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35년 03 싹수부터 문제 교생

by 권재원

싹수부터 문제 교생


1990년, 나는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사범대 학생이라면 4학년이 되면 누구나 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 바로 교생실습이다. 이 때는 이미 교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힌 다음이었기 때문에 나름 진지하게 교생실습을 준비했다.

내가 교생실습을 간 학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 줄여서 사대부고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울대학에는 부속 초등학교, 부속 중학교, 부속 여자 중학교, 부속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중학교에 제2외국어 과목이 없던 시절이라 독어교육과인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는 부속 고등학교뿐이었다. 사회교육을 부전공으로 하고 있었고 애초에 발령도 사회과로 날 예정이었지만, 교생실습은 주전공으로 가야 했다.

교생실습 첫날 프로그램에 사대부고 교장이 교생들을 모두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실습 첫날 4교시로 잡혀 있었다. 교생뿐 아니라 각 교과 담당 지도교사도 모두 임장했다. 굉장히 거만하게 생긴 노인이 생긴 것 보다도 더 거만한 자세로 앞에 나와 그 자세보다도 더 거만한 말투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설의 내용은 그 거만함에 어울리지 않는 굉장히 빈약하고 형편없는 것이었다. 내면의 앙상함과 교양의 부박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출신 교장이라는 어이없는 오만함을 정제 없이 마구 분출하는 그런 연설이었는데, 인상적인 문장이 하나도 없어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는다.

한 두 마디 듣고 바로 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견적이 나왔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준비해 간 다른 책을 읽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4교시 끝 종이 쳤는데도 불구하고 저 교장이 말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뭐 좀 봐주자. 끝 종 치고 조금 더 수업하는 교사들도 있으니까.이렇게 생각하고 계속 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저 교장은 1분, 2분 정도가 아니라 5분 10분이 지나도 계속 그 앙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무게를 잡고 있었다. 술 취한 것도 아닌데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했던 이야기 또또 하고.

4교시가 끝났으니 점심시간 아닌가? 교생은 물론 임장한 지도교사들까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교장이면 다른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식사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단 말인가? 반감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시는 급식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물론 나도 가방에 도시락이 있었다. 교장의 연설이 계속되고 나의 황금 같은 점심시간이 1/3쯤 지나가는 시점이 되자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당당하게 도시락을 꺼내어 올려놓고 먹기 시작했다.

순간 지도교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앞에서는 교장이 계속 떠들고 있고, 뒤에서는 새파란 교생이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전원 서울대 출신, 즉 모범생 출신인 사대부고 교사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교생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기 뒤에 교생. 지금 뭐하는 거요?”

교장이 연설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식사합니다.”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지금 그게 무슨 짓이요? 버릇없이?”

교장이 호통을 쳤다. 하지만 난 전혀 굽히지 않았다.

“아니 그럼 한 사람이 수십명의 식사시간을 마음대로 잘라먹는 것은 예의바른 행동입니까?”

지금 생각해도 틀린 말 하나 없다. 그러니 교장이 부들부들 떨수 밖에. 그렇게 한참 부들부들 떨던 교장이 하던 연설을 멈추고 씩씩거리며 교생실 밖으로 나갔다. 교생들 앞에서는 언제나 턱을 치켜들고 거만한 자세로 돌아다니던 실습주임 한 00이라는 선생이 낭패본 표정으로 두 손을 마주잡고 허리를 반쯤 숙인 채 내시걸음을 하며 교장을 따라 나갔다.

교생들은 일제히 해방감을 느끼는 밝은 표정으로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교생들이 도시락을 꺼내 먹는 순간 나는 이미 도시락을 다 먹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유시간을 누렸다.

이때 교내방송이 들려왔다.

"알립니다. 4교시가 늦게 끝났기 때문에 5교시는 10분 늦게 시작하고 5, 6교시는 5분씩 단축수업으로 운영합니다."

결국 교장 한 사람 때문에 스케쥴이 꼬인 사람에는 교생과 각 교과 지도교사들 뿐 아니라 이 학교 모든 학생들까지 포함되게 되었다. 사대 부고니 교생 스케쥴과 수업 시간이 같이 움직여야 하고, 교장이 교생 점심시간을 10분이나 가로챘으니 결국 학생들 수업 시간까지 변동이 생긴 것이다. 물론 학생들 입장에서야 점심시간이 10분 늘어서 즐거웠겠지만.

덕분에 첫날부터 좀 다른 의미에서 아주 보람찬 실습이 되었다. 한국 학교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 키워드는 계속 교장이라는 단어로 모였다. 그 교장이라는 모순의 핵심을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이 원칙에 따라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럴 경우 교장은 분노를 터뜨리거나 폭언을 퍼부을 수는 있어도 결국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 문제의식은 퇴직할때까지 계속 간직했다. 나는 퇴직하는 그 순간까지 ‘교장이 되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자기 욕망을 감추는 비겁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교장과 마주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제도가 바뀌지 않는한 교장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지 어떤 사람이 교장이냐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실습 첫날부터 문제 교생으로 찍혔다. 심지어 우리 학과 교수가 학교로 소환되어 오기도 했다. 그 교장 정말 뒤끝 하나 끝내주는 꼰대였다. 나 때문에 교수가 실습교에 불려와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뻔했다.

