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일을 한 지 1년이 되어 재계약을 위해 신체검사를 다시 받아야 했는데 그동안 시력이 더 떨어져 통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전처럼 의사 소견서를 받아 제출해 볼까 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능력보다 시력이 0.3 이상이라고 말해주는 종이 쪼가리 하나가 더 중요한 현실이 괜히 더럽고 치사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시력 저하로 인해 모니터의 커서 표시가 잘 보이지 않는 등 컴퓨터 사용이 불편해진 것도 스트레스가 되어 이제 그만 이 일을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장애판정을 받게 된 것은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친구는 내 시력이 장애판정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을 충족하고, 판정을 받아놓으면 앞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한 달에 5만원 정도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이 큰 혜택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별 생각없이 장애판정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장애인이 된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곧 장애판정을 받았지만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내가 생각하는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장애인은 물리적으로 '티'가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선글라스를 끼고 흰 지팡이를 쓰며 점자로 글자를 읽는 눈이 전혀 안 보이는 사람,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나는 느리지만 인쇄된 활자를 볼 수 있었고, 주간에 선글라스를 쓰긴 했지만 흰 지팡이 없이 잘 걸어 다녔다. 활자를 내가 보이는 글씨체와 크기로 바꾸고, 너무 밝은 주간에는 약속을 잡지 않거나 초행길을 가지 않으면 되었다. '약시'나 '색약'이라고 잘만 가리면 내 장애는 꽤 잘 숨길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6년 9월, 나는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연기에 대해 심도 있게 배우며 좋은 배우로 성장할 나날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대학원 생활은 눈으로 인한 불편함을 여실히 느끼게 한 시간이었다.
ppt 화면과 유인물이 잘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학교에서 동기들과 이동하는 것이었다. 도서관, 식당, 카페 등 이동이 잦고 야외 수업도 있었다. 나는 특히 주간에 빛 조절이 안 되어 눈부심을 극도로 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야외에서 이동하는 모든 순간이 곤욕이었다.
입학 후 얼마 뒤 전공 수업시간에 돌아가면서 유인물을 읽는데 강의실이 극장이라 조금 어두웠고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결국 읽지 못했고 그때 처음으로 내 입에서 ‘시각장애인’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제서야 동기들은 나를 조금 이해하는 듯했다. 분명 자신을 봤는데도 그냥 지나갈 때가 있었고, 방금까지 과방에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강의실 앞에서 다시 깍듯이 인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라섹이나 라식을 해서 꼭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구나.'라고 짐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나는 거듭 나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실내에 있을 때 비교적 장애가 티나지 않아서였을까? 동기들은 내가 시각장애인임을 자주 잊어버리는 듯했다.
주간에 익숙하지 않은 길을 친구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다른 친구가 다가오면서 "야, 너 장애인 같다."라고 말했다. "응, 나 시각장애인이잖아."라는 나의 대답에 친구는 민망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시각장애인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낯설었고 그 말을 듣는 상대방도 그 상황이 익숙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