라이언트가 광고 퀄리티를 컨트롤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많은 부수의 출력물 요청은 더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수백페이지 기획서 10부 제본을 요청받으면 주니어들은 이걸로 인해 밤을 새야 한다. 출력과 제본 모두 인쇄업체에 맡기면 너무 비싸다. 그렇기 때문에 출력은 광고회사에서 한다. 새벽 2시에 완성된 기획서를 받는다. 출력을 걸면 수천장의 종이들이 다 나오고 검토까지 완료하는데 2시간이 걸린다. 그걸 들고 인쇄업체에 가서 제본을 맡긴다. 운 좋으면 제본이 바로 가능하지만, 다른 건이 잡혀 있으면 많이 기다려야 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리다 마침내 제본이 든 쇼핑백을 챙겨 나온다. 아침이 오고 있다. 현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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