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35년 1부 교사가 되기전에 1

선생 될 생각은 아니었는데

by 권재원

선생 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가 처음 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89년, 대학교 3학년때의일이다. 그럼 대학교 1학년, 2학년 때는? 전혀 생각 없었다. 합격선 맞춰 가다 보니 사범대학에 들어갔을 뿐, 교육에 뜻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정말 교육에 뜻이 있었다면 교육대학에 가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나는 초등 교사야 말로 진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선생 될 생각도 없으면서 사범대학에 가는 것이 1980년대에는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4년제 대학, 나아가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중요했지 학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명문대학이라면 아무 학과라도 붙여 놓고 보는 것이지, 전공이니 적성이니 하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대기업 신입 사원 채용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공, 학과보다 출신 학교를 먼저 봤다. 아버지 지인으로 당시 어느 대기업 임원이던 분이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업무야 일단 일 해 가면서 익히는 것이고, 중요한 건 명문대학의 클래스야. 명문대 출신은 전공이 뭐가 되었건 일단 업무 투입하면 알아서 다 익히더라고.”

기업이 그런 식이었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런 식이었다. 그러니 학생들 역시 학과, 전공, 적성, 진로 따지지 않고 일단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보자 식으로 대학 입학 원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적성과 전공에 맞춰 대학 서열을 낮추는 것 보다는 전공 불문하고 대학 서열을 높이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 선택이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사범대학이 바로 그런 학생들이 가는 곳이었다. 당시 교사의 사회적 지위와 평판은 -지금도 그리 높지는 않지만- 요즘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서울대학교의 여러 단과대학 중 사범대학은 농대를 제외하면 합격선이 가장 낮았다. 하지만 연세대 의대, 고려대 법대를 제외하면 다른 대학의 그 어느 학과보다 합격선이 높았다.

가령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 수학교육과 들어갈 성적이라면 서울대를 제외한 의과대학들을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연세대를 제외하면 넉넉하게. 사범대학에서 합격선이 가장 낮은 독어교육과, 불어교육과 들어갈 점수로도 연대 경영, 경제는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한 학생들 중, 적어도 남학생 중에서는 교사 되겠다며 들어오는 학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배치표 뒤지다 안전하게 합격하기 위해 흘러 들어왔을 뿐이다. 어차피 졸업하면 유학을 가거나, 고시를 치거나, 아니면 대기업에 입사할 생각들이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가?

당시 젊은이들의 교직 기피 현상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요즘과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정부가 젊은이의 교직 기피 현상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 우수한 젊은이를 교직으로 유인하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은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선생 할 젊은이 없으면 인공지능으로 대신하면 되지 뭐.” 이러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1980년대 당시 우수한 젊은이들을 교직으로 유인하려 실시한 정책들은 공정성을 중시하는 요즘 관점으로 보면 거의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특혜들이 많았다. 몇개만 예로 들어보겠다.


1. 등록금을 깎아주었다. 국립 사범대학과 교육대학은 안 그래도 국립대라 싼데, 거기서 절반을 더 깎았다. 반의 반값 등록금인 셈이다.

2. 무시험 임용을 보장했다. 각 광역 시도 소재 국립대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 졸업생은 해당 광역 시도 공립 학교 교사에 시험 없이 임용되었다. 서울 지역 공립학교는 초등은 서울 교대, 중등은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 경기-인천 지역 공립학교는 인천 교대(당시 경인 교대가 아니었다)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경기도와 인천에 국립대학이 없었다), 충청북도는 청주 교대와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원도는 춘천 교대와 강원 대학교 사범대학 졸업생을 시험없이 발령 내는 식이었다. 전국에서 학생을 모집하는 한국 교원대학교는 학생의 출신 고등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발령이 났다. 교대나 국립대 사대에 입학하면 반의 반값 등록금과 더불어 입학과 동시에 자동으로 취업을 보장받는 특혜를 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인책은 지방 국립대, 그리고 주로여학생들에게만 먹혔다. 지방 국립대는 일반 학과의 취업률이 낮았기 때문에 100% 취업이 보장되는 사범대가 다른 단과대 보다 합격선이 훨씬 높았다.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교사 임용 티오가 많은 지방대인 부산대, 경북대의 국어교육과, 수학교육과 합격선은 연대, 고대 중위권 학과와 맞먹었다.

