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교사 연수 마지막 날 발령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한 달 공부하고 붙은 것도 용한데 상위권 씩이나 바랄 수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어머니 생각은 전혀 달랐다. 대학 졸업한지 2년째인 아들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꼴을 도저히 못 보겠던지 어디라도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라고 성화가 대단했다.
할수 없이 신문 구인란을 뒤져 동네 학원 자리를 찾아 보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언제 발령 나서 나갈지 모르는 사실상 절반쯤 현직교사인 서울대 졸업생을 채용할 사교육업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대체로 이런 말과 함께 거절당했다.
“저희는 오랫동안 같이 할 분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나도 딱히 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어머니 등쌀에 나와 본 것이라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고 나왔다.
그러던 2월 말,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3월 3일부터 일할 임시교사를 찾는다는 것이다. 원래 근무하던 선생님이 출산 휴가 들어갔기 때문에 일단 2개월, 그리고 휴직 여부에 따라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때는 기간제 교사라는 말이 없었고 임시 교사라고 불렀다.
알려준 연락처로 전화를 하니 그 학교 교감이 받았다. 발령 대기자라고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다. 적어도 한 학기 혹은 일년은 있어야 발령 날 것이니 그 동안 만이라도 와서 가르치면 된다고 했다. 아니 왜 이렇게 학교측이 저자세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감이 말 끝을 흐렸다.
“다만 학교 위치가 좀.”
학교 위치가 뭐 어떻다는 거지?
“학교 위치가 은평구 끝인데, 괜찮겠어요? 송파구 사신다고 들었는데?”
아, 말 끝을 흐릴만 했다. 나 이전에 아마 몇 사람 알아보았지만 학교가 너무 외진 곳에 있어 거절당했던 모양이다.
세상에 은평구 끝이라니? 그때는 지하철 6호선 삽도 뜨기 전, 아니 설계도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하철은 4호선 까지만 있었고, 지하철 3호선도 양재-구파발 이렇게만 다녔다.
당시 내가 살던 곳(미혼이었으니 부모님 댁)은 송파구 문정동의 올림픽 페밀리 아파트였다. 지하철 8호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3호선 가락시장역도 존재하지 않았다. 송파구 문정동에서 은평구 구산동까지 가는 방법은 둘 밖에 없었다.
방법1: 잠실역까지 가는 버스를 탄다(약 20분 소요), 잠실역에서 을지로 3가까지 2호선을 탄다(약 30분 소요), 3호선으로 환승하여 녹번역까지 간다(약 20분 소요), 녹번역에서 내려 소방서 앞 정류장에서 선진교통 버스를 탄다(약 20분 소요). 이렇게 하면 합이 90분인데, 그나마 버스 구간에서 정체가 하나도 없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방법2: 가락시장에서 미도파(지금은 롯데백화점 명동점에 합병)까지 다니는 좌석버스 14번을 탄다(약 40분 소요: 종점-회차점 구간이다). 미도파 앞에서 선진교통 720번 좌석버스를 탄다(약 40분 소요: 이것 역시 종점-회차점 구간이다). 합이 약 80분 정도인데, 집에서 6시에 나가야 가능한 시간이다. 6시 반이 지나면 도로가 막히기 시작해 소요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
하지만 집에서 노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덥썩 “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첫 교직 생활은 서울 동남쪽 끝에서 서울 서북쪽 끝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출퇴근길과 함께 임시교사로서 시작하게 되었다.
워낙 출근길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나는 7시 30분에 도착하여 교무실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되거나 도로정체에 시달리며 8시30분에 아슬아슬하게 지각 면하며 들어가던가 둘 중의 하나인 극과 극의 출근을 하게 되었다.
출근도 출근이지만 퇴근길이 더 큰 문제였다. 지상교통으로 퇴근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버스로 녹번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압구정 역에서 버스로 갈아타며 집에 갔다. 환승 요금제가 없던 시절이라 요금도 세번씩 내야 했다. 때로는 아예 학교 근처에서 식사도 하고, 모임도 좀 하고 일곱 시 지나서 (그때는 퇴근시간 피크만 지나면 길이 잘 뚫렸다) 좌석버스- 좌석버스 코스로 퇴근했다.
이렇게 날마다 길바닥에 최소 3시간을 쏟아 부어가며 매일 5시 30분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다. 수업도 만만치 않아서 주당 22시간을 담당했다. 그나마 학년을 걸치지 않고 11학급을 한꺼번에 담당했다. 세상에나 11 학급이라니.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아득한 출퇴근 길에 엄청난 수업 부담이었지만, 24세 청춘이라 그리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머나먼 출퇴근은 1학기 4개월 반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넉달 반은 이후 4년에 해당될 만큼 많은 경험치를 내게 안겨다 주었다.
