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챠오챠오 Feb 11. 2021

정현 씨의 페르소나

정현 씨와 함께 108배를 5

 정현 씨는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


 정현 씨에겐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첫 번째론 귀찮음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정현 씨이다. 그것은 나와 지리산에 둘이 지낼 때 보이는 모습으로, 이 쪽이 제일 그의 본성에 가깝다고 추측된다. 지리산에서 정현 씨는 뭔가 계획을 짜고 생활을 한다기 보단 그때그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편이다. 뭔가를 열심히 하다가도 힘들면 빠르게 침대에 드러눕고 자기가 일을 벌여놓고선 나에게 마무리를 떠맡기곤 하는데, 그 일들이 꼭 내가 손대도 문제없는 노동들이라 가끔 일부러 저러나 싶기도 하다. 정현 씨와 함께하는 식사 끝엔 누가 설거지할지 치열한 눈치싸움이 이어지는데 대부분 정현 씨가 먼저 "설거지는 네가 해~"라며 선수를 친다. 결국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정현 씨가 슬쩍 다가와 껴안으며 "고마워~ 딸~"하고 애교를 부린다. 그의 진정성 없음이 어처구니없어 이젠 그냥 내가 알아서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두 번째론 '어린이집 선생님'의 페르소나이다. 정현 씨는 꽤 오랫동안 어린이집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그 때문인지 때때로 기계적으로 동요를 부르곤 한다. 정현 씨와 함께 지낼 땐 매 아침마다 그의 동요를 들으며 기상해야 한다. 그가 한껏 추켜올린 눈썹과 과장된 율동으로 '일어나요~일어나요~ 어써어써~일어나~일어나~'라는 구절을 발랄하게 귓가에 때려박으면 아주 괴롭기에 정현 씨의 노래를 멈추기 위해서라도 일어나야 한다.(참고로 정현 씨는 성량이 매우 좋지만 음치이다.) 동요를 즐겨 들을 나이는 한참 지났건만 정현 씨는 20여 년째 나에게 동요 불러주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쩐지 정현 씨는 내가 아침에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나는 걸 즐기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든다. 나의 괴로움과는 별개로 정현 씨의 동요는 본인의 감정을 지워내고 과하게 밝은 연극적 표정과 톤을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점에서 어떤 전문성마저 느껴진다.


 정현 씨는 두 살배기 손녀와 영상통화를 할 때에도 그 전문성을 발휘하곤 하는데, 그것은 아무나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기술이다. 정현 씨는 반복적인 현란한 손동작과 과장된 톤으로 울기 직전이던 손녀를 현혹시켜 끝내 꺄르륵 자지러지게 만들고 만다. 그렇게 지금까지 정현 씨는 손녀의 최애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배 아플 정도로 자랑한다. 한 번은 조카를 만났을 때 내가 따라 해 봤다가 무참히 치욕스러움만 남긴 채 조카와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정현 씨의 아이 다루기가 너무 전문적인 나머지 그의 칭찬과 격려는 실제 그의 감정과는 별개로 진정성이 느껴지지가 않는데 청소년기엔 정현 씨가 나를 놀리는 줄 알고 열 받아서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 칭찬과 인정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더 어릴 때는 정현 씨의 전문성과 감정의 동요가 적은 표정에 압도되어 정현 씨가 주부로 위장해서 살아가는 어딘가의 비밀요원이라고 생각하며 정현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현 씨에겐 K-며느리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정현 씨의 페르소나 중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이지만 정현 씨는 그마저도 충실히 수행한다.

 지난 추석의 일이었다. 나는 추석 당일 전날 밤에 도착했고 아침에 차례상을 준비하며 보니 어쩐지 음식 가짓수가 늘어나 있었다. 직전 명절에는 차례음식 대부분을 사서 썼기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차례상을 보고 나는 그저 '오 이번에 돈 좀 들이셨나 본데'라고 생각하며 군침을 흘렸다. 별거 없이 형식적인 차례가 끝나고 음식을 정리하며 이번 차례상의 화려함을 언급하자 정현 씨는 모두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다. 갑자기 피가 식어 왜 사지 않고 다 만들었냐 정현 씨에게 묻자 지난 명절에 음식을 사서 차례상을 차린 것에 대해 본인이 음식을 하지도 않는 작은 삼촌이 정성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표했다는 것이었다.


 친척들은 추석 당일 아침에 도착했고, 주부습진 같은 비루한 핑계로 항상 가사노동을 피하는 영감탱이(나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다.)는 당연히 저 화려한 차례상에 일조한 게 없을 테니 정현 씨 혼자 모두 준비한 것이었다. 열이 확 뻗친 나는 늘어져 앉아있는 삼촌과 영감탱이에게 다가가 차례상을 뒤엎으려 했지만 정현 씨는 하지 말라며 나를 붙잡았고, 그의 얼굴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짐을 챙겨 뛰쳐나왔다.


 열 받는 걸 풀 데가 없어 영감탱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딴 식이면 차례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화를 내자 영감탱이는 내가 왜 심기가 불편한지 파악도 못하고 내가 뛰쳐나간걸 의아해하며 눈치 없이 내게 다시 와 밥을 먹고 가라고 말했다. 내가 영감탱이에게 이 상황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전하려 했지만 멍청한 가부장인 영감탱이는 그저 내가 히스테리를 부리는구나 생각했는지 나중에 이야기 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지랄을 떨어봐야 본질적으론 바뀌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체감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연희동에 도착해 정현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현 씨에게 그렇게 며느리로 충실한 정현 씨의 모습을 보기 싫다고 했지만 정현 씨는 단호하게 이런 일련의 일들은 자신의 의무이고, 자신이 하고 싶어 선택한 일이니 내가 참견해선 안된다 답했다. 아주 복장이 터지지만 내가 실질적으로 그를 도와 이 지랄 맞은 시집살이를 본질적으로 뒤엎을 능력도 방법도 없었고 정현 씨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고 말하니 나로선 존중해야 했다. 스스로 앞가림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구원자 인양 그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가. 심지어 정현 씨는 나보다 더 굳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 나는 입이 썼지만 정현 씨는 더 이상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내게 약속을 받아냈다.


 지난 1월부터 영감탱이에게 이번 설에 꼭 오라는 회유와 협박이 골고루 섞인 연락을 자주 받아 스트레스를 받다 결국 지난주 정현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두로 늘어놓다 이번 설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어렵게 말을 꺼낸 게 김 빠지게 정현 씨는 선뜻 알겠다고 하더니 대신 이번 설에 세뱃돈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선 요즘의 자기 취미를 자랑하기 시작했는데 정현 씨는 요새 유튜브로 노래를 배운다며 '늙어서 봐~ 당신은 찬밥 신세야~'하며 한 소절을 구성지게 불러재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현 씨는 음치 박치를 골고루 갖춘 사람이다.


하여튼 정현 씨의 페르소나는 다양하고 각각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사는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현 씨와 고양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