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35년 6화 신규교사 연수

by 권재원


나는 1991년 11월에 치러진 제2회 교원임용고사에 응시했다. 졸업은 1991년 8월에했지만 그때까지도 임고에 응시할 마음은 없었다. 시험거부 투쟁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그 시험에 응시한다는 것이 정말 모양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고 대신 들어갔던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립학교 자리도 이런 저런 이유로 취소되면서 결국 응시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때가 10월 중순이다. 시험은 12월 초. 그러니까 한달 여 공부하고 시험 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합격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국립대와 사립대 TO를 분리하여 실시한다 하더라도 서울 지역의 경쟁률은 생각보다 높았다. 전국에서 몰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5:1이라는 경쟁률이 때로 수십대 일 까지 올라가는 일반 공무원 시험 등과 비교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경쟁률은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이는 경쟁률이 아니었다. 서울대학생과 서울지역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발령 내준다는 말 믿고 지방 국립대에 갔던 만만치 않은 학생들끼리 모여서 만들어낸 경쟁률이었다.

그러니 달랑 한 달 공부하고 합격을 기대한다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했고, 경험치 쌓는다는 생각으로 응했다. 그런데 덜컥 합격했다. 합격한 나도 놀랐다. 더구나 나는 주전공인 독일어가 아니라 부전공인 사회(일반사회)로 시험을 쳤다.

3학년 올라가면서 사회과에 부전공을 신청한 까닭은 사회교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보니 독일어 보다 사회과학에 더 많은 흥미를 느껴서였다. 물론 그래놓고도 수업은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전교조 출범 이후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사회과 부전공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서울시에서 독일어 교사는 5명 이내로 선발했지만 사회 교사는 무려 33명이나 선발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나 지금이나 임고 달랑 한 달 공부하고 합격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한 손에 꼽을 것이다. 어쨌든 부전공인 사회과에 합격한 나는 1992년 2월, 1주일간 진행되는 신규교사 연수에 참석했다. 그때는 주6일제 근무였기 때문에 토요일 오전까지 연수가 진행되었다. 당시 서울 교육 연수원은 사당동이 아니라 사직동에 있었는데 규모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임용후보자 전첵 모일수 없어 매동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진행되었다.

신규교사 연수라고 해 봐야 별 뾰족한 것 없었다. 체육관에 간이 의자와 책상을 죽 늘어 세워 놓고 신규교사 수백명을 한꺼번에 때려 넣고 진행하는 무식한 집합 연수였다.

심지어 좌석을 가나다 순도 아니고 무려 합격 석차순으로 배열하는 어이없는 짓까지 저질러 놓았다. 덕분에 각 교과별 수석 합격자들은 모두 체육관 제일 앞 자리에 배치되어 꼼짝 못하고 연수를 받아야 했고, 하위권 합격자들은 강사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먼 곳에 배치되어 오히려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한 달 공부해서 합격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여겨야 할 판에 상위권을 기대할 수 없었고, 당연히 하위권이었다. 착실하게 좌석 배치해준 연수원 덕분에 내 뒤로 네 명 있는 것을 확인했다. 33명 중 30등이었다. 어차피 33명 중 절반 이상이 서울대 동기나 선후배들이었고, 앞 자리가 여자친구의 룸메이트라 강사가 뭐라고 떠들거나 말거나 깔깔 거릴 정도로 즐겁게 시간 잘 보냈다.

당시 내 생각은 이랬다.

“저것들이 감히 누구를 가르친단 말인가? 죄다 정권에 빌붙은 장학관 나부랭이들, 장학사 나부랭이들, 그리고 그들과 친분이 있는 딸랑이 선생 나부랭이들이 나와서 컹컹 짖어대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실 이 생각은 이후에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30년 넘도록 장학관, 장학사들, 교장, 교감들을 나부랭이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른바 전교조 출신의 내부형 공모교장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연수를 거꾸로 매달려도 교육부 시계는 간다는 정신으로 버텼다. 강사가 있는 연단과는 거리가 무려 50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어 내 마음대로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았다.