1992년 3월 3일, 비록 임시교사지만 처음으로 교사 신분으로 학교에 출근했다. 그 학교는 한 학년이 12반이고 모두 37 학급이 있는 큰 학교였다. 교원만 70명 가까이 근무하고 있어서, 나는 드넓은 교무실의 작은 점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학교의 일과는 요즘하고 많이 달랐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옥죄는 면이 강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훨씬 자유로웠다.
“자유롭다고 설마?”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물론 교육당국, 교육관료들에게는 교사에게 자유를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통제에 빈틈이 많아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 뿐이다. 교육행정이 아날로그로 이루어지다 보니 안 들키고 적당히 떼우고 넘어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반면 지금은 관료들의 통제적 마인드는 추호도 줄어들지 않았고, 여기에 ICT기술 때문에 감시, 관리 도구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교사의 자유도가 훨씬 적다못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숨이 막힐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그 시절이 마냥 편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그 시절에는 무의미한 관행도 많아 쓸데없이 힘쓰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지금도 그런 관행들은 크게 줄어든 것 같지 않아 보여서 문제지만.
가령 매일 아침 8시 30분 관행적으로 실시했던 이른바 아침자습 시간이 그랬다. 법적으로는 1교시 수업부터가 일과의 시작이다. 그 이전까지는 학생이 무엇을 하건, 오건 말건, 그건 학생 자유라야 한다. 하지만 1교시 이전에 어떻게든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는 강박적 관행은 그 뿌리가 깊어 지금도 독서시간, 성찰시간 등 별 이상한 이름으로 남아있다.
경기도가 이재정 교육감 시절에 실시했던 9시 등교 정책이 탁상공론으로 끝난 까닭도 이 아침 자습 시간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 자습, 아침 뭐시기 시간을 유지한 채로 등교시간을 9시로 늦추면 하교시간만 늦어질 뿐이니 어느 학생이 좋아하겠는가? 차라리 1교시 시작하기 한참 전에 등교를 강요하지 말라는 뜻에서 1교시 등교 같은 식으로 진행되었으면 훨씬 잘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1교시 시작하기 30분 전에 등교시켜 담임교사에게 아침 초과노동을 시키는 악습이 남아 있다. 그 나마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때는 무려 1교시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등교를 시켰다.
당시 일과표는 이랬다. 학생들은 8시 30분에 등교하여 20분간 아침 자습을 했다. 학급 담임교사도 임장지도를 했으니 고스란히 초과노동 시간이 되었다. 이 자습시간이 학급조회 시간과 겸용되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그야말로 자습만 했다. 조회시간은 따로 있었다.
담임교사들이 아침 자습 감독을 하는 동안 교장실에서는 간부회의(주임회의. 요즘의 부장회의)가 열렸다. 요즘 같으면 무슨 부장회의를 날마다 하냐 싶겠지만, 또 학교에 날마다 무슨 회의 할만한 안건들이 뭐 그렇게 있겠냐 하겠지만 그때는 그걸 날마다 했다. 내 생각에는 그냥 매일 아침 교장한테 인사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거라 본다.
이렇게 아침 자습시간과 주임회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8시 50분부터 교직원조회를 실시했다. 요즘은 전 교사가 모이는 회의를 교직원 연수라는 이름으로 격주에 한번, 경우에 따라 한 달에 한번 실시하지만 당시에는 이 짓을 날마다 했다.
회의실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무실 각자 자기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했다. 과학실, 체육실 같은 별실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은 교무실 뒤편에 간이 의자를 펼쳐서 앉거나 교무실 선생님들 중 친한 사람 옆에 간의 의자를 펼쳐 놓고 참석(?)했다.
이름이 회의가 아니라 조회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지시를 듣기 위해 모이는 것이지 뭔가를 의논하기 위해 모이는 게 아니었다. 이를 상징하듯 마이크는 주임교사 자리와 교감 자리에만 있었다. 즉 교장, 교감, 주임 말고는 입 닥치고 듣기나 하라는 구조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직원은 한 명도 없고 오직 교원들만 모여 있는데 왜 그것을 직원조회라고 불렀나 하는 것이다. 교사를 가르치는 교원이 아니라 행정부서의 직원처럼 다루고자 하는 일종의 집단적 가스라이팅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말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은 듣는 일에도 관심이 없기 마련이다. 참여의 여지도 없고, 설령 한 두 마디 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교장, 교감, 주임 선에서 묵살당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들을 교사는 많지 않았다.
