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35년: 교사가 되기 전에 2

관악산 야간 산행

by 권재원

관악산 야간 산행


전교조 교사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전교조가 결성되던 1989년 여름이니 내가 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바로 그 순간의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사범대학 민중연대사업부장으로 있었다. 줄여서 연사부장이라고 했는데, 여러 사회, 노동단체와의 연대투쟁, 연대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직책이었다.

직책표 위의 문자로야 참으로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일을 하는 자리처럼 보였지만, 총학생회도 아니고 단과대 학생회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할 기회는 없었다. 대체로 총학생회 연대사업부에서 연대투쟁을 기획하면 그거 받아와서 과회장들에게 알리고 동원하는 정도의 일을 할 뿐이었다.

그 중 가장 큰 일은 농활이었다. 당시 농활은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농활은 학생이 농촌 활동가와 연대하여 학생은 농촌의 실상을 배우고 노동의 가치를 학습하면서 민중연대의식을 높이는 의식화 학습의 과정이었다. 동시에 농민이 자신들의 가난과 불평등이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깨달아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의식을 높이게 하는 민중 선전 활동이기도 했다.

당시 농활은 보통 대학 하나가 군 하나를 담당했는데, 유독 서울대학교만 군이 아니라 도 하나를 담당하고 단과 대학 하나가 군 하나를 담당했다. 그러니 사범대학 연사부장의 역할이 다른 대학 총학생회 연사부장과 같았던 셈이다. 그래서 나는 충청남도 청양군 농활 총 책임자가 되어 그 해 여름방학을 헌납해야 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업은 사범대학 답게 전교조와 연대하여 투쟁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일은 교육부장이 맡아서 할 일이긴 하지만 당시 사범대 교육부장이 교생 실습 중이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고, 또 전교조 역시 크게 보면 노동운동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연사부의 일이 되었다. 업무 폭탄이 쏟아진 셈인데, 그 때는 힘들다거나 바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범대 학생회장이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나를 찾았다. 갔더니 사범대 학생회장은 물론 총학생회 간부들도 상기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종이를 꺼내 필담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학생회 사무실에는 당연히 도청 장치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한 내용은 필담으로 하고, 간혹 가짜 정보를 일부러 큰소리를 내어 말하곤 했다. 진짜 도청 장치가 있기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 전교조 서울지부 결성식 관악에서 함. 사수조 필요.

-언제?

-16시-18시 사이 언젠가. 더 자세히는 모름. 에너미들이 지도부 체포한다고 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교조 결성식에 참석했던 교사들이 줄줄이 연행되는 충격적인 장면이 전국에 영상으로 방영된 바 있었다. 초대 위원장 윤영규를 포함하여, 이수호, 이부영 등 지도부에게는 이미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학교에서는 분회 결성식들을 하고 있었고, 교장, 교감, 그리고 일부 주임교사들의 노골적인 방해로 물리적 충돌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전 구속 영장 발부 중인 지도부가 참석하는 서울지부 결성식의 의미는 매우 컸다.

당시 여러 시도 지부 결성식이 있었지만 서울지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출범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나온다고 했나? 서울 지부 출범을 무사히 마치면 전교조는 전국 단위 조직을 완성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문교부의 해고 협박과 경찰의 탄압을 뚫고 기어코 모든 지역 지부 결성을 마치면 저들도 어쩔수 없이 실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도 있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설마 전원 다 해직하겠다고 나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6월항쟁도 지나고 88올림픽도 지나 여소야대 국회를 가진 그런 나라 아닌가?

이 사진을 참고하기 바란다. 1989년 5월 28일 한양대에서 열리려다 무산되었던 전교조 발대식의 한 장면이다. 이때 한양대를 철통 봉쇄하고 지하철까지 무정차 통과시켰지만 수백명의 교사가 한양대에 진입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경찰은 그 분풀이로 한양대에 진입한 교사들을 모조리 연행하려 했다. 휴일에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위법이 될 수도 있는, 혹은 위법이 아닌데도 연행할 수 있는 참 기막힌 세상이었다. 이를 한양대 학생들이 육탄 저지 했는데, 이들을 뜯어내던 사람
들은 사복 경찰들이 아니라 장학사, 교감, 교장들이었다.

