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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n 10. 2023

피렌체에는 사랑이 넘친다.

   영화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집필한 소설을 영화로 만든 냉정과 열정사이. 오래전 헤어졌던 준세이와 아오이가 피렌체에서 재회한다는 이야기. 웬만한 이탈리아인보다 잘생긴 준세이가 자전거를 타고 누비는 르네상스 건물 사이의 골목길, 피렌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에 놓인 베키오 다리,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두오모 대성당, 그 성당의 거대한 돔을 올린 천재 건축가 부르넬레스키의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더라도. 영화에서 보이는 피렌체는 낭만적이었다. 그곳 피렌체에서 준세이와 아오이의 멈췄던 사랑이 다시 숨을 쉰다. 그래, 그런 아름다운 피렌체에서라면 없던 사랑도 생기겠다.


   피렌체에서 보내게 될 한 달을 상상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림을 배우던 공방, 갈릴레이가 유년 시절을 보낸 수도원, 미켈란젤로가 잠들어 있는 성당, 단테가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만났던 다리, 그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 연인들. 비포선라이즈의 두 남녀가 서로에게 끌렸던 건 운명이었기 때문일까. 그곳이 단지 오스트리아 빈이었기 때문일까. 냉정과 열정사이의 두 남녀가 다시 만날 용기를 냈던 건 사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까. 그곳이 단지 이탈리아 피렌체였기 때문일까.


   피렌체에 도착한 첫날, 내 기억 속에서 사랑 가득하던 피렌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 사이의 골목은 좁고, 그 좁은 골목에 가까스로 이어진 인도는 더 좁아서 밀려드는 관광객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 혼란한 길에서 기념품을 사고, 한쪽 다리를 든 자세로 사진을 찍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길을 걷다 한 번씩 걸음을 멈추었던 건 이탈리아 감성의 상점이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시선을 끌어서가 아니었다. 내 앞을, 내 옆을, 내 뒤를 에워싼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방심하면 사람들에 파묻혀 미아가 될지도 모를 아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아, 이런 정신없는 피렌체에서라면 있던 사랑도 사라지겠다.




   피렌체 이전의 일정은 로마였다. 오스트리아 빈의 일정이 끝나면 로마로 건너가 한국에서 출발하는 처형네와 장모님을 만나기로 했다. 근로자의 날과 어린이날이 낀 5월의 연휴기간에 짧게나마 이탈리아의 일정을 우리와 함께 하기로 했다. 처음 가 보는 로마에 대한 기대는 컸다. 어쩌면 어릴 적 가장 먼저 들었을 도시, 세상의 모든 길이 통했다는 도시, 이스탄불에도, 스플리트에도, 심지어 아테네까지도 찬란했던 당시의 흔적을 남긴 도시, 로마는 그런 도시 아니던가.


   처형네와 함께 한 첫 일정은 바티칸 시국의 미술관이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2시간 동안 줄을 서야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미술관에 겨우 들어가고 나서도 줄은 계속 이어졌다. 뒷사람에게 떠밀려 바다로 향하는 강물처럼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했다. 전시된 조각상과 그림은 곁눈질로만 슬쩍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는 시스타나 경당 안은 마치 출근길 지하철 안처럼 발 디딜 틈뿐이었다. 자리를 옮겨가며 여러 방향으로 그림을 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는 위아래가 바뀐 모습으로 봤고, 한 벽 전체를 매운 최후의 심판은 너무 멀어 흐릿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1시간 줄을 섰다. 그나마 콜로세움, 판테온은 미리 시간 예약을 해 놓아서 줄을 설 필요는 없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서는 역시나 사람들 속에 묻혀야 했다. 식당이나 카페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음식이 맛있기를 기대하는 건 사치였다. 일단 식당에 우리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구글 평점에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우리가 5명이어서 자리 잡기가 더 힘들긴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로마를 다니는 내내 느꼈다. 이탈리아어 사이에 섞여 들리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지나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좁은 로마를 다녔다. 로마에서 가장 강하게 남은 기억은 무엇보다도 사람이었다. 어쩌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름을 알고 있는 도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이는 도시, 그래서 아직까지도 세상 모든 길의 끝인 도시, 그래, 로마는 그런 도시 아니던가.




   누가 그랬나. 이탈리아는 열정적인 사랑의 에너지가 넘치는 나라라고. 와서 보니 이탈리아는 사랑에 앞서 사람들로 넘쳤다. 아, 혹시 그런 건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사랑이 담기지 못하고 밖으로 넘친 거였나.  


   피렌체에서 보내게 될 한 달은 넘치는 사랑을 느껴봐야겠다. 길을 걸을 때마다 아내의 손을 꼭 잡아야겠다. 수많은 사람들의 파도 속에서 아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시도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겠다. 10년 전 연애할 때처럼, 피렌체에서 다시 만난 아오이를 바라보는 준세이의 눈빛처럼, 자칫하면 미아가 될지도 모를 아내를 정성껏 바라봐야겠다. 그렇게 넘칠 수밖에 없는 사랑을 느껴봐야겠다.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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