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사람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짐승이지만 그런 것을 가릴 여유는 없었다.
광견병에라도 걸린 걸까 싶을 정도로 난폭함과 공격성을 드러낸 개 두 마리와 붙느라 토마스와 헤르나 모두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검은 털을 가진 덩치 큰 개들은, 투견장에서 오랫동안 싸워왔다는 걸 보여주었다.
여타의 사냥개들처럼 물고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고 재빠르게 빠지는 날랜 모습이 마치 사람 같았다.
팔다리를 공격하고 물러나 숨을 고르는 와중에 집요하게 목덜미를 노리는 잔인함도, 투견으로 기른 훈련의 결과였다.
“으르렁..”
“아악!!”
사람하고 싸움이 붙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위험했지만, 고통을 뒤로하고 눈앞의 생존에 집중한 결과 둘 다 승리에 가까워졌다.
빠른 호흡과 심장 고동과 반대로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었다 싶을 때, 헤르나의 목 옆으로 긴 칼날이 들어오며 짐승보다 더 그르렁 대는 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면 가차 없이 긋겠다.“
”……“
숨을 헐떡이며 상처 입은 개의 목덜미에 칼을 대고 있던 토마스의 움직임도 멈췄다.
숨소리만 가득한 공간.
처음으로 마주한 니콜라스 랑.
들여다본 그의 눈은, 이런 바닥에서 오래 굴러본 토마스가 보기에도 훨씬 위험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다 죽어가는 개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은 토마스는,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감탄을 쏟아냈다.
“…눈에 생기 없이 살기만 가득하기가 쉽지 않은데.. 대단하군.”
“…보아하니 네놈도 이런 일을 했던 놈이구나.”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랑은,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헤르나의 턱과 볼을 만졌다.
“곱상한 걸 보니, 너는 귀족인 듯하고.”
“……”
랑은 빠르게 초소 안을 살폈다.
구석에 포박된 채 구해주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는 인질을 포함해서 눈앞에 대판 벌려놓은 놈과, 그놈의 일행.
둘 뿐인가? 무슨 배짱으로 둘만 온 것일까.
신기하면서도 황당한 상황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어이가 없는 건 이런 와중에 두 놈 다 전혀 기죽지 않았다는 거다.
“내 구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이만한 깽판을 쳤을 땐, 목숨을 걸만한 이유가 있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네놈들 다 곧 죽겠지만.”
랑은 헤르나의 목에 칼을 긁었다.
“오늘의 손해를 돈으로 계산한다면, 가문을 털어야 할 거야. 난리 친 값에 네 목숨값도 더해야 할 테니. 자, 일단 앞에 있는 놈은 내 물건을 돌려주실까.“
”……“
”뒤에 묶인 브리텐드 놈들이 팔러 온 물건 말이다. 가지고 있을 텐데. “
망설이던 토마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상자를 랑의 발 앞으로 밀었지만, 그는 상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발로 차 토마스에게 되돌려주었다.
“열어.”
교활한 랑은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상자에 있는 물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눈에 값어치는 매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꽉 닫힌 상자보다, 모두의 눈앞에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을 보길 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망설이는 토마스를 보던 랑은 칼을 좀 더 헤르나의 목에 가져다 대고, 불쾌한 숨을 그녀의 얼굴에 뱉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토마스가 품 안으로 손을 넣어 목걸이를 꺼내는 순간, 랑은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과연 아무 데서나 구할 수는 없겠다는 말을 확인한 그가 탁한 목소리로 웃는 순간,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던 칼의 힘이 살짝 빠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헤르나는 토마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 뒤, 테이블 위의 램프로 시선을 돌렸다.
“!”
위험한 선택이라는 걸, 자칫 잘못하다가는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은 아주 빠르게 반응했다.
마치 그녀에게 길들여진 개가 된 것처럼.
순식간에 램프를 들어 헤르나의 발밑으로 던졌고, 깨진 램프의 불꽃은 그녀의 신발에서 떨어진 가루를 따라 발밑으로 옮겨 붙었다.
놀란 랑은 헤르나를 발로 차버렸고, 눈앞에 쓰러진 그녀의 앞을 넘어서 칼을 든 토마스가 달려왔다.
“윽..!”
“어린놈이!”
팽팽한 힘 겨루기가 계속되던 두 사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헤르나는 신발에 붙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질로 잡혀있던 브리텐드 사람들에게 몸을 덮어 불을 끄라고 호통을 치는 통에 셋이 엉켜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이리저리 옮겨 붙은 불을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저리 가!”
헤르나는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며 자신의 옆에 붙어있는 인질들을 떼어놓고, 품 안의 마검을 꺼내어 달려들었다.
2대 1의 싸움이었지만 조금도 밀리는 기색이 없던 랑은, 왼쪽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던졌다.
토마스에게 날아간 병은 순간적으로 방어한 덕에 얼굴에 맞지 않았지만, 그의 팔과 부딪히며 깨졌다.
“아악!!”
역하게 타는 냄새와 비명소리에 눈을 돌린 헤르나의 가슴팍도 순식간에 랑의 발에 차여 나가떨어졌다.
“으.. 비겁한 놈!!”
팔에 화상을 입어 고통스러워하는 토마스를 보며 헤르나가 분한 듯 소리쳤지만, 랑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비웃었다.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만 있다. 격투를 놀이로 배운 네놈이야 이해 못 하겠지만. 귀족들이란 그래, 언제나 주둥이만 살아 설치지.”
“닥쳐..! ...?”
멀리 안쪽 초소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면에 자리 잡은 연약함을 외면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임시 포로로 붙잡아 둔 랑의 부하들이 몰려나왔다.
