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은 '루틴이 깨지면 안돼'였다. 그녀는 아이젠하워의 매트릭스라는 것에 집착했다. 그래야 하루를 48처럼 쓸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말을 하면서 말이다. 1사분면에는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일, 2사분면에는 긴급하진 않지만 중요한 일, 3사분면에는 중요하지만 긴급하진 않은 일, 4사분면에는 긴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 나는 아마도 3~4분면 어딘가에 놓여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부터 그러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지금 2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밥을 조금 빨리 먹고 간단하게 커피를 먹자고 했다. 덧붙여 2시간 뒤에는 어느정도 서로에 대한 판가름이 날테니 후일을 도모하든, 끝매듭을 짓든 하자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끌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충격적이었고, 궁금했고, 게다가 그녀는 꽤 매혹적이었다. 내게 주어진 2시간이 마치 면접 시간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후일을 도모하자는 말이 듣고 싶어 2시간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녀는 흡족했는지, '다음엔 어디서 뵐까요?'라고 내게 먼저 물었다.
그렇게 하나 둘 덧붙여진 시간들이 우리를 연인으로 만들었고, 여전히 나는 그녀의 3,4분면에 머물고 있지만 꽤 행복하다. 그래도 그녀의 견고한 루틴 속에 나라는 블럭이 끼어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다.
틈의 틈을 내어 그녀는 나와 전시회를 보러가주었다. 난 사실 미술 감상엔 흥미가 없지만, 그녀가 허튼 시간을 보내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매번 만날 때마다 유익한 콘텐츠를 준비하곤 한다. 마치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매번 또렷한 명분이 필요한 것만 같다.
지루한 서양미술, 내눈에 다 거기서 거기 같아보이는 유화들이 줄지어 결려있다. 하품을 나오는 것을 꾹 참고,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이 그림을 이해한다는 듯 같잖은 척을 했다. 중간중간 곁눈질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내 예상대로였다. 전시회에 시간을 쓴다는데에 아주 만족해했고, 평소 바삐 움직이던 그녀가 아주 느리게, 안온하게, 여유있게 걸어다녔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 느렸다. 내가 본 모습 중에 가장 느렸다.
그녀는 그림을 감상하느라 나의 존재를 잊은 듯 했다. 혼자 보고 싶은 방향으로 내게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홀린 듯 걸어다녔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감상한다. 그녀가 한 그림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한참을 그 그림을 바라보고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동공의 움직임마저 멈춘 듯한 그녀의 깊은 응시에 나도 그 그림을 바라본다. 역시 내눈엔 다 비슷해보이는 작품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 그림을 정말 오래토록 바라봤다. 나는 그런 그녀를 정말 오래토록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나는 깜짝놀라 소스라쳤다. 그녀를 괜히 훔쳐보다 걸린 느낌이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동공은 한껏 깊어지고, 부드러워져 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보던 그림을 등지고 그녀가 멀리서 전시회관을 과감히 가로질러 내게 걸어온다. 내 눈을 끝까지 마주친 채로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