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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y 06. 2022

파워포인트의 추억

파워포인트는 공포다. 모니터에 떠 있는 여백의 흰 종이가 그 자체로 무섭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가슴이 먹먹하다. 처음 선택하는 방법은 무조건 빽빽하게 채우는 것이다. 색상, 레이아웃, 이미지 등 모든 것들을 동원해 여백의 미를 제거한다. 나의 약점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이런 노력의 결과로 나온 게 팥죽색 파워포인트였다. 나의 첫 작품. 모든 색과 모든 요소들이 다 있는데 따로국밥처럼 놀았다. 당시 사수는 지금도 그 팥죽색 문서를 기억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그 때는 몰랐다. 덜어내면 낼수록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문서에 쓰는 색상의 수를 줄이는 게 시작점이었다. 세 가지 색상의 조합을 중심으로 문서를 구성한다. Black, White, Gray가 가장 깔끔한 조합이다. 조금 더 컬러풀 한 색감을 원한다면 Pink, White, Black도 괜찮다. 여러가지 색깔 조합을 하얀색 빈 페이지에 대보며 디자이너라도 된 듯 심오한 척 했던 기억이 난다. 템플릿의 깊이를 더하려면 질감이 있는 이미지를 색깔 뒤에 덧대거나, 아니면 그라데이션만 잘 써도 세련된 문서를 만들 수 있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파워포인트가 제공하는 기본 기능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계속 이미지 작업을 하다보면 오히려 텍스트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텍스트의 위치, 텍스트 전체가 만드는 모양만으로 하나의 멋진 디자인이 된다. 아무 것도 가미 안 하더라도, 가운데에 위치한 텍스트 두 줄의 너비가 정확히 일치해 덩어리 자체로 직사각형을 이룬다면 그만한 조화가 없다. 파워포인트에 시간을 투자할수록 덧셈의 욕심 보다는 뺄셈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 이쯤되면 파워포인트가 인생의 구루 같다. 복잡하고 오묘한 세계 속의 정수는 가장 단순한 지점에 있더래나 뭐래나.


또 하나 재미있는 포인트는 애니메이션 기능 사용에 대한 강박이다.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싶은데, 수많은 돌출의 옵션이 있는 애니메이션을 꼭 써야될 것처럼 느낀다. 그러다보면 파워포인트는 오만 것들이 구르고 점프하고 불쑥 튀어나오는 아크로바틱의 향연이 된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최대한 안 쓴다. 중요한 부분들을 강조하려다 구성이 산만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꼭 필요할 때 1~2번 쓰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문서 안에 내용이 너무 많을 때다. 특정 페이지에 불가피하게 A,B,C 3개를 동시에 얘기해야 한다고 치자. 아래가 빈 상태에서 헤드라인만 먼저 보여준다. 이어서 A,B,C를 클릭 때마다 하나씩 차례로 보여주는 것이 주입에 효과적이다.


글씨와 그림만 존재한다면 아주 평화롭다. 파워포인트에 영상이 삽입되는 순간 파워포인트가 당신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옛날옛적 파워포인트는 노트북에 저장된 영상을 틀어주는 방식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파워포인트 자체에 영상을 심을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영상이 포함된 파워포인트는 그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이따금씩 크기가 커 재생이 원활치 않거나, 어떨 때는 코덱을 설치해야 틀어준다고 해 사람 환장하게 한다. 기획서와 영상이 포함된 제작물로 평가 받는 광고회사에게 이는 생사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다. 부끄러운 얘기를 하나 하자면, 아주 중요한 자리였는데 내가 튼 영상이 버벅거리는 바람에 민폐를 끼친 적 있다. 이러니 기자재 트라우마가 안 생겨.


글꼴에 대한 부분도 꽤나 예민하다. 분명히 글꼴 저장으로 파일을 보냈는데 막상 트니 글씨가 다 깨지는 거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글꼴을 USB에 저장한 다음에 발표할 노트북에 심어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결정권자가 오면 바로 시작해야 되니까. 글꼴이 깨졌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노트북을 껐다 켜는 거다. 다른 기술적 문제에도 껐다 켜는 게 사실 만병통치약이다. 참, 아까 얘기를 못한 게 있다. 영상 삽입할 때 영상 별 음량도 미리 설정할 수 있어서 미리 다 조치해 둬야 한다. 그런데, 기술이 진화하면 우리는 더 쉴 수 있는 거 아니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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