내가 하늘이 두 쪽 나도 장학사, 교감, 교장을 믿지 않고, 또 그 길을 선택한 사람을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게 만드는 원천적인 기억이다. 당시 지방의 장학사, 교감, 교장들은 교사들이 전교조 발대식에 참석하러 서울에 가지 못하게 한다며 역과 터미널 등을 지키는 정권의 경비견 역할까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자행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자신이 장학사, 교감, 교장이었음을 부끄러워하는 양심선언 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교육운동 하다 장학사, 교감, 교장 길을 선택한 사람은 원죄라도 지은듯이 자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아니면 그 직종의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폭로하고 선배 장학사, 선배 교감, 교장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개혁의 기수가 되던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서 교육청에 잘 적응하면 절대 안된다. 그런데 다들 잘 적응 하더라.

어쨌든 이렇게 난리를 치고 있었는데 정작 전교조 발대식은 연세대에서 기습적으로 열렸다. 이렇게 완전히 한 방 먹은 경찰은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그래서 서울시 지부 결성식 만큼은 기필코 원천봉쇄하고 그게 안되면 지도부라도 연행 하겠다고 결의를 단단히 세운 상태였다.

그런데 경찰은 그날 하루에만 두 번이나 허탕을 쳤다. 처음 서울지부 결성식 장소로 알려진 곳은 건국대였다. 그런데 갔더니 허탕. 나중에는 경희대에서 서울지부 결성식을 한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갔더니 또 허탕. 경찰은 두 대학에 엄청난 인원을 파견하여 완전히 에워싸고 재학생과 교수 외에는 출입을 차단하며 철저히 원천봉쇄했는데 헛수고만 했다.

두 장소 모두 전교조 집행부가 작전상 흘린 뻥카였는지 아니면 플랜 A, B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전교조 서울지부 교사들은 두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플랜 C가 어딘지는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서울시 지부 결성식과 서울대학교는 아주 쉽게 연결되는데 너무 뻔해서 경찰도 생각 안했던 것 같다. 혹은 서울대학이 교통이 불편해서 전철역 근처 대학 중심으로 감시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명색이 행사장(?)의 간부인 나조차 당일 오후에야 연락을 받았으니 보안이 아주 철저하게 잘 지켜진 셈이었다. 나는 즉시 총학생회의 협조를 구했다. 이건 사범대 학생회 수준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양대에서는 사범대 학생들로 사수대를 구성 했다 숫자가 부족하여 결국 선생님들이 줄줄이 연행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반면 충분한 인원을 확보한 연세대에서는 경찰이 교사 연행을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당연히 총학생회 차원에서 비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날 동원 가능한 학우들을 모두 긁어 모아 사수대를 구성했다. 이동통신이 없던 시절이고 한창 기말고사 기간이라 학우들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신림동 하숙촌 까지 연락망을 동원해 이미 하교하여 하숙집, 자취방에 간 학우들까지 다시 학교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5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였다. 우리가 미리 교문 앞에 나가 막아서면 경찰이 여기가 집회 장소라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니 교내를 어슬렁거리다가 결성식 시작을 알리면 바로 이동하여 교문과 교내 주요 통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찰 진입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20대 후반-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부쩍 교내에 늘어났다. 남자는 면바지와 남방 차림이 많았고, 여자는 원피스나 바지 정장 차림이 많았다. 누가 봐도 선생 티가 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방송이 들렸다.