스마트폰은 물론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니 딱히 할 짓도 없었다. 여자친구 룸메이트와 까불고 노는 것도 잠깐이지 강의 내내 그럴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주로 연수생이나 강사, 장학사 들의 얼굴을 크로키 하며 시간을 떼웠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토요일이 왔다. 토요일은 오전에 수료식만 오하고 마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난 그날 일정이 바빴다. 오전에 수료식을 마치면 오후에 신촌에 가서 십팔기 승단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차로 태백에 내려가서 일요일 새벽 태백산 등산을 할 계획이었다.

덕분에 그날 출근길 복장이 대단했다. 75리터짜리 커다란 배낭에 승단심사에 필요한 도복, 신발, 병장기, 그리고 태백산 등반에 필요한 등산복 등산화 버너 코허(한국어로 코펠) 등을 다 때려 넣어 짊어지고 연수원으로 갔다. 아마도 30킬로 그램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나이라고 해 봐야 24세. 저걸 다 짊어지고 지하철을 타고 또 내려서 걷고 연수원 갔다, 도장 가서 승단 심사하고 심지어 밤 기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 지금 같으면 저걸 다 짊어지면 몇 걸음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신규교사 연수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은 서울시교육청 역사상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싶다.

수료식을 마치자 발령장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위권인 나에게는 당연히 소식이 없었다. 14번인가 15번까지만 발령이 났고, 절반 이상이 미발령 상태로 수료식을 마쳤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한 학기 정도 자유가 생겼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수료식을 마친 뒤 동기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언제 만날지 기약 없는 인사를 하고 신촌에 있는 도장으로 이동했다.

도장에 도착하자 마자 교원연수용 복장을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도복과 수련화로 갈아 신고 병장기를 꺼내 부지런히 연습한 뒤 심사를 받았다. 무사히 통과해서 2단이 되었다. 무술 연습하고 심사받는 것은 체력소모가 엄청난 일이지만 그때는 나이 때문인지 도무지 힘든 줄 몰랐다. 심사 마치고 관장님, 도장 동기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도복과 수련화를 벗고 등산복과 등산화로 바꿔 입었다.

그 다음 향한 곳은 청량리 역. 밤 열시 근방에 출발하는 태백선 열차를 탔다. 지금은 운행하지 않지만 정동진에 해돋이 보러 가는 사람들이 타던 바로 그 기차다. 그 기차로 도중에 태백에서 내렸다. 새벽 몇 시였는지 모르겠지만 김기훈이 쇼트트랙 1,000미터에서 금메달 따는 장면을 대합실에서 봤던 것으로 보아 3시 30분 이후였을 것이다. 기차에서 좀 자 두고 싶었지만 술 마시며 떠드는 아재들 때문에 거의 자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몸을 가지고도 역 대합실에서 한 삼십분 정도 눈 붙였다 뜨니 말짱해졌다. 이 역시 24세 청춘의 힘이리라. 그렇게 잠을 설친 상태에서 첫 버스를 타고 유일사 입구로 가서 태백산을 올랐다.

배낭에는 신규교사 연수 복장, 십팔기 승단심사 복장과 병장기까지 포함한 어마어마한 짐이 들어 있었지만, 그걸 다 짊어지고 유일사 코스로 들어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태백산 정상에 올라 라면을 한 그릇 끓여 먹고(꿀맛이었다), 백단사 고개를 통해 당골로 하산했다. 문수봉까지 거쳐서 갈 계획이었지만 눈길이 전혀 러셀 되어 있지 않아 그건 포기했다. 지금도 신규교사 연수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연수 끝나는 날 나는 태백산에 올랐다. 정식 교사 신분이 된 첫날 일정으로서는 꽤나 멋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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