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당시 전교조의 위상은 애매했다. 원칙적으로 1997년 이전까지 전교조는 불법 조직이었다.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사실이 밝혀 지기만 해도 해임 될 수 있었으며, 후원금을 내거나 그 활동에 동조하면 징계를 받아야 했다. 어디까지나 원칙이 그랬다는 것이지, 당국은 이미 정권에 큰 부담이 되어버린 대량의 교사 해직 시즌2를 찍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조합원을 색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당시 공식적인 전교조 조합원은 이미 해임된 해직교사 1500여명 뿐이었다. 조합에 명단을 올리고 공개하지는 않은 비공식적 조합원까지 합쳐도 전국에 1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비공식적 조합원들은 이름을 밝히면 해임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O중학교 김O영 선생님’, 이런 식으로 활동했다.
대신 전교조에 우호적인 성향의 젊은 교사들이 전교조 후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전교조 후원회는 해직교사의 생계를 돕자는 뜻에서 현직 교사들이 매달 후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매달 1만원씩을 걷었는데 당시 교사 봉급(신규교사 본봉 36만원), 혹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8200달러 미만)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5만원 정도 냈다고 봐야 한다.
내가 임시 교사로 일했던 G중학교의 경우 회비를 내는 교사가 70명 중 20명이 넘었다. 당시 그 학교 20대-30 대 교사 절반 이상이 후원 회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전교조 후원회는 매달 한 번씩 돈만 내고 끝나는 모임이 아니었다. 나름 활동도 했다. 공식적으로 전교조 분회 이름을 내걸지 못할 뿐, 후원회가 사실상 비공식 전교조 분회였다고 보면 된다.
G중학교 전교조 후원회장은 나보다 3년 연상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때는 굉장히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기껏 27세였다.
20여명의 후원회원 중 10여명은 그야말로 매달 한 번씩 돈만 내는 명실상부 후원만 하는 회원이었지만 자주 자주 모이면서 책도 같이 읽고 교육에 대해 토론도 하면서 나름 교육운동을 고민하는 젊은 선생님들도 있었다. 이 분들이 사실상의 전교조 분회 활동을 했다고 보면 된다.
그 분들 성함이 아직도 기억 난다. 물론 실명을 여기서 밝히지는 않는다. 괄호 안의 숫자는 당시 나이다.
후원회장은 특수교육 담당 S선생님(27), S 선생님과 단짝을 이루었던 한문 담당 P 선생님(29), 사회를 가르쳤던 K 선생님(26)과 H선생님(28), 기술가정을 가르쳤던 A선생님(25)과 H선생님(29), 국어를 가르쳤던 S 선생님(25), 수학을 가르쳤던 K 선생님(25), 그리고 여기에 사회과의 권OO(24)이 가세했다.
공교롭게도 나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 선생님들이었다. 그 학교에 젊은 남자 교사가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체육 박OO(31), 사회 김OO(29), 과학 임OO(29), 과학 정OO(28) 등 그래도 꽤 있었다. 하지만 후원회비를 내던 임OO 선생님을 제외하면 모두 무관심 혹은 보수적인 포지션이었고, 그나마 임 선생님은 조만간 삼성전자로 이직할 예정이었다.
옆자리 선생님이 후원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즉시 나도 뭔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송 선생님은 나에게는 전교조 신문(지금의 교육희망) 배달이라는 임무를 주었다. 불법 단체의 기관지이고 비용의 문제도 있어서 전교조 신문은 각 학교 후원회장(사실상 분회장)이 지회 지회 사무실에서 가져와 후원회비 낸 선생님들에게 몰래몰래 나눠주는 방식으로 배부되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신체적으로 꽤 힘 드는 일이었다.더구나 당시 송 선생님은 결혼 준비로 몹시 바쁘기도 했다.
그러다 임무가 늘어났다. 지회 모임에도 대신 나가게 된 것이다.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이번 수요일 저녁에 지회 사무실에 가서 후원금 좀 내 주고 와 줘.”
처음에는 이렇게 한 두번 심부름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후원금 걷은 것을 가지고 지회 사무실에 갔더니 돈봉투만 내고 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각 학교 후원회장들이 모여서 각자 자기네 학교의 현안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교육 현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새로운 교육에 대한 꿈을 함께하는 모임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지회 사무실에 스물 네살 짜리가 나타나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우리 중서부지회에 희망이 생겼네?”
이렇게까지 말하는 분도 있었다.
