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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오챠오 Feb 17. 2021

둠스발렌타인데이 - 례술 최후의 날

멀리서 보면 희극



 "오- 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어쩌구저쩌구-"

 


 나는 이제껏 례-술남이라면서 예술에 과몰입하여 세상에서 저 혼자 예술하는 척하는 남자들을 조롱해 왔지만, 내가 그동안 만나왔던 '례-술남'들은 그나마 체통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음을 최근 어떤 "진짜" 례-술남을 만나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아래는 내가 그 "진짜"를 만난 이야기이다.



 일주일 전쯤 타투이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분이 내 브런치 글이 마음에 들었다며 내게 공동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본인은 언젠가 글 삽화를 그려보고 싶었다며 내가 쓴 고양이에 관련된 글을 재밌게 읽은 모양인지 고양이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싶다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었고,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를 모시고 사는 집사여서 솔직히 말하자면 친해지면 고영님들을 만지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흑심이 있었기에 나는 그분에게 살갑게 굴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 자세히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분과 만날 날을 정했다. '어머, 내 글에 영감을 받으셨나 봐! 나중에 책 출간하면 표지 일러스트 부탁드려야지 후후'라며 혼자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킨 나는 어떤 주제로, 어떤 문체로 쓸지 고심하며 그분을 만날 날을 기다렸다. 


 그 분과 만나기로 한 날 아침, 나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친구가 '새벽까지 일하고 들어왔더니 애인이 발렌타인데이라고 아침부터 집에서 초콜릿을 만들고 있어 잠을 못 잔다'며 sns에 올린 것을 보고 '아ㅋㅋ 오늘 발렌타인데이구나'라고 무심결에 생각하다 순간 섬찟함을 느꼈다. 발렌타인데이라 하면 기업들이 촌스러운 포장지를 흩날리며 온 사회를 성애에 중독시키기 위해 열중하는 적폐 문화가 아닌가...(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 마저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며 어린 때부터 이성애를 세뇌시키는 무서운 문화이다.) 나는 그분이 혹시 이성애에 중독되어 비즈니스와 약간의 친목 이외에 '발렌타인데이'에 만나는 것으로 인해 어떤 로맨틱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 분과의 만남이 서비스업 미소의 연속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제발 내가 과대망상에 빠진 미친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약속 장소로 갔다.


 그분을 만나 내가 좋아하는 술집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술과 음식을 주문하니 '여긴 내 홈그라운드야 임마~'하는 쓸데없는 자신감과 함께 어떤 대화든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화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그분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 말을 놓자 말했고 나는 속으로 '오래오래 일을 같이 하잔 뜻인가'라고 혼자 착각하며 아주 편한 마음으로 말을 놓았다.


 평이하게 동네 마트나 맛집에 대한 로컬 대화를 나누다 뜬금없이 그분은 내게 자신이 부모님의 교육열과 기대 때문에 학창 시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수능을 '거의' 만점을 받고 대학에 가선 반발심으로 아예 책을 읽지 않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난독증이 생겼다고 말했다. 대학도 졸업한 분이 책 안 읽는단 소리를 저렇게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다니...


뭐... 네... 그러세요


 

그의 신변잡기가 슬슬 지루해진 나는 슬슬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싶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고양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로 프로젝트를 하고 싶은지 묻자 그는 어물거리더니 내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신나게 구상해 둔 것들을 늘어놓으며 이런 글에 이런 그림은 어떻겠냐 묻자 그는 자신은 그런 동화 같은 것은 쓰기 싫다 말했다.(아니 고양이의 귀여움을 잘 드러내는 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신나서 말한 게 좀 민망하긴 했지만 그럴 줄 알고 이미 다른 쪽으로도 구상해두었기 때문에 다른 플랜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플랜마저 글 분량이 너무 적게 나올 것 같다며 반려시켰다... '후, 그래 네 놈은 얼마나 대단한 계획이 있는지 들어나 보자'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어떤 글을 원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신나서 오랫동안 자신이 쓰고 싶었던 스토리라며 이성애에 중독된 가부장 노인네가 화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세기말 문학청년 감성'의 시대착오적이고 진부한 플롯이었고, 심지어 자신의 전 연애의 에피소드와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얻은 삶의 교훈...을 담아 자전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 말했다. 그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 자서전 대필을 해달라는 소리였다. 그는 비슷비슷한 진부한 스토리를 늘어놓으며 아주 획기적인 전개의 이야기인양 말했다. 아니 이야기가 진부한 것은 둘째 치고, 고양이는 털조차 등장하지 않는 점에 나는 매우 분개했다. 이럴 거면 왜 고양이를 주제로 같이 프로젝트하자고 했는가, 차라리 대필 작가를 구할 것이지.


