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1989년 전교조 서울시지부 결성식 때의 일이다. 낙성대 산길을 헤매며 전교조 지도부 탈출이라는 모험을 마친 나는 집에 가자마자 지쳐 떨어져 늦잠을잤다.
옷이 엉망으로 찢어가지고 들어왔으니 안 그래도 아들이 ‘데모한다’고 걱정이 태산인 부모님의 온갖 질책을 받아야 했지만 거의 혼절하기 직전인 내 귀에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늦잠을 푹 자고 느즈막이 학교에 가 보니 아주 흉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 날 밤, 낙성대 산길을 탔던 나와 동료들은 그야 말로 체포를 각오하고 위험한 임무를 자원한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위험한 일은 우리가 깜깜한 산길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학교에서 일어났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며,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외쳤다고 알려진 이 말이 떠 올랐다.
그 날 밤 낙성대 야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우리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휴대전화는 ‘스타트렉’ 같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오던 시절이었다. 요즘 세대는 구경도 못했을 공중전화가 유일한 통신 수단이던 시절이었다.
결과적으로 위험한 일을 자원했기에, 즉 죽고자 했기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오히려 화를 면한 것이었다. 그 전말은 이랬다.
서울대학교를 원천봉쇄했던 경찰이 그야 말로 “빡이 돌았다.”고 한다. 서울 지부 결성식 장소 원천봉쇄를 두번이나 허탕 쳤고, 결국 결성식이 열리는 것을 막지 못했고, 학생들의 저지로 교내 진입도 못하고, 체포영장도 집행하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강수를 두었다.
“체포영장 나온 지도부들을 찾아야 하니 아무도 학교 밖으로 못 나간다.”
이렇게 선포한 것이다. 어차피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교사들이니 집회 마쳤으면 집에 갈 것이고, 그럼 교문을 틀어막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검문해서 지도부를 색출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순순히 받아들일 전교조와 대학생들이 아니었다. 교문을 봉쇄하는 경찰들을 강행 돌파하기로 했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과 전경들 사이에서 상당히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고, 많이 다쳤다고 했다.
그 중 가장 큰 부상자는 이 아수라장 가운데 있던 우리 과 선배 누나였다. 경찰에게 심하게 얻어 맞아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다고 했다.
나는 학교 가기 전에 이미 그 누나가 심하게 다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던 그 누나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다음날 한겨레 신문 표지에 떡 하니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기자는 그 누나가 학생이 아니라 서울지부 선생님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기사 타이틀이 이랬다.
“오늘날 이 땅의 매 맞는 선생님”
참고로 그 누나는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었다.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름은 꽤 알려졌다. 뭔가 유명한 상도 받았다. 이 정도쯤 되면 누군지 감이 오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규탄집회가 조직되었다. 사범대 학생회 이름으로 급히 여러 단과대학 학생회에 통문을 돌렸다. 말하자면 번개 투쟁을 소집한 것이다. 하지만 어제 큰 싸움을 하고 난 다음이라 웬만한 싸움꾼들은 다 자취방에서 뻗어 있었고, 학교에 싸울만한 학생들이 많이 나와있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단과 대학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이고 저런.”정도의 반응. 운동권이 교육에 별로 관심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국 겨우 100명 정도가 모였다. 다른 단대는 말할 것도 없이 사범대학에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남학생은 10여명 정도.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단 이렇게 모였으니 행진을 해야지.
그 100여명 중 그래도 남자랍시고 10여명이 손에 손에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대열을 보호한다며 앞장을 섰다. 그 뒤를 따라 100여명의 여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폭력경찰 처단하라.”
“폭력경찰 사과하라.”
그렇게 사범대학 10동 옆의 일명 페다고지 광장에서부터 10여분을 걸어 후생관까지 내려가 다시 10여분을 행진하여 교문까지 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항의하고 따져야 할 상대가 안 보이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데모’를 하는데 왜 전경이 없냐고? 너무 수가 적다고 무시하는 걸까?
하긴 나 같아도 그러겠다 싶었다. 겨우 100여명이 초라하게 행진하고 있는데 그걸 구태여 병력 동원해서 막을 게 뭐 있는가? 전경 버스 기름 값이 다 아까울 일이다.
교문 앞에 갔더니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막지 않는다면 학교 밖으로 진출해서폭력경찰의 만행을 계속 규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잠시 회의를 한 뒤 교문 밖으로 나가 지구대가 있는 도림천 방향으로 계속 행진하기로 했다. 교문 앞으로 출동 안했다면 지구대에 짱박혀 있을 테니 그 앞에 가서 외치면 뭐라도 반응이 있겠지 싶었다.