안 그래도 내 발로 스스로 찾아갈 전교조였다. 그런데 이렇게 환대받으니 당연히 나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사실상 분회장 역할을 하게 하게 되었다. 결혼 준비로 정신없던 송 선생님은 내가 지회모임에 분회장 대리 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나는 임시교사 주제에 전교조 분회장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전교조 활동을 신규교사가 되기도 전 임시 교사 시절, 조합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분회장으로 시작했다. 전교조 서울시 지부 중서부 지회라고 부르기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중서부 공립 중등 지회, 중서부 사립 지회, 중서부 초등 지회 이렇게 세 지회가 하나의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G중학교 분회장 권한대행(?)으로서 분회장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정확히 말하면 분회장 뒷풀이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대체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교사들이 분회장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당연히 나는 가장 어렸다.
말이 좋아 회의지 사실은 안건 보다 모임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즉 분회장들이 모여서 저녁 먹고 술 한잔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는, 달리 말하면 젊은 교사들이 각자 자기 학교의 온갖 낡고 부조리한 일들을 토로하며 울분을 공유하는 그런 대나무 숲 같은 모임이었다.
지구장은 해직교사인 권OO선생님으로 나보다 2년 연상의 역사 선생님이었다. 겨우 26세인데 해직이라면 발령받은 첫 해에 해직되었단 뜻이다. 그 밖에 Y1중학교, Y2중학교, J중학교, B중학교, Y3중학교 분회장이 거의 단골로 참석했다. 우리 학교 바로 옆에 있는 E중학교는 분회가 활성화되지 않았는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고, D중학교 분회장은 어쩌다 한 번씩 얼굴만 비치고 가곤 했다.
답답한 시절이었으니, 일단 자리에 모이면 학교에서, 교육청에서 자행되는 온갖 권위주의적이고 부조리한 일들, 선배 교사들의 무력하고 비겁한 모습에 대한 성토대회가 열렸다. 당시 전교조는 젊은 교사의 둥지와 같았고, 무능하고 비겁하고 부패한 당시 40-50대 교사들과 교장, 교감에 대한 불만은 며칠 밤을 새워가며 토로해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런데 특이한 현상은 학교 안에서 만나는 전교조 후원회 선생님들은 나하고 박사과정 공부하느라 바빠 얼굴을 잘 드러내지 못했던 과학과 임 선생님 한 분을 빼면 모두 여자 선생님들이었는데, 지구모임에 참석하는 분회장들은 지구장인 해직 선생님 한 분만 여자였고 그 외에는 나를 포함하여 모두 남자 선생님들라는 것이었다. 지회 사무실 풍경만 보면 전교조가 영락없이 남자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 조직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 각 학교에서 그 몸통을 이루는 선생님들은 여자 선생님들이었다.
학교에서나 지회에서나 나의 전교조 활동이란 것은 대부분 젊은 선생님들끼리 모여 불만을 토로하고 자신들이 꿈꾸는 교육에 대해 이상을 피력하는 술자리였다. 김대중이 정 안되면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모여서 욕이라도 하다 보면 교육이, 학교가 바뀔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스스로의 정신건강은 지킬 수 있었다.
전교조 신문 배달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전달해 주었다. 책상 위에 전교조 신문을 떡 하니 펼쳐놓고 있는 것은 나 해직시켜 달라고 떼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몰래 신문을 전달해 주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운동이기도 했다. 신문만 덜렁 책상 서랍에 꽂아두고 오지는 않았고, 신문 나눠주러 간 김에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또 그 선생님 자리 근처 다른 선생님과도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후원회원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 영업(?)을 잘 해서 나는 G중학교를 중서부 지회에서 후원회비를 가장 많이 모금하는 학교로 만들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조합원수 최다 분회를 만든 셈이다. 이게 24세 임시교사가 한 일이다. 혹은 24세 임시교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스물 넷 밖에 안되는 애송이가 저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것을 보고 20대후반- 30대 중반 선배 교사들 중에 부끄러움이나 자극을 느낀 분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요즘 24-25세 신규 교사들을 보면 그때 보다 참 많이 어려진 것 같다. 당시 전교조 지회 모임에서 만난 나름 각 학교 중견(?) 활동가도 기껏 28-30세 정도였는데, 조숙했다고 할까 조로했다고 할까, 그런 분위기였다.
모두 젊은이였다는 것, 그게 그때는 전교조 활동이 재미있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전교조의 이미지도 비합법 조직이던 그때가 훨씬 좋았다. 나중에 전교조 신문이 제호를 교육희망으로 바꾼 것도, 당시 사람들이 전교조를 교육의 희망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고, 당시 구성원들의 나이나 성향을 보면 확실히 교육 희망이었다. 그리운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