하지만 이런 유인책들이 서울대 남학생들에는 잘 먹히지 않았다. 서울대는 사범대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과가 입학과 동시에 일류 기업 취직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울대 갈 실력이 되는 학생이라면 굳이 쥐꼬리 만한 월급에 사회적으로도 별로 평가받지 못하는 교직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게 여학생의 경우에는 비교적 잘 통했다. 1980년대는 “여자 일로는 그래도 선생이 최고다.” 이 따위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코 사회가 교직을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교사는 남자가 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남자가 교사하면 째째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선생질 한다.” 라는 식의 비칭이 아무 거부감 없이 사용되었다.

그나마 사범대학은 해당 전공을 공부해서 다른 분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등록금 싼 맛에 남학생들이 그럭저럭 들어왔다. 하지만 초등교사 외에는 다른 진로가 거의 없는 교육대학은 남학생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래서 반의 반값 등록금, 100% 취업 보장에 더해 정원의 30%는 무조건 남학생으로 선발하는 쿼터제까지 동원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군대까지 빼 주는 어마어마한 특혜 패키지를 쏟아 부어가며 남학생들을 유인했다.

나도 다른 학생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교육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단지 서울대학에서 이 학과, 저 학과 합격선 맞추다 보니 사범대학으로 흘러 들어간 여러 학생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아니 국민학교 때부터 12년 내내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거의 세뇌하듯 들으며 자랐다. 신기한 것이 대학에 가서 무엇을 전공하고 어떤 공부를 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는 화학과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고, 중학교 때는 불문과에 가겠다고 했더니 그것도 그러라고 했다. 그냥 서울대면 되는 것이었고, 유학 갔다 와서 교수가 되면 되는 것이었다.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 어느 나라로 유학 갈 것인지, 그리하여 어느 학교 어떤 학과의 교수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부모님과 어른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공이야 일단 점수가 되는 대로 서울대학교의 아무 학과라도 들어가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나면 그 분야가 강한 나라로 유학 가서 그 전공 분야의 교수가 되면 되는 것이었고, 정 안되면 대기업 하나 골라서 취직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 학과라도 일단 서열이 높은 대학에 입학하고, 아무 회사라도 대기업 사원으로 취직하면 되는 그런 인생 코스였다. 특별히 법조인이 되거나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만 법대와 의예과를 맞춰 진학을 준비했을 뿐, 그 외에는 크게 문과와 이과라는 두 전공만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남학생들이 문과보다 이과를 선호했던 까닭도 이과가 서울대 정원이 더 많았고, 대기업에서도 더 많이 채용했기 때문이지 특별히 과학과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그나마 나는 다른 학생들 보다 비교적 소신이 있는 편이었다. 나는 법학, 정치, 외교, 경제, 경영 등 한 마디로 잘 팔리고 취직 잘되는 전공은 하고 싶지 않았다. 법학은 따분하고 경제, 경영은 금융인인 아버지를 보니 인생이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철학, 미학, 역사학, 한 마디로 인문학 쪽이 많이 끌렸다. 집안이 넉넉해서 구태여 대기업에 서둘러 취직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고상한 학문을 공부해서 교수가 되어 우아하게 살고 싶었다.

나는 공부 적당히 하고, 또 적당히 놀기도 하면서도 서울대학에서 문사철 계열 학과 들어갈 점수는 늘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3 생활도 남들만큼 고통스럽지 않았고, 고등학교 시절 적당한 일탈과 다양한 취미생활을 누리며 나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3년간 그렇게 성적을 잘 관리 잘 해놓고는 막상 본 게임인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망치고 말았다. 1986년 12월, 내가 받아 든 성적표에는 기대했던 점수보다 무려 10점이나 낮은 충격적인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학력고사를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 충격이 컸다. 나는 슬픔과 허망함에 잠겨 마지막 총정리를 제대로 못하고 조금 멍한 정신으로 시험을 쳐야 했고 그 댓가는 정확했다. 결국 뚝 떨어진 점수에 배치표를 맞추다 보다 보니 사범대학이 나왔다.

