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이 필립을 이용하는 관계라고 해도, 그녀가 그런 고급품을 장물아비에게 넘길 정도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건이 데반스 공작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따로 보관을 명했을 정도로 아꼈다.
성 안의 하인들은 아닐 거다.
이사벨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이니.
게다가 값싼 보석도 아니고.
판 사람을 특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희귀품을.
‘바이올렛인가..’
바이올렛이 물건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한 짓은 아니겠지.
그저 제 눈에 비싸고 좋아 보이는 걸 찾았을 터.
그중에 잘 착용하지 않는 것으로.
“눈이 높네..”
거래를 하러 온 놈들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고가품을 판매하러 온 것이다.
자국 내에서는 꼬리가 잡힐 테니, 움직이는 비용을 감안하고서라도 해외에 팔기 위해.
게다가 이런 고급품은 신뢰도 없이 거래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거래한 사이가 아니라면 저들이 여기에 찾아온 것도,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
곧이어 랑이 오겠지. 중개인을 데리고.
토마스와 헤르나는 다시 첫 번째 공간으로 되돌아갔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네 사람 중, 랑의 수하들을 깨워 각자 여자를 부축해 밖으로 나가게 했다.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이대로 유곽 2층에 왼편으로 올라가. 자고 있는 여자들이 있을 거야, 너희들도 거기에 얌전히 있어. 다른 곳으로 가거나 수상한 움직임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잘 알겠지?”
그녀가 수하들을 협박하는 사이, 토마스는 브리텐드 사람의 입과 손발을 묶어 포박하고 있었다.
“근데.. 굳이 여기까지 나오지 말고. 아까 거기서 잠복하고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니야?”
“다 죽일 거라면 그것도 괜찮지.”
“?!”
“아무리 우리가 묶어놓고 협박했다고 한들, 그들은 랑의 수하들이야. 눈앞에서 랑을 본다면, 붙잡혀 있다고 해도 오히려 든든할 거다. 어떻게든 그의 손발이 되어 우리와 싸우려고 들겠지. 몸뚱이를 부딪혀서라도.”
“……”
어쩌면 다수를 살리려고 했던 선택이 안일했을지도 모르겠다.
거래를 위해,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왜 이렇게 불편할까.
살인이 전장에서는 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정치 싸움이나 수 싸움에선 그저 발을 묶어두는 걸로 족하다 여기는 나약한 심성.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면 가차 없어지는 스카드와 데인을 생각하면, 헤르나는 자신의 이런 면이 싫으면서도 바꿀 수는 없었다.
‘괜찮아, 헤르나. 그게 너야. 나는 네가 나와 달라서 다행이고, 좋다고 생각해.’
왜 이런 때에 스카드의 말이 떠오를까.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복잡한 헤르나의 얼굴을 보던 토마스도 말이 없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한가롭게 그 감정을 위로할 틈은 없었다.
지금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저쪽을 생각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니콜라스’
‘바이올렛’
기대했던 랑이 있던 것도, 왕녀가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기치 못한 꽤 괜찮은 수확이었다.
이 물건을 팔러 온 브리텐드 놈들은 몰라도, 전당포를 운영하는 주인은 판 사람의 얼굴을 봤을 거다.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바이올렛이라면 분명 최측근을 이용했거나 본인 스스로 움직였겠지.
바이올렛은 알까?
자신이 훔친 물건이 이런 곳에서 이런 사람에게 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랑에 대해 수하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는 보통 악질이 아니었다.
조세핀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어도 여럿 샀을 법한.
이런 사람을 통해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하다간 발목을 잡힐 텐데.
‘말했잖아. 복수 따위 꿈꾸지 말고, 얌전히 결혼이나 하라고.’
‘네가 왕위와 멀어졌다는 게 확실해지면, 이사벨도 얌전할 테니.’
토마스는 자신이 바이올렛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답답하다는 듯 뱉어냈다.
“어느 젊은 귀족에게든, 빨리 가버리라니까.”
네가 선택하는 사람은, 왕녀의 남편이기에 그 신분이 격상될 거야.
평생 살면서 불편하지 않을 물질과 권력도 허락하겠지.
그 가문에 잘 흡수되어 아이들을 낳고 여인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네가 가질 수 있는 좋은 패였는데..
이제 너는 명백한 이사벨의 적이 되었다.
“토마스.”
“?”
“그런데 계약의 테이블이라는 게 뭐야?”
“……”
길드에서 이용하는 계약이 테이블이란, 상호 간의 거래를 위해 만들어진 약속이었다.
살인 등 더러운 일도 서슴지 않는 암살 길드조차도 따르는 룰.
오래전, 에토르 바다에 악명이 높았던 브리텐드 출신 해적 헤스로이가, 은퇴 후 설립한 조합에서 처음 만들어진 규칙이었다.
지역의 경계와 가까운 주점, 혹은 길드의 사무실은 계약의 테이블을 소지할 수 있었다.
둘 사이의 거래가 이루어질 때는 중개인을 포함한 한 쪽당 최대 여섯 명이 원탁에 앉을 수 있으며, 중개인은 계약과 무관한 다른 길드의 사람이어야 했다.
