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987년 가을 3화 권오석 1

by 권재원

1

사람의 눈은 파괴적이다.

이것이 바로 오석이 내린 결론이었다. 힌두교 관련 서적을 읽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브라만교 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파괴의 신 시바는 여기나 거기나 같으니까.

그런데 무려 파괴의 신이라 불리는 시바의 무기는 우악스러운 주먹, 곤봉, 철퇴 이런 것들이 아니다. 다름아닌 눈빛이다. 시바는 그 눈빛 만으로 무려 최고신이라 불리는 브라흐만의 다섯 개의 머리 중 하나를 날려버렸다. 만약 이걸 그림으로 그린다면 거대 로봇 만화처럼 눈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것이 날아가는 모양이 될 것이다.

신화는 완전한 상상이 아니다. 신화에는 인간의 경험이 과장되어 투영된다. 신이 눈빛으로 다른 신, 그것도 무려 서열 1위 인 신의 대가리를 날려버렸다는 이야기는 사람의 눈, 자신을 응시하는 타인의 눈에 대한 사람들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이 반영된 것이다. 마징가 제트나 로봇 태권 브이 같은 거대 로봇이 눈에서 강력한 광선을 발사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상상력일 것이다.

하지만 오석은 그 광선이 자신에게 날아올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신화도 만화도 아닌 현실세계, 그것도 2학기 개강 첫날부터 말이다.

오석은 2학기 개강과 동시에 동기들과 선배들이 눈으로 발사하는 광선에 난사 당했다. 그들 각자는 한 두 번씩 발사하고 말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하는 오석의 입장에서는 수십 발을 맞아야 했다.

성적표 받아 들었을 때 예상한 일이긴 했다. 오석과 수현을 제외한 다른 동기들의 학점은 처참했다. 재훈과 동성은 학사경고 수준의 학점을 받았고, 그 밖에도 모두 2.5 내외의 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오석은 3.54라는 학점을 받았다. 그나마 시험 치는 것이 미안해 답안지 대충 쓰고 나와 저 정도에 그쳤다. 열심히 답안을 작성했던 수현은 4.21이라는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았다.

동기들 대하는 것이 불편할 것은 오석도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그들의 반응은 각오한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곽재훈이야 당연히 개강하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달려들었다.

“내는 니가 마, 그래까지 할 줄 몰랐다. 어예 그럴 수 있나? 이기 완전 개새끼 아이라?”

재훈의 목소리가 강의실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울렸고, 결국 “어예 그럴 수 있나?” 이 말이 귀벌레가 되어 오석의 신경계 어딘 가에 박혀 버렸다. 아무리 털어내려 해도 “어예 그럴 수 있나?” 이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이 벌레 때문에 음악 감상마저 힘들었다. 상사병에 걸리면 무엇을 하려 해도 그 여성 얼굴이 떠올라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힌다는데, 하필 우락부락한 남자 녀석의 성난 목소리가 맴돌고 있으니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그건 그래도 견딜만했다. 곽재훈이야 어차피 스스로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 오석이 무슨 일을 해도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마저 싸늘하게 구는 것이 아팠다. 동성마저 오석을 마치 없는 존재처럼 취급했다. 과 학생들 모두 동성을 좋아했다. 그런 동성이 거리를 둔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욕을 하거나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모범적으로 12년간 공교육을 받아온 샤 대학생들인 것이다. 다만 강의실이나 캠퍼스에서 오석을 만나면 아주 형식적으로 “안녕.” 한 마디만 할 뿐 더 이상의 어떤 상호작용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석은 그들의 눈빛에 담긴 광자력 광선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조교들까지 광자력이 담긴 눈빛으로 오석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민경이나 하영의 눈빛에서 별다른 광자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이 쏘아대는 광선의 거미줄을 돌파하여 용감하게 오석과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방학 때 민경에게 약속했던 문학 학회 들어가겠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사람들 모여 있는 자리에 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오석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게다가 수현이 보이지 않았다. 방학 중에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개강하면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더욱 둘이 서로 의지하며 버텨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오석이 힘든 만큼 수현도 힘들 테니까.

