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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Apr 07. 2023

한국에서 온 소포


새해가 되면 여김 없이 우체국택배의 로고가 박힌 박스가 집으로 배달된다.

소포를 보낼 건데 뭐가 필요하냐는 질문이나, 보냈으니 잘 챙겨 받으라는 생색이 조금 섞인 메시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나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도 보낸 이를 알 수 있다.



처음으로 엄마의 소포를 받은 건 뉴욕에 온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다.


한국에서 올 때 가장 큰 이민가방 두 개를 들고 왔는데, 딱히 필요할지 몰라 가지고 오지 못한 옷들이 제법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생각보다 추웠고, 새로 옷을 살 경제적인 여유도 없어서 엄마에게 남겨둔 옷들 중 입을만한 것이 있으면 좀 보내달라고 했다.

이 주 정도가 지났을까, 반가운 우체국 택배의 로고가 박힌 박스가 도착했다. 박스 안에는 하나하나 깨끗이 빨아 정성스럽게 겐 옷들이 들어있었다. 보풀이 제법 있었던 스웨터는 새로 산 것처럼 부드러웠고, 묵은 때가 묻어있던 코트는 옅은 드라이클리닝 냄새를 풍기며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저 입던 옷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엄마는 귀한 선물을 만들어 보냈다. 엄마는 박스에 옷을 넣는 것 하나에도 가장 숭고한 정성을 담는 사람이다.


옷가지 사이에 어디서 본 듯싶은 갈색봉투 하나가 놓여있다.

열어보니 달력이 들어있다. 그것도 두 개나.

한 면에는 필터처리 없이 다채로운 색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사진이, 그 뒷면에는 한 달 30일 (혹은 31일)의 양력날과 음력날이 함께 빼곡히 적혀있는, 토종음식점 혹은 고깃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의 월력이다.


왜 하필 달력을 보냈을까, 두 개나? 달력은 여기에도 많은데.


달력의 유래를 찾아보면 처음 도입된 이유는 농사를 짓거나 세금을 걷기 위한 용도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달의 개념이 없이는 씨를 언제 뿌릴지 수확을 언제 할지 알기 어려울 테니까. 그 유래가 어찌 되었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툭툭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축복이다. 한 달 한 달 넘어가는 달력을 볼 때는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고, 한 해를 마무리할 때가 되면 계획만 하고 실행하지 못한 일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하지만 1월 1일이 되는 순간 마법이 펼쳐진다.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엄마의 소포에 담긴 달력은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닐까. 지난해 일어났던 일들에 연연하지 말거라, 올해 일어날 좋은 일들만 생각하거라.


그럼 왜 두 개나 필요할까? 돌아온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왼쪽에는 지금 월을, 오른쪽에는 그다음 월을 걸어놓으면 두 월을 동시에 볼 수 있어 좋아.‘


그 뒤로 매 해 연초가 되면 담긴 달력이 담긴 소포를 받는다.



소포 속 달력 말고도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아이템은 바로 김이다. 올해도 역시나 박스의 절반 정도를 김이 차지하고 있다.

작년 소포에 처음으로 등장한 김은 그 큰 부피와 양에 ‘헉’ 소리를 나게 했다. 룸메이트와 좁은 부엌을 나눠 쓰던 때라 창고공간이 부족해 신발장에 넣어두어야 했을 만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서울 집 부엌 창고는 양파나 감자가 떨어지는 날은 있어도, 김이 떨어지는 날은 없었다.

화장실 휴지나 K95 마스크를 사재기하듯이, 엄마는 네 식구가 몇 달 먹고도 남을만한 김을 항상 톳으로 쟁여두었다.

참기름 소금 처리가 되지 않은 생김을 직접 굽고,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쳐서 타파통에 담아두면 우리 식구들은 그 통을 몇 끼만에 비워냈다.


여기서는 엄마가 구워서 잘라주지 않으니 매 끼 먹게 되지 않는다. 미국인 남자친구는 왜 내가 한국 음식을 먹을 때면 빼놓지 않고 김을 먹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김은 오롯이 내 몫이다.

그래도 작년에 받은 김이 아직도 남았다고, 한국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굳이 말하지 않는다.

어떤 선물은 사실 받는 이가 아닌 주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임을 이제 알 때가 되었으니까. 덤으로 엄마가 고른 김은 유독 맛있기도 하다.



올해는 생각지 못했던 선물이 들어있었다. 도토리가루다.

아빠가 가꾸는 농장에는 커다란 도토리나무가 있다. 매 년 큰 소쿠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도토리가 열리는데, 아빠는 그 도토리를 하나하나 주워서 말린 다음 그걸로 도토리 가루를 만든다.

가끔 돈을 받고 팔기도 할 정도로 나름 주변에서 인기가 있는 물건인데, 먼 길을 여행해 이곳까지 와주다니, 참 고맙다.


그 외에도 한방 감기약, 쌍화탕, 말린 채소 등 한국집의 부엌을 연상시키는 아이템들이 잔뜩 들어있다.


소포는 보낸 이의 사랑을 전한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

올해는 나도 부모님과 한국 친구들에게 소포를 보내야겠다.


오래오래 엄마의 소포를 받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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