“지금부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결성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교내를 어슬렁 거리던 그 선생 티 나던 사람들이 일제히 아크로폴리스 광장으로 몰려왔고, 사수대 수백명 말고도 우연히 그 주변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엄청난 환호성이었다. 순식간에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교사들과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와 동시에 사수대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교문에서 아크로 쪽으로 오는 길목을 틀어막았다. 나는 사수대와 함께 교문 앞을 지키느라 정작 서울시 지부 결성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지 못했다. 다만 교문 안으로 진입하려는 경찰들과 대치하며 몸싸움 하느라 정신 없을 뿐이었다. 전교조와 폭력 시위가 연결되면 저들의 언론플레이에 이용당하기 쉽기 때문에 경찰을 향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어디서 구해왔는지 폐타이어들을 잔뜩 쌓아서 바리케이트로 활용했다. 만약 전경들이 치고 들어오면 여기 불을 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경들은 교내로 진입하지는 않았고, 대신 교문을 철통같이 가로막았다. 집회가 열리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끝나고 집에 못 가게 하겠다는 심보가 보였다. 대학생들 시위 같으면 며칠이고 농성하며 버틸 수 있지만 당장 내일 출근해야 하는 교사들은 그럴 수가 없다. 오늘 밤 교통편이 끊어지기 전에 귀가해야 한다. 바로 그 약점을 틀어쥔 것이다.

총학생회와 주최측에서 즉시 경찰과 교섭에 들어갔다. 경찰 쪽의 요구조건은 체포 영장 발부된 이부영 위원장 대행, 그리고 몇몇 집행위원들의 신병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체포되어 주면 단순 참가자들의 귀가를 보장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강제 진입하여 그들을 직접 체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체포할 때 까지는 누구도 학교 밖에 나가지 못한다, 대충 이런 통보가 이어졌다.

당시 전교조는 윤영규 위원장, 이수호 사무처장, 원영만 강원 준비위원장, 신맹순 인천 준비위원장, 김석근 총무부장 등이 이미 구속된 상황이었고, 이부영 선생님이 임시위원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했던 그 이부영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렇게 경찰과 옥신각신 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서울지부 출범식이 끝난 모양, 수백명의 선생님들이 교문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교문을 향해 행진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집회 끝내고 집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경이 교문을 틀어막고 그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사수대는 전경이 전교조 지도부를 잡으러 오면 막자고 만들어진 것이고, 딱 그 정도 규모였다. 길 막고 선 전경 몰아내고 선생님들 귀가를 보장하는 것 까지는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이때 사범대 학생회장과 체육교육과 과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았다.

사범대 학생회장이 말했다.

“전교조 지도부를 산길로 탈출시킬 계획이야. 교문에서 일단 대치하면서 시간 끌테니까 그 동안 네가 몇몇 모아 사수대 편성해서 모시고 갔으면 해.”

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관악산을 넘자고? 이 밤에?”

“그건, 아니고. 자, 여길 좀 봐.”

체육과회장이 피식 웃으며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약도를 그렸다.

“이건 우리 과 크로스컨트리 훈련 코스야. 등산 지도에는 안 나오지만 길은 잘 나있고, 별로 높이 올라가지도 않아.”

체육과에서 가르쳐 준 길은 이랬다. 체육관에서 조금 올라가면 발전소가 있다. 발전소 뒤에 있는 산자락을 타고 오르면 작은 능선을 따라가게 되는데 이 능선길을 따라 계속 가면 기숙사 앞 봉우리에서 낙성대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낙성대 역 근처까지 야산이 계속 연결되기 때문에 후문을 차단하고 있는 전경을 피해 탈출이 가능하다.

“단, 랜턴을 쓰면 안 돼. 의외로 멀리서도 보이기 때문에, 산 능선에 불빛이 반짝거리면 짭새들이 눈치 챌거야.”

“그러니까, 지금 이 밤에 랜턴도 켜지 말고 지도에도 안 나오는 산길로 연세 많은 선생님들(음 지금 생각하면 지금 나 보다 훨씬 젊은 선생님들이었다) 모시고 넘어가라?”