 그가 제안한 진부한 가부장남 스토리는 죽도록 쓰기 싫어서 내가 전에 단편소설로 쓰려고 생각했던 스토리를 들려주었는데, 그는 "뭐, 마지막 장면 정도는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말로 감상을 일축했다.


 그가 대놓고 말만 안 할 뿐 무급 대필을 내게 바란다는 것을 확신한 이후론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점점 힘겹게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가 세련된 척 하지만 즐겁게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기 힘들 정도로 어휘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렇지... 저런 어휘력으로 글 쓰면 뭘 써도 투명드래곤 크와앙!!! 이런 문장밖에 안 나오겠지...'라며 깔보면서도 나는 자존심이 상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필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했으면 기분이 덜 나빴을 텐데, 그래도 그가 내 글을 재밌게 읽었으니 저런 제안을 하겠지 싶어 최대한 서비스업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왠지 쎄함을 느낀 나는 잠깐 가게 밖에서 함께 담배 피우다가 요즘 적고 있는 글감 이야기를 하는 척하며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퀴어 페미니스트' (그는 내로라라는 어휘를 잘 못 알아들은 듯했다)라고 일부러 과장을 섞어 밝혔다. 그러자 그는 피던 담배를 지져끄고 자신은 먼저 들어가 앉아있을 테니 다 피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그는 전과 달리 공손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앉자마자 "대체 내로라하는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페미니즘 서적 많이 읽고, 페미니즘 학회도 참여하고, 시위 나가고, 학교에서 쌈박질도 좀 하면 될 수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자신은 페미니즘에 대해 일부 동의하고 페미니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필요한 사상을 주장하니 이 사람도 맞고, 저 사람도 맞다 생각해 자신은 항상 중립을 지키려 한다고 말했다. 자기가 무슨 황희 정승도 아니고, 뭔 놈의 정치적 중립 말인가. 나는 그가 중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젠더 권력 덕분임을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고, 그는 기가 차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는 살면서 페미라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했고, 어렸을 때는 여성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다며 페미니스트인 내게 말했다... 그의 말에 하나하나 여성학 용어들을 덧붙이며 비난하고 지식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는 덧붙여 "친하게 지내던 미대 동기 여자애들이 페미니즘 쪽으로 넘어가면서 저는 이유도 모른 채 손절당했네요 ㅠ"라며 '진영논리에 잠식됨'과 '중립을 지킨다!'는 자신의 컨셉이 모순된다는 점도 눈치채지 못한 채 가만히 듣는 내게 신나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오~ 손절한 이유가 있겠구먼...'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개처럼 굴어도 나는 정승처럼 굴어야겠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음식을 열심히 먹는 척하며 굳어지는 표정을 숨겼다.


 그 인간은 이어서 자신이 전에 사귀던 외국인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애인분이 여성인권이 바닥인 나라 출신이라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만 바라보며 자신의 뒷바라지만을 삶의 낙으로 삼아서 정말 힘든 연애'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꼭 자랑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 여자 친구를 "계몽"시키기 위해 자신이 오히려 페미니즘을 가르쳤고, 그 내용은 '너도 클럽 가서 즐겨라.', '나가서 친구들과 만나서 술 마시고 즐겨라'는 것이었다... 그게 대체 페미니즘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는 그렇게 부단한 노력 끝에 애인분을 "한국 여자"처럼 만들어 놨더니 클럽 가서 남자 만나 바람 펴서 헤어졌다며 푸념했다.