그렇다고 내 생각이 바뀌었느냐? 그럴 리가 없었다. 평소 학생에게 별무관심이던 교수가 불려와서 곤혹을 치른다 한들 내가 눈썹하나 까딱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각오만 다졌다. 그래 뭐 문제 교생으로 찍혔으니 실습 끝날 때까지 문제 교생의 위력을 보여 주어야지 뭐. 이런 식의. 이렇게 나는 교생 실습 첫날부터 파란만장한 교육경력을 시작했다.

이후에도 교생들은 학교측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첫번째 충돌은 실습록이었다. 교생은 매일 실습록을 작성하여 담당지도교사, 실습부장의 결재를 받았다. 실습록은 따로 정해져 있는 양식이 없다. 그냥 공책에 작성하여 도장만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범대 학생회는 이 실습록을 단체로 제작하여 교생들에게 배부하였다.

그런데 사대 부중, 부여중, 부고 등 부설 학교는 공통된 방침으로 학생회에서 단체 제작한 실습록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실습록 여백에 이런 저런 교육민주화와 관련된 문구가 인쇄된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측에서 실습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실습록이라는 양식이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교생들이 내돈 내고 마련한 실습록을 사용할 수 없다고 나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측은 학생회가 제작한 실습록을 사용할 경우 결재를 해 주지 않을 것이며 실습록 미제출로 처리하여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역시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논리라면 공책 색깔이 마음에 안들어도, 공책 표지 그림이 마음에 안들어도 결재를 거부할 수 있는 일이다.

나를 비롯한 교생들은 이런 부조리한 처사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학교에 가면 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리 저리 태클 걸린다는 것을 미리 학습한 아주 좋은 실습기간이 된 셈이었다.

교생들은 지도부를 구성하여 학교측에 대응하기로 하였다. 이 중 실습생 대표였던 지리과 학우, 부대표였던 국어과 학우, 그리고 내가 어찌어찌 지도부가 되어 선봉에 서게 되었다.

나는 당시 아무런 자격이 없었다. 과대표도 아니었고, 학생회 간부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사범대 학생회장 낙선자였다. 그런데 학생회장이 워낙 낙제를 많이 하여 4학년이 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래서 학생회장이 교생실습에 나오지 못했는데, 교생들은 무슨 근거인지 그렇다면 학생회장 낙선자인 내가 그 역할을 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지도부와 각 교과 대표 교생들이 모여서 여러차례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몇몇 교생이 학생회 실습록을 사용하다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면 실습생 전원이 학생회 제작 실습록을 사용하여 미제출 처리 당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결의를 다진 뒤 다음날 부터 바로 집단행동, 즉 투쟁으로 돌입했다.

우선 학생회 제작 실습록을 금지하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인지 학교측의 해명을 요구하는 그런 내용의 대자보를 작성하여 교생실 벽과 입구에 부착하였다. 다음은 결재를 해주든 안해주든 학생회가 준비한 실습록을 사용하여 계속 실습록을 작성하였다.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실습록 미제출이 6일이 넘어가면 실습 자체가 무효가 되어 유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학교측의 약점이 되었다. 실습생 몇 명만 학생회 실습록을 고집하면 그 몇 명만 유급시키면 되지만 실습생 전체가 유급되는 사태가 발생하면 오히려 학교측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사대부고는 교육청이 아니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소속이다. 그런데 사범대학 4학년 전체를 몽땅 유급시킨다? 이런 부담을 과연 소심한 교사들이 지고 싶었을까? 아무리 교장이 고집을 부리더라도?

하지만 교장은 고집을 부렸다. 절대 저 불온한 실습록을 허락할 수 없다고 버텼다. 교생들이 다시 모였다. 이제는 단체 실습록 제출 정도가 아니라 실습 거부라는 엄청난 강수를 두기로 했다. 말하자면 총파업을 결의한 것이다.

이를 위해 교생 총회를 열기로 했는데 하필 그 날이 5월 18일이었다. 그래서 기왕 모인 것 5.18 기념식을 겸하여 교생 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5.18 기념식을 교내에서 한다는 것 역시 소심한 교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다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6월 항쟁 이후라고는 해도 5.18의 주범 중 하나인 노태우가 대통령이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5.18이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희생자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그 몇년 뒤 김영삼 대통령때의 일이다.

