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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Jul 06. 2020

경제학자들은 언제부터 도덕을 무시하게 되었는가?

[도덕경제학], 새뮤얼 보울스, 1/4

[도덕경제학] 리뷰:

(1/4) 경제학자들은 언제부터 도덕을 무시하게 되었는가?

(2/4) 물질적 인센티브가 평범한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들 수 있다
(3/4) 상을 주는 것이 사람들의 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

(4/4) 사람들의 행동은 프로그램화할 수 없다


30년 넘게 인간의 이타성을 연구해 온 경제학자 Samuel Bowles의 책. 새로운 생각들로 밀도가 가득하다. 욕심을 부리다 보니 책 대부분에 밑줄을 그어놨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최소 3편, 아마도 4편으로 나눠서 쓰게 될 예정이다.


아주 간단한 소감: "경제학이 도덕을 되찾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강렬하다. 아마도 경제위기-코로나 이후 새로운 시대에 주목받는 메세지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글 자체의 짜임새는 많이 아쉬움이 남는다. 편집자가 조금만 더 저자를 몰아붙였다면, 더 간결하고 전달력 강한 책이 탄생했을 듯.


책에서 새롭게 공부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천천히 하나씩 기록해보자. 



하이파 어린이집 실험은 Homo economicus 가정을 여러 지점에서 반박한다.


경제학 원론을 들으면 꼭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이 있다. "경제학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만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 이 경제적 인간, Homo Economicus 가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 이론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20세기 중반부터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선두주자로 부상한 후에는, 이기적 인간을 바탕으로 한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법학, 정치학 등의 학문, 더 나아가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Binyamin Appelbaum은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보고 20세기 후반은 "경제학자들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Samuel Bowles는 이 책에서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바는 법을 설계하거나 정책을 수립하거나 사업체를 조직하려고 할 때,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시민, 피고용인, 학생, 채무자의 행위 모델로 삼는 것은 결코 신중한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1장)


이스라엘 하이파Haifa의 어린이집 여섯 곳에서,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제 때 집으로 데려가지 않는 경우 벌금을 걷기로 했다. 그런데, 벌금을 부과하니 오히려 지각하는 부모의 숫자가 증가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벌금 부과를 중지한 다음에도 지각하는 부모의 숫자는 감소하지 않았다. 이 하이파 어린이집 이야기는 이미 [괴짜경제학] 등의 책에서도 언급이 된 유명한 실험이다.


경제학적 사고에 물들어있는 현대인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은 벌금제도가 있으면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다”라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 하이파 어린이집 이야기에서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여러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실험결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일반 경제학의 가정을 부정한다:


1. 인간에게는 사회를 고려하는 습성이 내재되어 있다: 만약 인간이 이기적이기만한 악마라면, 벌금을 부과하기 전에는 학부모의 100%가 지각했을 것이다. 

2. 벌금을 부과하니 “이타적 고려”가 사라졌다: 벌금을 냈을 때 지각하는 학부모가 오히려 늘었다. 

3. 사회 제도에 의해 사람들이 성향이 변한다: 벌금부과를 중지한 다음에도, 여전히 지각하는 학부모가 많았다는 건, 벌금부과 이전과 비교해서 사람들의 성향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벌금정책은 어떨 때 효과적이고 어떨 때 그렇지 않은가? 정책입안자가 새롭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는가? 저자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수많은 reference를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간다.




'이기적 인간'을 가정하는 경향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만 추구하며, 정부-시장의 역할은 이들의 행동이 좋은 사회적 결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라는 이상한 생각은 왜,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중세 시대까지의 사상가들에게서는 이러한 경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근대의 장 자크 루소와 에드먼드 버크로 이어지는 사상가들은  “시민적 덕성을 고양하는 것이 좋은 정부의 지표이자 필수적인 기초” 라고 생각했다 (2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 에서 “입법자들은 습관을 심어줌으로써 사람들을 좋은 시민으로 만든다. 좋은 법이 나쁜 법과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다”라고 적고 있다.  


그들의 생각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좋은 사회는 좋은 사람들에게서 나오므로, 정부는 좋은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생각 하나가 등장한다. “악한 사람들도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이 굳이 착할 필요는 없다. “좋은 제도”는 마냥 착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사회에 보탬이 되게끔 만들 수 있다. 이 생각은 16세기 피렌체,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한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사회의 시스템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현대 과학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한 사회 거버넌스의 질은 정치체제의 “창발적 속성”이다. 