큰 거부감은 없었다. 부모님도 별 거부감 없었다. 어차피 교사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학부 졸업하면 유학 보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전공이 철학, 역사학에서 교육학으로 바뀐다 한들 무슨 상관일까? 와서 교대, 사대 교수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애초에 철학, 미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영문학, 독문학 이런 쪽을 뒤적뒤적하고 있었는데, 그냥 그 뒤에 교육자만 붙인 학과들이 사범대학에 있었다. 윤리교육과, 역사교육과, 사회교육과, 영어교육과, 독어교육과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내가 받아 든 점수는 연대 경영은 무난히 합격할 수 있는 점수였지만 사범대학의 저 학과들은 붙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점수였다.

결국 독어교육과에 원서를 냈다. 국어교육과, 영어교육과, 사회교육과, 역사교육과는 그 중에서도 합격선이 높아 불안했다. 독일 문화에 대한 선망도 작용했다. 당시 미국은 선진국이지만 좀 천한 나라, 졸부 나라, 영국, 프랑스, 독일(서독)이 진짜 선진국,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미국은 돈만 많은 양키, 진짜 양반은 유럽 이런 식의 생각. 독일 유학이라니, 생각만 해도 멋있게 느껴졌다.

나름 낮춰 지원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나마도 커트라인보다 2점 높게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다. 배치표에는 독어교육과가 내가 받은 점수 아래로 5-8점 여유 있는 것으로 나왔지만 결과는 어림도 없었다. 하마터면 이 마저도 떨어질 뻔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독어교육과에 합격했을 때 주변의 어른들 중 누구도 선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독어’교육과 이지 독어‘교육’ 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주로 듣는 덕담은 “독일 유학 가야지?” 였다.

내 생각도 같았다. 독일어 열심히 공부한 뒤 유학 가서 문학이나 예술철학 같은 것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우리나라 대학에 독문과가 무척 많았다. 교수 되는 것도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어쩌다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을까? 1980년대의 사회 분위기 탓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무렵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냥 집회, 시위 나가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운동권 지하 조직에 몸담게 된 것이다. 그때는 자발적으로 결의했다고 믿었지만, 돌아보면 20살 밖에 안된, 갓 소년 면한 나이에 온전한 자율이 있었을까? 분위기, 시대의 흐름에 휘말렸던 것이고 그것을 자율로 착각했을 것이다.

나는 운동권의 양대 정파 중 민족주의 성향의 NL이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의 PD 소속이었다. 이걸 풀어서 말하면 우리의 당면과제가 반미와 통일을 통한 외세로부터의 자주독립이 아니라 독점자본의 타도와 노동자 계급에 의한 인민민주주의 혁명(사회주의의 전단계)이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운동권이 되면서 나는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졌다. 나의 존재적 기반이 노동자 계급,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소 부르주아 상층이었기 때문이다. NL은 이런 고민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나름의 실천을 하면 되니까. 하지만 PD는 국립 서울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자가 되거나, 고차원의 혁명이론을 주창하는 혁명지도부가 되거나 하는 외에는 운동의 대의를 배신하지 않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만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했다. PD 진영의 지도부에 있었던 선배들도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회사원으로 덜컥덜컥 취직만 잘 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 회장 선거에 나왔던 선배도, 노동자 학생 연대투쟁 총책임자였던 선배도 졸업하자 바로 대기업, 심지어 대형 은행에 취업하여 독점자본의 이윤을 위해 일하고 노동자 계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었다.