5.18 기념식 만으로도 살 떨리는데, 교생들이 총파업을 결의하겠다고 나서니 사대부고 교사들은 간담이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당연히 실습주임, 담당계 선생들이 쫓아와 총회를 무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까 그 국어과 친구와 또 다른 남학생인 지구과학과 친구가 교사들이 교생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그들이 시간을 벌고 있는 동안 나는 빠르게 집회를 진행시켰다.

그렇게 5.18 기념식과 실습 거부 결의를 위한 교생총회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 교생실 문 밖에서는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실습주임과 담당교사의 목소리가 들렸고, 거기에 맞고함을 치는 국어과, 지학과 친구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그들의 저지선이 뚫렸고 실습주임과 담당교사가 교생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들의 입에서는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집회가 다 마무리된 다음이었다. 5.18은 기념되었고 총파업은 결의되었다.

문 밖을 보니 국어과, 지학과 두 친구의 꼴이 가관이었다. 교생 나온다고 특별히 갖춰 입었을 양복이 다 구겨지고 와이셔츠 단추가 뜯어져 있었다. 넥타이도 막 잡아당겨졌는지 상태가 엉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다 했기에 굳게 악수하고 서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폭풍같은 하루가 끝났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어떤 폭풍이 시작될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있는데, 같은 수업을 자주 들어 얼굴은 알지만 워낙 분위기가 달라서 별로 이야기는 나눠보지 못했던 불어과 여학생 세명이 다가오더니 매우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 싸인 좀 해 주세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싸인을 해 주었다. 운동권 생활 3년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상 실습 중단 사태가 발생했고, 이 소식은 사대부중, 사대부여중까지 전해져서 교생 전체가 실습을 중단하는 상황으로까지 번져나갔다.

교생들은 실습을 거부하고 교장실 앞 복도에 주욱 늘어 앉아 농성을 했다. 실습 담당 주임 교사의 그 거만한 포즈도 기가 팍 죽었다. 하지만 실습 담당계 교사의 기세는 여전했다.

“선배로서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계속 이런 식이면 실습 미이수 처리가 될 것이고, 졸업이 안됩니다.”

이렇게 말하며 실습 복귀를 종용했다. 하지만 실습생들은 요지부동, 굳건하게 대오를 유지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기자들이 찾아와서 취재를 했고, 뉴스에도 나갔다. 다행히 나는 선동에 나섰을 뿐 공식적으로는 교생 대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뷰 따위는 하지 않았고, 우리 부모님이 뒷목 잡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 분들은 아직도 내가 교생 학점이 D-라는 것을 모른다).

이쯤 되자 고래심줄 같던 그 교장이 갑자기 순한 고양이처럼 찌그러졌다. 심지어 사범대학 학장과 교수들이 단체로 진상 파악한다며 찾아왔다.

사대부고는 사범대 학장이 공립학교로 치면 교육감인 셈이기 때문에 학교측은 완전히 깨갱했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실습록을 사용할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투쟁의 댓가는 참혹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교생실습을 마쳤을 때 내가 받아 든 교생실습점수는 D- 였다. 교생 학점이 D-라니 믿기 어렵겠지만 학교측은 그렇게 옹졸하게 대응했다.

나는 재수강 따위는 하지 않고 저 학점을 그냥 확정짓고 졸업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대학 학부 성적증명서를 출력하면 교생실습이 D- 라고 당당하게 나온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게 A+보다 한 등급 위에 있는 학점으로 보였다.

그런데 D-가 오히려 다행이었다. F를 맞은 동료도 두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대표 교생과 부 대표 교생을 맡았던 지리과, 국어과 친구들이다. 그들은 F이고 나는 F가 아닌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 독일어 교과 담당 지도교사가 버텨준 덕분이 아니었을까?

공교롭게도 그 악질 실습주임과 담당교사가 모두 국어과였다. 그리고 지리과 담당교사는 교생들 편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치곤 했던 기회주의자였다. 나중에 다들 어느 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러니 두 친구에게 가혹한 보복이 가해질 때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것이다. 국어과는 오히려 자기가 앞장서서 F주자고 나섰을 것이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 실습 거부하며 무단 결근한 날짜는 모든 실습생이 동일했다. 그리고 우리 셋이 참관을 게을리하거나, 수업을 게을리 한적도 없다. 오직 하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 그 하나 때문에 F가 나오고 D- 가 나온 것이다. 요즘 같았으면 배점 근거 공개하라고 하며 법적 다툼까지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장차 전교조 교사가 되기 위한 실습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선배 교사들이 또 교육관료들이 얼마나 비굴한 족속들인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기 때문에 나는 D-로 만족하기로 했다. 참으로 대단한 교생 실습이었다.

“이번 교생실습의 소득은, 내가 왜 교사가 되면 안되는지 확실히 깨달은 것이야.”

지학과 친구가 마지막 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반대로 내가 왜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확인한 기간이었다. 저 비겁하고 무력한 선배교사들을 계몽하고 그들로부터 학생들을 구하자는 메시아적인 열망이 들끓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이 역시 잘못된 생각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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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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