“정확하게 이해했네. 걱정 마. 30분이면 낙성대 삼거리로 떨어질 수 있어.”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말이 쉽지,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나마 아주 그믐은 아니라 달빛이 좀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어쩌겠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리교육과 남학생 둘, 체육교육과 남학생 둘, 생물교육과 남학생 하나와 내가 탈출 사수대가 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이랬다. 지리과 학생들이 능선을 읽어 길을 찾고, 체육과 학생들이 만약의 경우 힘을 쓰고, 다치면 생물과 학생이 돌봐준다. 그럴듯했다. 나는 연사부장으로 이 탈출팀의 총괄책임자가 되었다.

우리는 저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쇠파이프, 앵글 등을 한 자루씩 집어 들고 (무기로도 쓸 수 있지만 산길에서 지팡이로도 썼다) 발전소 뒤쪽으로 해서 산길을 올랐다. 출발할 때 시간이 밤 여덟시 반 정도 되었다. 그럼 아홉시 반이면 낙성대 전철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산 길을 오르자 마자 깨달았다. 길이 잘 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크로스컨트리 하는 체육과 학생들 기준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삼십 분이면 충분하다던 체육과회장의 말도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일 것이다. 크로스컨트리 하는 체육과 학생들이 낮 시간에 반쯤 달리다 시피 가면 삼십 분이란 뜻이리라.

하지만 우린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중년 교사 세 분을 호위하고 산을 넘어야 하고, 그 중년 교사 분들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삼십 분은 커녕 갈수 있을지 없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철조망을 넘어야 했다.

“아니 여기 철조망이 왜 있어?”

욕이 나왔다. 그때는 몰랐다. 어쨌든 학교 부지와 사유지 사이의 경계가 산 가운데에 그어져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철조망 사이에 작은 문이 있었다. 하지만 밤에 랜턴도 없는 초조한 도망자들에게 그게 보일 턱이 없었다.

결국 우리의 탈주는 철조망 넘기로 그 막을 열었다. 중년의 선생님들이 철조망을 쉽사리 넘지 못하기에 손과 어깨로 받쳐주느라 내 옷에는 곳곳에 발자국이 찍혔고, 언제 긁혔는지 바지가 철조망에 쓸려 너덜너덜해졌다. 이 모든 일이 출발하고 단 10분 이내에 일어났다.

결국 30분이면 된다는 산길을 한시간 반은 족히 넘게 걸려 간신히 돌파했다. 산길의 마지막 부분, 여기만 지나가면 낙성대 역 근처 주택가 골목으로 내려가는 지점에서 섵불리 내려가지 않고 정찰을 먼저 보냈다. 낙성대 역으로 가는 골목길에 전경이 배치되어 있다면 산에서 내려오는 수상한 무리는 당장 연행 될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약의 경우 엉뚱한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쇠파이프, 앵글 등은 모두 버렸다. 배짱 좋기로 유명한 생물과 선배가 먼저 내려가서 동네 길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왔다.

“없어. 한 마리도 없어. 깨끗해.”

선배가 손가락으로 0을 표시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산길을 빠져나왔다. 한시간 반만에 다시 민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한시간 반이 거의 한 밤을 지새운 것처럼 느껴졌다.

간신히 탈출한 선생님들이 너무 고맙다며 간단하게 저녁식사와 약주를 사주었다. 그리고 밤 늦었으니 집에 갈 때 택시 타라며 5천 원짜리 지폐도 한 장씩 주었다. 그 시절에는 굉장히 큰 돈이었다. 당시 최저 시급이 500원 정도였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한 시간 반 경호 업무 치고 너무 과하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바로 그 날 나의 진로가 확정되었다. 반드시 교사가 되기로, 그리고 전교조에 가입해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동기가 불순하다고 느낄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 시대의 흐름이었다. 오늘의 눈으로야 이러쿵 저러쿵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 시대의 눈으로는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고, 나는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시대로 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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