단순한 테이블.
하지만 수많은 의미가 담긴 장소.
그 안에서 이루어진 거래는 정직하고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후 직접 거래로 인해 손해를 보거나, 세력으로 불공정 거래를 피하고 싶은 약소 길드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활기를 띄며 계약의 테이블은 성행했다.
그리고 만일 그 안에서 사기나 계약 불이행이 이어질 경우엔, 현상 수배가 걸리는 위험도 있었다.
헤스로이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들은 계약의 테이블이 확고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며, 그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살수를 움직여 계약 파기자들을 처리하곤 했으니까.
몇 년 뒤, 브리텐드의 길드들과 거래를 하는 타국에서도 계약의 테이블이 생겨났고,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조세핀이 말한 게.. 이거구나. 개인이 소유도 가능하다고?”
“길드 규모에 따라 달라져. 이것도 정해진 룰이 있고.”
‘꽤 여럿이 지하로 들락거리는데, 뭘 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어. 자신이 하는 일 때문이겠지만.. 그 숫자도 일정치 않아서 말이야.’
정보를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미안하다는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 이 장소를 조세핀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이유는 뭐지?”
“믿을 수 없으니까, 라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물러났는데, 주점에 들락거리며 거래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고. 여기라면 조세핀을 비롯해 사람들을 피해서 무슨 일을 꾸며도 들키지 않을 테니까.”
“……”
“네가 말했잖아? 덫. 이건 그놈이 조세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놓은 덫이야.”
……
밖으로 랑을 끄집어내거나, 가짜 수배를 빌미로 거주지를 덮치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겠냐는 측근의 충고에 헤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꾀가 많고 교활한 놈인데, 나라에서 수배가 내려졌다고 속여서 정면으로 붙으려 해도 순순히 잡히겠어? 길드 전체를 박살 내는 한이 있어도 도망갈걸. 가는 길에 조세핀이나 칼받이로 내세우겠지. 주변을 장악하긴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려. 그러니 우리는 덫을 놓고 기다려야 돼. 최소한의 인원으로. 너희는 도시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하면 막아주고. 우리는 왕녀를 찾으러 온 거지, 랑을 잡으러 온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줘.”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요. 아니, 그보다 찾으려 들면 더 숨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찾아야지. 이미 숨어있는 걸 찾는 건 어려워도, 다시 숨으려 하면 반드시 티가 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니라 왜..”
“왜.. 저런..”
그녀의 수하들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아~ 걱정 마. 이 샌님이 이쪽으로 더 쓸모 있을 테니까. 너희는 왕녀나 브리텐드에서 넘어온 사람들에 대해 계속 조사해 줘.”
……
저주로 인해 (친자식은 아니지만) 딸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그가, 겉으로는 변하지 않는 육신과 다르게 하루하루 늙어가는 몸으로 이곳에서 하고 있는 건 뭘까.
무병장수라도 기원하는 건 아닐 테고.
불사라도 바라며 뭔가를 준비하는 건가.
‘쿠웅-‘
“!”
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한 헤르나는 이내 바닥에 보일 발자국을 생각하며 충격받은 얼굴로 토마스에게 속삭였다.
“발자국..! 발자..”
숨소리만큼 작은 외침이었지만, 토마스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웃는 걸 보니, 아까 안쪽에 랑이 없었을 때의 상황도 예상하고 지우지 않은 것 같았다.
‘당황해서 달려올 걸 기대하는구나..!’
보폭은 빠르고 가벼웠다.
달려오는 것은 한 사람.
랑일까? 아니, 수하일 가능성이 더 높지. 랑은 걷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수하만 오는 걸까.
"?!"
“컥.. 커..억..”
토마스는 경비 초소를 확인하러 달려오는 자를 잡아채 순식간에 안으로 끌어들인 뒤, 칼로 목을 베었다.
그는 단순한 수하였지만, 설령 랑이었다고 해도 대화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이윽고 수하의 보고가 들리지 않자, 발자국 소리는 멎었다.
대신 조용한 침묵을 그르렁 대는 소리가 채워주는 것을 보니, 짐승이라도 키우는 모양이었다.
“……”
“쥐새끼가 다녀간 게 아니라, 아직 있구나..”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피우는 독한 담배 때문에 랑의 목소리는 노인 남성보다 더 낮고 탁했다.
보기 드문 오드아이 옆, 얼굴에 새겨진 깊은 상흔은 그가 이 자리를 얻기 위해 해온 수많은 과업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찢을까..”
깔끔하게 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지 않은 수염 사이로 피어싱이 박힌 입술이 샐쭉하고 움직였다.
“브리텐드 놈들은 아닐 텐데.”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일 거라며, 귀족들의 경매품에 내놓으면 큰 값을 받을 거라고 떠들어대던 장물아비가 눈에 아른거렸다.
한숨을 내쉰 랑은 손에 들고 있던 사슬을 내려놓고 사냥개를 풀었다.
미친 듯이 달려간 개들은 이내 낯선 냄새를 파악하고 초소 앞에서 크게 짖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