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은 이안을 불러 마법 기사단에 대한 훈련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 받았다.
칸나가 그에게 전해주는 일지와 비교해 보며 다른 것은 없는지, 누락된 것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왕비님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이안은 바쁜 와중에 어째서 계속 번거롭게 일을 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리온은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했다.
"아직 칸나는 실무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확인하는 것뿐이야. 내가 더 알아둬야 할 것들이 있을 테고. 마녀들은 귀한 병력이니까."
일지를 한참 들여다보던 리온은 이안에게 자신이 명령한 일은 어찌 되었는지 물었다.
"늙은 마녀 말씀이십니까."
"그래."
"찾았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있더군요."
"조만간 성으로 불러들여. 비밀리에."
리온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마법 기사단의 성과에 만족하며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내 다른 생각에 찌푸린 미간에 손끝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쪽도 잘 좀 진행이 되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안은 그가 아이를 원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엘레나와는 갖고 싶지 않았던 아이.
칸나를 통해서 얻고 싶은 아이.
그의 후계.
오토른의 왕족.
그래서 그가 늙은 마녀를 불러들여 임신에 좋은 방법을 알아보려 한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과연 리온이 생각하는 것만큼 칸나도 임신을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력이 없는 젊은 왕비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구축하는 데에는 임신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이안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칸나는 아이를 별로 원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백설공주가 차기 제르만의 여왕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칸나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두 모녀 사이는 원만했다.
공주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스카드 공작이 아무런 움직임 없이 조용하게 있을 만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또 쓸데없는 연민이라면 관둬. 오히려 모든 것을 잊어서 답답한 건 나야.... 그럼에도 또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이만한 남자가 흔할 것 같아?"
".....확실히 전하만 한 사람은 없지요."
무표정한 이안의 얼굴을 보던 리온이 입술을 삐죽이며 되물었다.
"비꼬는 건 아니지?"
"...여러 가지 의미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비꼬고 있네."
이안의 그런 태도가 익숙한 듯, 리온은 그를 무례라 여기지 않고 다시 책상에 한편에 놓인 공무에 집중했다.
<여기도 비꼬고 있습니다>
"으아..."
토마스는 배도 타기 전에 질려버린 얼굴이었다.
버럭버럭 큰소리로 사람들을 호령하는 헤르나의 모습은, 늘 품위를 생각하는 이사벨과 달리 성격이 지랄 맞은 여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이사벨을 향한 애정 섞인 충심으로 그의 눈이 가리워진 탓에, 겉과 속이 같은 헤르나와 달리 오히려 이사벨은 속이 시커멓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알면서 외면하고 있는지도.
"왜 그렇게 야단을 칩니까?"
사용인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토마스를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보던 헤르나가 비꼬듯 말을 던졌다.
"얼마 전 회의에서 우리들을 쥐 잡듯 야단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네요."
"그것도 사절로 왔다는 백작 나으리께서 일국의 국왕과 중신들이 다 있는 앞에서."
헤르나의 말에 토마스는 잠시 잊고 있었던 지난 일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이에 덧붙여 멀리 보이는 바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를 위협했다.
"난 빨리빨리 움직이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사람을 부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누가 야단을 쳤다고 그래? 당신이나 내 사람들한테 야단치지 마요. 한 번만 더 회의장에서처럼 굴면 저 밑으로 가라앉혀 버릴 테니까."
"아니 왜.. 왜 자꾸 나한테...!"
이건 외교 사절을 대하는 태도로는 부당하다는 그의 외침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헤르나는 토마스가 그저 뱃속 편한 소리만 하는 귀족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스카드나 자신과 달리, 전장에서 한 번도 뛰어본 적 없을 것 같은 그의 호리 한 몸은, 격투술로 맞붙어도 5분 안에 바닥에 처박아 눕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술로 붙으면 일분 안에 목이 달아날 놈이..."
헤르나에게는 그가 어딜 봐도 협력하기에 마땅치 않다 느끼는 상대에 불과했다.
"......"
토마스는 한참이나 서서 헤르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바지를 입은 귀족 여성.
여성으로서 가주가 된 것도 신기했지만, 그녀의 통솔력 또한 가문을 대표하는 어느 남성들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온화함을 미덕이라 여기고, 그렇지 못할 때는 흉내라도 내어 품위를 말하는 여느 귀족 여성들과는 다른 모습.
헤르나의 연갈색 눈동자는 아름답게 빛났고, 그 눈빛은 솔직하고 올곧았으며, 도톰한 입술과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는 섹시했다.
또한 붉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열정적이고 호전적인 뮐러 가문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아깝군..."
이제껏 헤르나의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토마스의 눈은 광기로 빛이 나고 있었다.
남은 짐을 정리하러 방 안으로 돌아온 헤르나에게 문득 그날 스카드가 건넨 쪽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
망토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쪽지에는 '누구를 위한 일일까?' 라고 적혀 있었다.
이 자식이.
사건이 궁금하다는 거야 뭐야,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헤르나는 냉정을 되찾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로 인해서 지금 피해를 본 것은 제르만 왕실, 브리텐드 왕실.