물론 교무수첩을 펼쳐놓고 각부 주임교사들의 지시사항을 부지런히 받아 적는 타고난 모범생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의 교사들은 주임, 교감, 교장이 뭐라고 마이크에 침을 튀기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그냥 각자 자기 볼 일들을 보았다. 나는 그냥 워크맨을 들었다. 어차피 교무실 제일 구석 말단 자리에 있는 새파란 임시 교사 따위, 중앙에서 마이크 잡고 떠드는 분들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직원조회가 언제 끝 나느냐는 순전히 교장 마음이었다. 교장이 한 두마디만 하고 끝내면 9시 10분 전에 끝나고, 뭔가 심기가 비틀려서 잔소리를 늘어 놓으면 한참 늦어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시간표 상에는 9시 10분에야 학급 조회다. 그러니까 담임교사는 8시 30분에 학급에 가서자습 감독을 다시 9시 10분에 10분 간의 학급 조회를하는 것이다.
이 시간 배치가 아주 묘하게 기분 나빴다. 9시 직원조회때 교장, 교감, 주임이 하는 말씀을 잘 받아 적은 뒤 그걸 학급 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전달해라, 이런 식의 시간 배치인 것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환장할 지경인 것이 등교해서 40분이 지나서야 조회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게 1992년 당시 우리나라 학교의 기본 작동 원리였다. 물론 교장, 교감, 주임이 하는 말 역시 자기 생각이 아니었다. 공문으로 하달 받은 교육청, 교육부 관료들의 말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했다. 교육청, 문교부(오늘날의 교육부)의 공문이 학교에 도달하면, 그 공문이 마치 신탁이라도 되는 양 주임과 교장교감이 모여 해석을 하고, 그 해석의 결과를 직원조회를 통해 교사들에게 지시하고, 그럼 교사들은 학급에 가서 그 지시 사항을 이행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바로 학교가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그 공문이 모세혈관이 흐르는 조직의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각 학급까지 어떻게 빈틈없이 이행되는지가 교장,교감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수업은 결강이나 발생 안 하게 시간표 맞춰 선생이 들어가 있기만 하면, 또 애들 안 떠들게 조용히 시키고 있으면 되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9시 10분-20분이 조회 시간이니 결국 1교시 수업은 9시 25분이나 되어야 시작했다. 만약 교장이 말이 많아져 직원조회가 길어지면 1교시를 9시 35분에 시작하고 1, 2 교시를 5분씩 단축 수업으로 처리했다. 그러니까 8시 30분에 등교한 학생들은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서 1교시 수업을 받는 꼴이다. 1교시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진이 다 빠지는 구조다. 하지만 매일 아침 군기 잡는 시간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의지가 느껴지는 시간표이기도 했다. 물론 시간표는 시간표일 뿐, 그런다고 군기가 잡히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9시 25분에야 1교시를 시작하니 점심시간은 12시 55분이나 되어야 했고, 6교시가 끝나면 3시 20분, 7교시가 끝나면 4시 15분이었다. 그러니 방과후에서 퇴근시간까지 거의 여유 시간이 없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학급당 인원수가 50명이 넘었기 때문에 11개 학급을 들어가는 내가 담당해야 하는 학생만 무려 600명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넥타이와 커프스까지 하고 출근했다.수트는기성복이 아니라 맞춤이었고, 넥타이는 모두 명품이었다. 머리는 가볍게 펌을 한 뒤, 헤어 젤이나 스프레이로 모양을 냈다. 20대 후반부터는 그냥 소박한 스타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스타일로 다녔지만 그때만 해도 강남 젊은이 티를 꽤 내고 다녔던 모양이다. 수트 핏도 제법 괜찮았다고 한다.
학생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이 어린 임시 교사를 환영했다. 꼭 젊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90년대는 젊은이의 시대였다. 어디에나 젊은이 투성이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70명 교사들 중 23-30세 사이 교사들이 15명이 넘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젊은 교사였지만, 나는 그야말로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었고, 아이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반항하거나 하면 선생스럽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 보다 한 수 더 뜬 엉뚱한 생각, 말, 행동으로 맞받았다. 이는 퇴직할 때 까지도 거의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내가 자랑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교직 마지막해였던 57세까지도 아이들보다 정신세계가 올드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큼은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학생들이 나를 환영한 또 다른 까닭은 오락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액션과 퍼포먼스가 많은 내 수업 자체가 아이들에게 엔터테인먼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새 별명이 붙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음침하긴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죽은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개봉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린다고 붙인 별명이었다. 영화 안 본 아이들도 학생들이 책상위에 뛰어 올라가는 장면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녀석들, 기왕 붙이려면 ‘키팅’이라고 할 것이지 죽은 시인이 뭐람.
어쨌든 나는 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적응할 필요조차 없었다. 부임 첫날 오후부터 이미 학생들의 최애 교사가 되어버렸으니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그럼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내가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목적, 바로 전교조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침 내 옆자리 선생님이 그 학교 전교조 후원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