 나는 그 인간이 헛소리를 할 때마다 술을 원샷하며 타는 속을 달랬고, 점점 술에 취함과 동시에 표정관리도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은 내가 주의 깊게 듣는 줄로 착각하고 줄기차게 별 듣고 싶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이어나갔다.


 그 인간은 자신이 그린 타투 도안을 보여주며 어떤 생각이 드냐고 내게 물었다. 속으론 '당신 어휘력의 결핍...?'이라고 궁시렁거리며 고심하는 척하다 "음... 결핍?"이라며 대충 지껄였더니 "맞아요~ 역시 예술하는 사람들끼린 통하는 게 있네요~"하며 신나선 내 눈엔 비슷비슷해 보이는 도안들을 보여주며 내 감상을 물었다. 내가 "음... 상대성 이론?"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예술 운운하며 맞다고 할 기세였다. 그러다 본인이 여성 손님의 몸 안쪽에 타투 작업한 것을 sns에 올리면 주변 지인들이 야한 농담을 하며 놀리는 게 정말 화가 난다고 말했다. 자신은 순수한 예술을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몰라준다며 그 인간은 열을 올리며 그의 례-술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중에 타투이스트 친구에게 물으니 널리고 널린 디자인의 도안이라며 어디 예술을 논하냐고 분개했다.)


 례-술에 대한 본인의 고견을 뜨겁게 쏟아내던 그 인간은 자신은 연애와 이별에서 큰 영감을 얻는다며 그런 때 가장 레전드 작품이 나온다고 수줍게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인상 깊게 보았던 한 유튜버의 노래 영상에 대해 들려주었는데, 그 유튜버가 생방송에서 이별노래에 감정을 싣기 위해 애인에게 헤어지자 했는데, 그 애인이 바로 수긍을 해버려 그 직후의 노래가 더욱 절절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집에 돌아가 찾아보니 웬 혐오 장사하는 남성 유튜버였다.) 그 인간은 웃기려고 한 얘기인 것 같은데 그의 감-성과 유머 취향은 둘째치고 나는 그 유튜버를 돼지라고 지칭하는 것에 '오... 비만 혐오까지...'라는 생각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분노를 글 쓰는데 가장 큰 동력원으로 삼는다 말하자 그는 또다시 '역시 예술하는 사람들은 격렬한 감정에서 영감을 얻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 인간은 계속해서 나를 '예술하는 사람'이라는 카테고리로 자신과 묶으려 했지만 나는 그와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넘을 수 없는 취향의 차이를 느꼈다.



음... 보아하니 하루키 키즈 구만...


 그의 끝없는 예술과 감성 타령에 지쳐갈 때쯤에야 나는 그 인간이 내 브런치 글을 고작 한두 개 읽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예술을 사랑하긴 하나, 나는 블랙코미디 장르의 글을 쓰는 사람인데 그가 나의 글에 대한 장르 파악이 전혀 안 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작업물을 미리 보여달라고 해볼걸 하는 답답한 마음에 테이블 위의 휴지라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니 뭐 그 인간도 저랑 비슷한 감성적인 례-술하는 여자 만나보고 싶었는데 왠 퀴어 페미니스트가 나와 곤경에 처한 것 같으니 피장파장이라는 생각에 까지 도달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역병으로 음식점에 9시라는 제한이 있어 그 날 만큼은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지인들에게 너무 힘들었다며 술냄새 풀풀 풍기는 푸념을 늘어놓다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 거대한 자기 연민에 빠졌다. 내 글 좋다는 말에 쪼르르 달려가 아까운 연휴에 남의 후달리는 글빨 채워달라는 소리나 듣고... 아주 한심한 꼴이었다. 글감으로 치환해 생각하니 한편으론 상황이 아주 웃겨서 지인들에게 가상의 인물 같은 전형적인 례술남을 만났다고 하니 지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준 글감이라며 얼른 글을 써달라고 재촉했다. 례술남에게 례술-철퇴를 맞았지만 웃음 욕심이 지나친 브런치 작가는 결국 또 이렇게 에세이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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