혹은 변호사, 판사, 회계사 등으로 변신하는 PD선배들도 많았다. 심지어 노사관계법 위반 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온 노동운동가가 복학하고 졸업하더니 무려 국민은행(KB)에 입사했다. 나는 그런 선배들을 보면 놀랍기도 했지만 역겹기도 했다. 내 성격이 그렇다.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아니 이건 뭐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침투하여 체제를 뒤엎겠다는 뜻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 노동운동가는 훗날 지점장도 하고 아주 잘 살았다고 한다.

사범대학생으로서 나의 자괴감도 엄청났다. PD이론에 따르면 공교육 기관인 학교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도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교사란 어린 학생들에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지배체제의 일개 나사못, 톱니바퀴에 불과한 것이다.

폴 윌리스, 하그리브스, 보울즈와 진티스, 부르디외 등 이른바 진보적인 교육사회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교사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해체되어야 하는 곳이고 교사는 타도 내지는 무력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였다.

물론 교사의 처우는 대기업 사원보다 훨씬 열악했으니, 조금은 존재를 낮추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외치던 입장에서 그 역시 너무 안락한 지위라는 것, 기성 체제에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1989년,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전교조의 결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교조의 결성이 아니라 거기 가해진 정권의 모진 탄압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 전노협,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때도 이 정도의 탄압은 가해지지 않았다. 가령 민주노총에 가입한 노동자가 탈퇴하지 않는 한 모두 해고하라는 식의 탄압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전교조는 그랬다.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들은 탈퇴를 선언하지 않는한 모두 해임되었다.

이렇게 모진 탄압이 가해졌다는 것은 내 눈에는 전교조가 지배 체제에 큰 위협이 된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지배계급이 프롤레타리아, 산업노동자의 단결 투쟁보다 교사의 단결 투쟁을 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내 존재론적 고민이 해결되었다.

교사는 경우에 따라 지배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적 존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레카! 교사가 되자.”

이렇게 마음먹은 것이 1989년 여름의 일이다. 교사는 지배체제의 일개 부품이 아니다. 교사는 오히려 혁명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는 '전교조'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요컨대 내가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대단히 불순했다.


전 까지 나는 다음 셋을 놓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1. 독일로 유학을 가서 본바닥 좌파 사상을 공부한다.

2. 다 집어 치우고 다시 강남 도련님으로 돌아가 대기업이나 금융권에 들어간다. 물론 내가 역겹다고 했던 그 선배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3. 정말 존재론적인 탈피를 감행하여 학교 집어 치우고 위장 취업하여 생산직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가가 된다.


셋 다 탐탁지 않았다. 첫번째는 일단 힘들고 번거로웠다. 두번째는 뭔가 역겹게 느껴졌다. 세번째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존재 변화가 컸다. 그나마 첫번째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4의 길이 열렸다. 생산직 노동자가 되지 않고도, 지식노동자로서 적절한 품위와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 부담스러운 유학을 가지 않고도 지배계급을 흔들 수 있는 혁명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나의 진로가 교사로 변경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교조 조합원으로 변경되었다. 교사가 되는 것은 전교조 조합원이 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교육 그 자체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애들 가르치는 거야 그냥 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는 세상의 편견에 나도 깊이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3학년 올라갈 무렵 사회교육과에 부전공 신청해 두었던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아무래도 사회과가 독어과 보다는 교사 티오가 훨씬 많고, 또 가르치는 내용도 혁명적 실천과 접점을 찾기 쉬울 것이니 말이다.

나는 이런 장면을 상상했다. 학생들 앞에서 사회 교과서를 땅바닥에 내리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야, 너희 사회책에 나오는 내용 다 거짓말이야. 그건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을 감추기 위한 허위의식이야. 지금부터 진짜 사회 공부를 시켜줄 테니 잘 들어.”

이러면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민중의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역사를 설명하면 그것이 '참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부끄럽지만 일단 기록해 둔다. 부끄러운 과거 역시 엄연한 역사이며, 역사는 아무리 사소한 사람의 사소한 행적이라도 공공의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내가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동기는 이런 낯뜨겁고 유치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부터 계산하여 교육 35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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