“젠장..!”
가슴을 얻어맞은 충격으로 입안에 고인 피가 비릿하다.
뼈라도 부러진 건가.
이 와중에 적이 증가하다니.
약해빠진 소리 하지 말고 저 놈들을 죄다 죽였더라면, 이런 꼴은 보지 않았을까.
“어이.. 목숨은 붙어있었구먼.”
살아있는 것에 의외라는 듯, 랑이 반가움을 표시했고 부하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왔다.
“니콜라스!”
“랑님!!”
“주인님!”
“거기까지!!!”
헤르나는 그들의 반가운 재회를 막으며 소리쳤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하들의 얼굴을 보며 분명하게 경고했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너희를 모두 죽일 거야.”
“?!”
“내가 너희를 죽이지 않은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저 죄다 죽여버리는 게 내키지 않았을 뿐이야. 하지만 그건 아까 얘기고. 너희가 랑의 편이 되어 설칠 거라면, 나도 살려둘 이유는 없거든.”
“……”
저런 허세 섞인 말로 설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한심하군.
귀족들이란 그저 신분으로 누르는 일이 익숙해서…
헤르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랑이었지만, 변한 그녀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경계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경고에 머뭇거리던 부하들은 그 말을 무시하고 조금씩 발을 내디뎠고, 헤르나는 어느새 통증 따위 다 잊은 듯 망설임 없이 마검을 고쳐 잡았다.
“!”
……
“사람을 여럿 움직이는 건 쓸모가 없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거든. 감도 좋고.”
“더욱이 이 주변에서 랑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소문은 없다고 봐야 해. 그러니까 이유는 아직 몰라도, 왕실에서 이 도시에 사람들을 파견했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조세핀과 랑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헤르나는 골치 아프다며 머리를 저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건 안된다, 계략을 짜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일선에서는 물러났다고 해도 수하가 한 둘이 아닐 텐데, 그런 위험한 사람을 잡으라면서 혼자서 가란 말이야?”
짜증을 내는 모습도 귀엽다는 듯이 웃던 조세핀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같이 움직일 사람 하나 없니, 너는?”
“물론 믿을만한 수하가 있긴 하지만…”
누구를 데려가야 좋을지.
생각해 보면 이런 엉망진창인 일에는 그놈만큼 제격인 사람이 안 떠오르는데…
역시 손을 잡아야 하나..?
고민에 빠진 헤르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조세핀이 그녀의 눈과 손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을 꺼냈다.
“있잖아.. 내가 경고하는데…”
“?”
“버려.”
“뭘.”
“손에 쭉 피 묻히고 살아왔으면서, 깨끗한 피 더러운 피 구분 짓지 말란 말이야. 사람 피는 다 붉고 뜨겁거든. 그게 악인이든, 선인이든.”
“……”
“그런 도움 안 되는 마음을 버려야, 이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어? 어차피 남 죽여달라고 부탁받으면서. 뭘 가려, 가리긴.”
……
그래.
네 말이 맞아, 조세핀.
피는 피일뿐이지.
목숨은 목숨이고.
어차피 뱃가죽 속은 모두 붉은 것처럼.
생명은 소중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면서.
애초에 계급 따위 나눠져 있는 거 우습지 않아?
누군가는 고귀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하찮다는 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사실 잘 와닿지 않았거든.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왕족이나 귀족이 자기 살겠다고 떠벌리는 거짓말이라는 거.
그래야 그들이 자길 해치지 않을 테니까.
왕이나 귀족이나 농민이나 노예나.
목숨은 한 개 밖에 없으면서.
다들 한 개짜리 들고 수십 년간 배팅을 하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잘 살기 위해.
전장에서 그 많은 피를 묻히고도 나는 아직 몰랐나 봐.
그땐 죽여도 됐고, 지금은 안 되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때나 지금이나 살아남으려고, 날 위해 칼을 들었으면서 말이야.
어차피 내 손은 더럽혀져 있고.
내 피의 죗값은 죽어서 에토르의 신 앞에서 착실하게 치르게 되겠지.
이제 와서 백날 깨끗한 척해봐야, 사람을 죽인 건 변하지 않아.
어설프게 깨끗한 척하다 죽을 마음도 없어.
그러니까 난 저 앞에 있는 놈들이 왕족이라 해도..
“모두 죽일 거야..”
그래야 끝이 날 테니까.
수하들에게 달려가는 헤르나를 본 랑이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으려 했으나, 토마스가 달려드는 통에 그와 다시 맞붙게 되었다.
빠른 공격을 연이어 퍼붓는 토마스를 막아내느라 곁눈질할 틈도 없었지만, 헤르나의 움직임은 확실히 이전과 달라졌다.
망설임 없이 하나하나 급소를 베어나가는 모습이, 전장에서 효율적으로 싸우는 살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친년이로군..!”
긴장감이 섞인 감탄을 내뱉는 랑은 어느새 얼굴까지 피를 뒤집어쓴 헤르나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너만 남았네.”
“…!…”
계속해서 두 사람과 싸웠지만, 내면이 녹슬어가는 육체에 힘이 빠져서인지 랑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느려졌고 금세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이때를 놓칠세라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헤르나의 칼이 마침내 랑의 옆구리를 뚫었고, 마검에 상처 입은 그가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쿨럭.. 너희들 내가..”
잡다한 설명이나 사연 따위는, 궁금하지 않고 들을 생각도 없는 토마스가 랑의 목을 그으며 질긴 목숨은 끝을 맺었다.
“하아..”
“……수고했어..”
토마스는 이런 얘기가 헤르나에게 격려든 위로든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이 났으니 이제 마음을 좀 진정시키라는 의미에서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