>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20세기 경제학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이런 사고의 기원을 16세기 피렌체에서 찾는다. “경제주의economism는 발전한 마키아벨리즘이다.” (2장)


>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해야 할 일차적 임무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기질”에 의해 동기 부여된 시민들이 마치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로마사 논고>에서 공화국이 잘 통치되도록 하는 것은 시민들의 도덕이 아니라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정치가의 능력이라고 명백히 밝혔다. 그는 이탈리아와 비교할 때 스페인과 프랑스가 더 잘 통치되는 이유는 “그 나라 사람들이 더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그만큼 선하지는 않다), 그 왕국의 질서가 이뤄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2장)


18세기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도 비슷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무리 중에서 가장 악한 놈마저도 공공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역시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켜 "사익의 추구만을 행하는 부정직한 사람들을 좋은 사회적 결과로 이끄는 것이 정부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 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부정직한 사람들을 좋은 사회적 결과로 이끄는 데 정부가 필요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장이 존재하면, 구매자 간 경쟁과 판매자간 경쟁이 발생하고, 이 경쟁의 결과는 사회적으로 이롭다. 



20세기 경제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메세지를 증폭시켜 “도덕도 정부도 필요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마키아벨리는 “사람들이 꼭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고 했고, 아담 스미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정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20세기 경제학자들의 Homo Economicus에 대한 신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인간이 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사회시스템은 인간이 악마처럼 행동하는 최악의 상황에도 잘 작동해야 한다"에 더 가까웠다.


> 마키아벨리가 우려했던 것은 시민적 덕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었지, 시민적 덕성이 없다거나 그것이 부적절하다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정책패러다임의 기초를 닦은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조차 어떠한 경제 혹은 사회 시스템도 시민적 덕성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맨더빌조차 독자들에게 이 점을 재차 강조했다. “나는 규모가 크든 작든 모든 사회에서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 모든 구성원의 의무이며, 미덕은 권장되어야 하고, 악던은 허용되지 말아야 하며, 법은 준수되어야 하고, 법을 위반한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점을 제1의 원리로 제시한다. 
> 이와 유사하게 스미스도 자신이 지지한 “자연적 자유”가 도덕에 의해 제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해를 우구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그의 유명한 문장 바로 앞에는 “정의의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2장)


이를 뒤따랐던 19세기 고전학파-신고전학파 경제학자 (존 스뉴어트 밀, 프랜시스 에지워스 등) 들도 “비도덕적 인간”을 “유용한 가정”, 혹은 최악의 경우로 상정했을 뿐,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부정하거나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20세기 들어 경제학 이론들이 인간의 도덕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게 된 데에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한 몫 했던 것 같다.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와 제라르 드브뢰Derard Debreu의 ‘후생경제학 제 1정리’는 수학적으로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야기를 완벽하게 증명해내었다. 후생경제학 제1정리에 의하면 “완전경쟁시장”하에서는 경쟁의 결과가 사회적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사실 후생경제학 제1정리에서 “완전경쟁시장”의 조건이 어떠한지, 또 “가장 좋은”결과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가 그 증명의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설명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학적 증명이 지식인들로 하여금 “도덕을 무시해도 좋다”라는 컨센서스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1984년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가 드브뢰 인터뷰 기사에 단 헤드라인은 “자유주의가 우월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입증하다”였다. (6장)


> 하이에크와 뷰캐넌이 암시했듯 이런 세계에서는 좋은 거버넌스를 위해 굳이 도덕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후생경제학 제1정리’는 사람들의 선호와 상관없이 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완전히 도덕에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더라도 참이다…..철학자 데이비드 고티에David Gauthier는 뷰캐넌의 무관심을 일반화하면서 시장을 “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영역”으로 규정했다. 그는 “도덕은 시장실패로부터 발생한다. (…) 완전경쟁이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시장의 상호작용에서는 도덕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탐욕은 이기심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되고 도덕적 죄악으로부터 사면되었으며, 아이스크림 취향처럼 일종의 동기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2장)



무엇이 문제인가? 


자, 무엇이 문제인가?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도덕”과 “정부”가 필요없다면,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들의 주장은 현실세계와 너무나도 다르다. 인간은 때로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고 하지만, 많은 경우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기도 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경제학의 가정은 데이터와 맞지 않는다.


더 중요한 사실: 인간이 도덕적이지 않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내리는 정책은 인간의 이기심을 강화시켜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새로운 메세지가 바로 이것이다. 왜 그런지를 다음 편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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