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용서할 줄 아는가?
‘용서’라는 말은 자주 쓰지도 않지만, 막상 입에 올리려면 조금 조심스러워집니다. 저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 단어 속에는 왠지 모를 우월감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내가 뭔데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누군가와 큰 갈등을 겪은 경험이 많지 않기에 ‘용서’라는 단어를 써야 할 일이 자주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간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겪는 경우가 참 많더군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아, 용서라는 마음도 참 필요하겠구나, 하고요.
한 번은 시어머님 댁에 놀러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 저희 둘째 아이가 어머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왜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같이 안 살아요?”
사실, 아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시부모님은 이혼하셨습니다. 아이 입장에선 궁금할 수밖에 없었겠죠. 어머님은 아이 눈높이에 맞춰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랑 싸워서 사이가 안 좋아서 같이 안 살아.”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럼 할머니가 먼저 사과해요. 할아버지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하면 되잖아요.”
어머님은 그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그냥 웃기만 하셨다고 하더군요. 저희 시댁은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스타일'이라고까지는 아니지만, 이혼했다고 해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얼굴 보기를 꺼리지는 않습니다. 물론 자식들 때문이겠지만, 집안 행사나 가족여행 때 종종 얼굴을 마주하고, 다 같이 사진도 찍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 세대에서 이혼하면 서로를 완전히 단절하고 등 돌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희 시부모님은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희 아이들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보니, 두 분이 따로 사는 이유가 궁금했나 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었죠. 그날 이후로도 아이는 어머님 댁에 갈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손잡고 화해해요.”
난처해하실까 싶어 아이를 말리려 했지만, 의외로 어머님의 표정이 나쁘지 않아 그냥 두었습니다. 사실은, 말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이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어쩌면, 저 역시도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부모님 두 분 다 저에게 깊은 이야기를 하신 적은 없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점은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손주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언젠가 ‘사과’와 ‘용서’라는 마음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사과, 용서, 화해. 이 단어들은 결국 다 연결된 마음이지요.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하고, 스스로 먼저 마음을 먹어야 하겠지만요.
저는 이제 ‘용서’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내 잘못이 아닌 타인의 행동으로 상처받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상처를 붙잡고 고통을 되새기며 타인을 비난하며 살아가는 건, 결국 나 자신에게도 독이 되는 일이더라고요.
용서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생각보다 단순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용서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순간, 마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듯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음이 아닌, 나만이 아는 평화로운 감정이죠.
물론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고, 상처의 깊이도 다르기에 제가 감히 "용서하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용서’라는 단어의 깊은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 먼저 제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용히 상대방을 용서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마음속 갈등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풀려나갑니다.
용서는, 결국 나 자신을 치유하는 강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