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나는 자신의 수하들을 호출해 조세핀에게 랑의 부고를 전했다.
도박장 안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태우고 있던 그녀는, 헤르나의 수하들을 만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던 그 저주에서 해방된 느낌을 얻었으니까.
“죽었구나.. 당신.”
웃는 입꼬리와 반대로 눈은 많은 생각을 담은 슬픔을 흘려보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데, 이 감정은 뭘까.
그 끝은 쉬웠을까, 어려웠을까.
그들이 당신에게 잡아먹히고, 나도 당신 손에 죽게 되는 결말을 상상하기도 했었는데…
니콜라스, 난 지금 후회되지 않아.
다만 당신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은 담겨있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난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겠지.
그래서 날 이용하는 걸 피하려고 멀리 떨어져서, 당신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을 골랐거든.
이 도시에 감히 누구도 당신을 대적하지 못하려 했을 텐데.
의외였겠지, 아마 방심하기도 했을 거야.
당신의 소문을 아는 자라면, 누구든 대담하게 그런 일을 벌이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너무도 적합한 상대를 만난 거 아냐?
당신의 소문을 모르는 어린 후작.
아무나 함부로 덤빌 수는 없는 세력.
빠르고 조용하게 처리할 수 있는 행동력.
당신이 물러나 있는 지금, 그녀가 내게 와준 것에 감사해.
이제 난..
“선물을 준비할 차례지.”
조세핀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무례야!!”
천장에 내려온 끈에 손목이 묶인 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노려보는 여인은 포로로 잡힌 상황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소리치고 있었다.
“도박하러 와서 돈 다 떨어졌으면.. 결말은 뻔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 많아.”
“구해오겠다고 했잖아!”
“뭐.. 보통 때라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지만. 당신이 너무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말이야.”
“뭐라고?!”
“머리칼 색이나 키, 몸매.. 여러 가지로 흡사하거든.”
조세핀은 그 여인에게 다가가 단도를 높이 들었다.
그녀의 목을 겨냥하며 팔을 내리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문 밖에 있던 헤르나의 수하는, 그녀의 예상대로 랑이 죽었음을 알렸다.
조세핀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자신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시체들과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떠났다.
<그동안 이쪽도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설명하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 역시 표정을 잃고 멍하게 듣고 있을 것만 같다.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귀로 흘러 들어가 사라져 버릴 말들처럼.
"...엔."
“왕비란 무릇..”
“…교육이란 게 모르는 걸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걸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네?”
왕실의 예법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라디엔은 칸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다 이내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한 내용을 복습하고자 했을 뿐, 왕비님이 모르신다고 생각해 재차 가르쳐드릴 의도는 아니었으니 용서해 주세요.”
“라디엔.”
“예.”
“내게 왕실 내부의 사정이나, 자금 관리 같은 교육은 시키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까?”
“그게 무슨..”
“예절, 법도를 제외하면 계절의 변화에 따른 화원의 식물들 이야기만 하니까 말이에요.”
“……”
칸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아는 것도 신분도 없는 자신을 배려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성장했음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칸나가 스스로 나설 수 있는 일은, 왕실에서 주최하는 티파티와 마법 기사단의 일 뿐.
보통의 왕비들이 해왔던 모든 일에서 제외되었다.
그전에 행사에 그녀가 참여했을 때, 실수가 있거나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의도적으로 허수아비 노릇을 시키고 있는 느낌.
마법 기사단의 일까지 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예의 바르게 성 안에 앉아서 꽃이나 구경하는 왕비로 하루하루가 끝났을 것이다.
“의도적인 거 같아서 묻는 겁니다.”
라디엔은 가엾은 왕비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뮐러 후작과 브리텐드의 카퍼 백작이 떠난 뒤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리온은 집무실 밖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독수공방을 하는 두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를 알게 된 성 안의 사람들은 드디어 리온의 흥미가 떨어진 것이 아니냐며 입방아를 찧었다.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소문이 당사자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왕비님께서 맡으셔야 하는 일은 현재 프로이센 공작가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왕실의 일인데, 안주인이 있음에도 공작이 직접 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마법 기사단에 열중하느라 임신도 뒤로 미루는 왕비에게 더 많은 일을 맡겼다간, 2세가 기약이 없을 것 같다 판단한 리온 때문이었다.
왕실의 대소사를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들게 처리하는 것 역시, 미우나 고우나 프로이센 공작뿐이라는 리온 때문이었다.
그리고 칸나에게 실질적인 많은 권한을 주고 싶지 않은 스카드의 이해관계도 맞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가 헤르나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긴 했지만.