수현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강의실에도 과사무실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8 열람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휴학한 건 아니라고 했다. 수강변경기간인 개강 둘째 주까지 교수들이 출결을 까다롭게 관리하지 않으니 그걸 노리고 아예 학교에 안 오는 모양이었다.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마음일까?

덕분에 오석은 매 수업시간 마다 혼자가 되어야 했다. 이를 견디기 어려웠기에 결국 1학년 전공 필수 두 과목 외의 교양과목들은 사범대가 아닌 인문대나 사회대 학생들이 주로 듣는 강좌로 시간표를 변경했다.

이 모든 것이 시험거부를 거부한 결과였다. 시험거부를 거부한 덕분에 오석은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오석은 외로운 수업을 마치고 중앙 도서관으로 맥 빠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문대에서 도서관으로 가는 경사로 옆에 작은 잔디밭이 있고, 그 앞에 조금 넓은 공간이 있는데 학생들은 그곳을 룸펜 광장이라 불렀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우유 팩 차기 놀이를 하는 학생이 많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석에게는 틀림없는 룸펜 광장이었다. 도서관에 가기 전에 그 잔디밭에 몸을 던지고 멍하니 누워있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누가 붙였는지 이름 한 번 잘 붙였다. 지금 오석 꼴이 딱 룸펜 그 자체였다.

그래도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등판에 느껴지는 식물성의 서늘함이 좋았다. 옷에 풀물이라도 들면 어머니한테 잔소리 깨나 듣겠지만 상관없다. 아예 온 몸이 다 녹색으로 물들었으면 좋겠다. 찌들고 시들은 마음이 싱싱해졌으면 좋겠다.

오석은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아직은 여름의 기운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새파랗게 맑은 가을 하늘이다. 파란 하늘빛이 어떤 산란과 간섭 없이 오석의 눈에 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눈이 파랗게 젖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새파란 하늘이 저녁을 재촉하며 분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리 가.”

오석이 하늘에게 말했다.

“파란 색이 더 필요해.”

하지만 8월에 비해 기세를 잃어버린 태양은 이미 물러날 준비를 하고 그 분홍색 잔해를 흘렸다. 분홍색은 분명 따스한 색 파란색이 차가운 색인데, 파란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자 오히려 오석은 가슴이 시리며 팔이 부르르 떨렸다.

분홍색 구름이 꿈틀거리자 하얀 구름도 꿈틀거렸다. 두 구름이 꿈틀거리더니 여럿으로 흩어져 문자를 이루었다. 이 문자들이 서로 뒤엉키더니 경구가 되어 마치 거대 로봇이 쏘아대는 광선처럼 쏟아졌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이 한 문장이 오석의 대학 첫 학기를 요약하고 말았다.

더구나 저 6월, 아마도 훗날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에게 가르쳐질 그 6월에, 그 역사적인 순간을 살았으면서도 저 한 문장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물결에 함께하지도 않았고 반대편에 서지도 않았고, 그냥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오석은 다시 자신의 선택을 되새겨 보았다. 무엇을 위해 시험거부를 거부했을까? 핑계는 민주화를 위한 싸움이 오히려 영혼을 거칠게 만드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수현이 하자는 대로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합리화시킨 예술이니 문학이니 아름다운 마음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헛소리였다. 그런 말 듣는 재훈의 황당한 표정만큼이나 오석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동안 쓰다 마음에 안 들어 찢어버린 종이가 수백 장을 넘기지만 시 한 수 변변히 마무리한 게 없고, 마음먹은 소설은 머릿말만 세 번 고쳐 썼을 뿐 전혀 진척이 없었다.

수현을 잃을까 두려워서 그랬을 뿐이었다. 과 친구들, 학우들, 나라와 역사에서, 심지어 정우와 동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수현과 떨어질 수 없어 그랬을 뿐이었다. 그걸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해서 예술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헛소리로 스스로를 속였다.