그렇게 계속 행진했더니 전경들이 교문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삼성 고등학교 건너편에 벌떼같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100미터쯤 더 전진한 뒤 행진을 멈추었다.
전경이 없으면 싸움이 안되어서 문제지만 막상 나타나자 간이 오그라들었다. 병력은 한 눈에 봐도 우리보다 두배는 되어 보였다. 100여명의 미니 시위대쯤은 단번에 보쌈해서 “어어.” 하는 사이에 몽땅 닭장차에 잡아넣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참석한 학과의 과회장들이 지도부 회의를 열었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전진이냐, 후퇴냐?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 나만 무서운 게 아니라 다들 무서웠을 것이다. 무기(?)를 점검해 보니 쇠파이프 4정, 각목 5개가 전부였다. 짱돌도 없고, 화염병도 없었다. 주로 여학생으로 이루어진 100명 정도의 대열. 만약 전경들이 와 하고 달려오면 그냥 박살 나는 거다. 더 나쁜 것은 마침 그 순간 쇠 파이프니 각목이니 들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폭력시위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것이다.
재판과 처벌이 문제가 아니다. 당시 전경들은 현행범을 검찰에 넘기고 기소하고 그런 귀찮은 짓 안 했다. 그냥 현장에서 집단 구타했다. 그러니 나는 안 그래도 전날 밤 낙성대 야간 등산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몸 위에 전경들의 집단구타까지 뒤집어 쓸 운명이 되었다. 그래도 전진으로 결정이 나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과회장들의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나는 답답하고 초조했다. 투쟁의 열기, 싸우고 싶은 열망 때문에? 전혀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우습지만, 오줌이 마려웠다. 방광이 점점 수용 한계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연히 교문 밖 100미터 지점이라 화장실 따위는 없었고, 가장 가까운 화장실은 다시 뒤로 돌아가서 10분을 달려 후생관까지 가야 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노상 방뇨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열의 대부분이 여학생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좀 괴짜이고 파격적인 행동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근본은 신사다. 하물며 변태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노상방뇨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하면 대열에서 멀리 떨어진 곳, 여학생들이 내가 뭐 하는지 알 수 없는 곳에 가서 해결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대열의 뒤로 갈 수는 없었다. 그러면 마치 투쟁 포기하고 도망가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그건 영 모양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대열 앞으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대열 앞쪽으로 가면 전경들이 눈을 부라리고 대오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모양 빠지는 것 보다는 전경 가까운 곳에 가서 해결하는 쪽이 나았다. 이런 생각을 한 것 보면 확실히 그때 나는 젊었다. 그저 그 놈들이 도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일단 쇠파이프는 내려 놓았다. 그리고 대열 앞으로 전경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당시 여학생들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아, 저 오빠 어쩌려고 그래?”
대략 이런 분위기였다고 한다. 내가 무모하게 혼자 전경들에게 달려들어서 몰매 맞고, 또 그게 전경들을 자극하여 나머지 100여명도 한꺼번에 쌈 싸먹힐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전경들이 방패를 들고 선 팔랑크스가 아니라 그 앞에서 도도히 흘러가고 있는 도림천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경 팔랑크스와 10미터 거리에 있는 지점, 그리고 학생들 대열과는 90미터 떨어져 내 모습이 구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점인 도림천 다리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개천을 향해 시원하게 나의 문제를 해소했다.
90미터 후방에 있는 학우들 눈에는 내가 전경 바로 앞에까지 가서 폼잡고 서 있는 것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10미터 전방에 있는 전경들에게는 내가 뭐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전경들 중에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녀석들이 나왔다. 나도 웃었다. 전경과는 무관했다. 다만 너무 시원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껴서 웃었을 뿐이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여유롭게 전경들을 등뒤에 두고 대열을 향해 저벅저벅 돌아왔다. 저놈들 중 몇명이 뛰어와서 뒷덜미를 채갈까봐 등골이 서늘했지만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저벅저벅 걸었다. 마침내 내가 대열에 합류하자 학우들이 밝은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철수했다. 나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우리의 항의가 충분이 전달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긴 했다. 보통 반문화 운동하는 사람들은 조롱과 항의의 뜻으로 엉덩이를 깐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 역시 전경들 앞에서 좀 더 격렬한 항의와 조롱의 뜻을 표현한 셈이다. 물론 전경들은 그냥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이랬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