“말할 수 없는 걸 보니,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고.. 전하께서 직접 지시한 일일 수도 있겠네요.”
“……”
<마녀, 이다 (2)>
외교 문제의 복잡함도 골치가 아팠지만, 귀족들이 눈치채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마법 기사단을 완성하고 싶어 안달이 난 리온은 칸나 못지않게 그 과정에 집착했다.
왕과 왕비가 모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관심을 가지는 통에 마녀들은 빠른 성장을 이루었지만, 군사력이 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과, 그 마법을 이용해서 싸우는 일은 별개였으니까.
제각기 움직이며 단합되어 싸운 경험이 없는 마녀들이 왕실 수호 기사단처럼 성장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마법은 조금씩 늘어가는데 말이야..”
답답한 리온이 한숨을 내뱉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검을 사용하는 기사들처럼 체력이나 단련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제각기 가진 마력도 달랐으며, 마법에도 재능이 존재했고, 중간에 마력을 잃는 일도 생겨났다.
“안 되겠어. 다시 불러와.”
“늙은 마녀 말씀이십니까.”
“그래.”
늙은 마녀라 불리는 마녀 '이다'의 일이 들통난 뒤, 리온은 칸나의 기분을 신경 쓰긴 했지만 그녀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녀에 관한 문제는 이미 봤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다를 성으로 불러들였다.
칸나는 그런 리온이 마뜩잖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걸지도 않았다.
어쩌다 그녀가 둘을 복도에서 마주친대도, 마녀와 함께 있는 리온에게 가볍게 인사만 건네고 지나칠 뿐이었다.
남의 눈치 따위 별로 볼 일이 없는 리온과 달리, 수많은 사람들을 살피며 살아왔던 이다는 그런 칸나의 모습이 불편하고 신경 쓰였다.
'분명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을 성격인데..'
이다는 칸나와 독대를 한 이후로, 자꾸 그녀의 모친인 지오니가 떠올랐다.
'당신은 내게 무어라 할 텐가... 당신의 하나뿐인 딸, 당신이 지키려 했던 그 딸을, .......주인이라는 이유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해?"
이 날도 복도에서 마주친 차가운 시선의 칸나 얼굴이 떠오르며 생각에 잠겼던 이다는, 리온이 하는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다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던 리온은 재차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마법 기사단을 지휘할 수도 있을까?"
"?!"
당황해서 눈이 커진 이다를 본 리온은, 칸나가 출산 이후 모든 계획에서 한 발 뒤에 있을 것임을 이야기했다.
"...임신은 아직 먼 이야기 같습니다만..."
현재는 아이를 원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혔던 칸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다는, 리온이 너무 앞서나간다는 생각이 들어 한 발 물러섰다.
안 그래도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칸나를 뻔히 알면서 굳이 그녀가 공들이고 있는 마법 기사단의 통솔권까지 뺏으라고 하는 건...
계속해서 거리낌이 있는 이다였지만, 리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어차피 그녀를 최전선에 세울 작정은 아니었어. 당연하잖아? 아무리 칸나가 마녀고, 그녀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기사단이라고 해도 신분이 왕비인데 전장의 지휘관으로 둘 수는 없지."
"....그저 두려운 것 아닌가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리온에게 아차, 싶어 말을 삼켰던 이다는 그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혹여라도 왕비님을 잃게 되면, 전하의 모든 계획이 무너질 테니까요."
대꾸 없이 이다를 바라보던 리온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질문을 꺼냈다.
"그렇다면 말이야.. 반대로 물을게. 네 말대로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어떠한 경우에서도 그녀는 살아있을 것이라는 보증이 있어?"
"......."
당연히 확신할 수는 없지.
나 역시 신탁은 처음이었으니까...
말이 없는 이다를 본 리온이 응접실 한쪽에 놓인 체스판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신이라는 존재와 왕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리온의 질문에 이다가 고귀한 것인가, 라는 답을 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용할 패가 많다는 거야."
그는 체스판에 놓인 말들을 하나씩 손끝으로 쳐서 테이블 밑으로 떨어뜨리며 덧붙였다.
"신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세상을 이끌어 갈 거고, 그 안에 필요한 사람을 사용할 뿐이지. 신에게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한 것 따위는 없어. 물론... 최선과 차선은 나뉘겠지만. 설령 신탁이나 운명의 사람 같은 게 신의 손에 없다 해도, 다른 방법을 사용할 거야. 그건 나를 비롯한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왜 그렇게 그녀에게 집착하십니까."
"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