리온은 외교적인 문제를 겪었고, 이사벨은 내정에 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스카드야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게 되었지만 몰랐던 일.
딱히 이 일로 이득을 본 사람은 없었다.
바이올렛도 죽었을 테니...
그녀에게도 뭐...
...?
"뭐야.. 잠깐..."
<차>
반복되는 하루의 연속이었지만, 칸나에게는 그 안에 행복이 있었다.
자신을 잘 따라주는 백설공주를 보며 엘레나에게 미안할 만큼 엄마로서의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리온으로부터 결혼의 기쁨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 지켜나가야 할 선이 생긴 덕에 귀족들과의 관계도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
열심히 계획하고 진행하는 마법 기사단의 일도 순조로웠다.
언제나 이렇게 소소한 행복들이 가득한 하루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안고 일어난 아침, 그녀의 식탁에는 처음 맡아보는 향의 차가 놓여있었다.
"이건 뭐지?"
"아... 그... 포피의 독을 빼서 만든 꽃차라고 합니다."
"......독을 뺐다고?"
"거..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정말..."
의아함을 표하는 그녀에게 독이라는 키워드가 신경 쓰인 여관이 열심히 변명 같은 설명을 했지만, 칸나는 독이라는 말 자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 차에서 독살의 위험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피임을 위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던 칸나는 이 차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독을 뺀 포피와 여우꽃의 수술, 진주가루를 섞은 뒤 마법을 사용해 임신에 좋은 약차를 만들면, 사용자는 백일 이내에 아이를 얻게 된다.
오래전, 지오니의 모친도 마셨다던 차.
"고마워. 나가봐."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여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에게 칸나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중을 들고 빈 찻잔을 확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답했다.
"......."
한숨을 내쉰 칸나는 오렌지 주스 안에 들어있던 얼음을 꺼내어 차에 넣고서 단숨에 들이켰다.
깜짝 놀라 쳐다보는 여관에게 빈 찻잔을 건네며 나가라는 눈짓을 하고, 입안에 남은 차를 오렌지 주스 안에 뱉고서 이 일이 누구의 계획이었을지를 생각했다.
이런 복잡한 마법을 리온이 그냥 알고 있다고?
마법 기사단을 제외하고 성 안에는 따로 마법을 아는 자가 없는데.
게다가 오래된 마법이라 요새는 쓰이지도 않을...
기록에도 잘 안 남아있을 마법.
마실 때까지 그 옆에서 지켜보고 확인하게 만드는 집요함까지.
누구일까...
칸나는 성 안의 마녀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리온에게 이런 마법을 가르쳐주었을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리온이 따로 아는 마녀가 있는 건가?'
그가 새로 알게 된 마녀인지, 이전부터 알고 있던 마녀였는지 알 수 없지만 골치 아픈 상대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인지 모를 상대가 옆에서 또 다른 조언을 하거나 계략을 꾸밀지 알 수 없다는 걱정이 든 칸나는, 리온을 만나 담판을 지으러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에필로그>
늦은 밤, 목욕을 마치고 잠옷 차림으로 책상에 걸터앉은 헤르나는 담뱃불을 붙이고 창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에 취해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던 그녀는 담배상자 밑에 넣어두었던 스카드의 쪽지를 꺼내어, 종이의 가운데에 담뱃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스카드의 쪽지에는 추신. 이라는 글도 짧게 쓰여 있었다.
'미친놈 조심.'
헤르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았던 토마스의 모습을 생각하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저 그런 새끼고양이는 아니시라는 거군?"
물론 회의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과 스카드의 태도가 의문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잠시 스쳐가는 개인적인 감정이었을 뿐 경계할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껏 전장 밖에서 누굴 만났어도 스카드가 따로 헤르나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한 적은 없었다.
날마다 살아남고, 서로를 살리기 위해 애썼던 전시*도 아닌데.
그날.. 몰래 신속하게 전해야 할 만큼 그에게서 뭔가를 발견한 걸까.
*전시(戰時) - 전쟁이 벌어진 때
예전에 스카드에게 듣기로는 이사벨과의 관계가 묘하다던데.
그가 헌신하는 것은, 국가인 브리텐드나 가문이 아니라 높은 자존심과 변덕이 들끓는 여왕이라고.
하긴, 수시로 사람을 갈아치우며 이런저런 스캔들로 이름이 높았던 그녀에게 꾸준히 사랑받으려면 보통은 아니겠지.
저런 연약한 모습으로 벌벌 떨기만 해서야 금세 질려버릴걸.
토마스 카퍼.
그는 이사벨의 숨겨진 애인인 걸까.
아니면 그저 여왕의 발닦개인 걸까.
환각을 일으킬 만큼 짙뿌연 담배 연기가 흩어지고, 생각에 잠긴 헤르나의 눈빛은 호기심이 섞인 살기가 번뜩였다.
생각보다 이곳의 일정이 재밌어지겠다는 느낌에, 그녀는 토마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욕을 뱉었다.
"미친년 조심이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