그런데 왜? 사랑? 수현을 사랑하는가? 아님 사랑했을까? 그런데 “그렇다.”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기억을 돌려보면 오석은 수현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현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대답이 필요해?”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손잡고 다니고, 가끔 끌어안기도 하고, 뺨을 어루만지고키스하기 직전까지 가기도 하고, 비록 기차 안이지만 며칠 밤을 함께 지새우며 여행도 다니고 이러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고백 같은 거 서로 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셈 치는 걸까? 정말 그런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현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수현의 부재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수업을 마치고 혼자 혹시 수현이가 올지도 모를 8열람실에서 마무리 공부를 하다 혼자 집에 가는 일에 지쳤다는 것이다.

다행히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불더니 저 불길한 문장을 날려 버렸다. 오석은 하늘을 더 이상 보기 어려워 몸을 일으켰다.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멀쩡한 벤치 두고 잔디밭에 누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벤치 위에 누워있는 신문이 보였다. 어떤 학생이 흘리고 간 모양이다.

신문이나 볼까 싶어 손을 뻗치는데 산들바람이 갑자기 돌풍이 되었다. 신문이 바람에 맞춰 날개 짓을 하더니 하늘을 날았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양탄자처럼 하늘을 날았다. 오석이 팔을 뻗어 날아가는 신문을 잡았다. 두 장은 잡았고, 나머지는 멀리 날아가버렸다.

포획한 신문을 펼치니 낯 익은 사진이 보였다. 정우 얼굴이 신문에 박혀 있었다. 5월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정우를 이렇게라도 본다.

정우 성격에 먼저 연락할 리 없다. 그렇다고 오석이 먼저 연락 하자니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겁이 나고, 어색하기도 하고 그래서 또 주저하고. 그렇게 시간만 지났다.

신문 기사로라도 정우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그런데 기사 내용이 뜻밖이다.

‘피아니스트 디누 체포’

뭐? 정우가 체포? 이게 뭔 소리야?

눈이 번쩍 뜨였다.

경찰은 9월 8일 오후 두시, 경상남도 울산시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디누(본명 권정우, 19세)를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노사관계법,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디누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연주한 뒤 귀국한 지난 8월 17일부터 근로자들의 불법 파업 현장을 여러 차례 찾아다니며 음악회 명목으로 불법 집회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1982년, 중학생 신분으로 뮌헨 실내악 콩쿠르, 취리히 피아노 콩쿠르 등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수상하여 세계 음악계를 놀라게 하고 지난 7월 세계 최고의 권위있는 음악제인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독주자로 연주하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던 디누가 좌익 폭력 사태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국내는 물론 세계 음악계 주요 인사들이 충격과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

그리고 기사 옆에 정우의 얼굴 사진과 함께 지난 6월 항쟁때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학생들을 앞에 두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외신 사진이 나란히 실려있었다. 이 사진은 한강의 기적에 이은 우리나라의 또 다른 기적, 6월 민주항쟁의 상징처럼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퍼져 나갔고,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미국에서 무슨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그 미국 기자가 멋대로 붙인 ‘건반 위의 체 게바라’ 라는 제목이 정우의 또 다른 별칭으로 알려졌다.

오석은 이 말이 너무 싫었다. 체 게바라라니. 갖다 붙이기는. 이렇게 혁명을 낭만화 하는 자들이 싫었다. 어떤 혁명도 결국은 피를 흘리고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 역시 남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인물 아닌가?

정우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오석은 정우가 연주했을 음악이 선동적이거나 프로파간다 목적의 음악이 아니었을 거라 확신했다. 그저 아름답고 감동적인 음악이었을 것이다. 정우가 그 연주를 한 까닭도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6월도 명동성당도 시위대도 전경도 모두 어우러져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노동자들 파업 현장에서도 폭력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그런 연주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파업중인 노동자를 불러 모아놓고 모차르트를 연주했을지도 모른다. 오석이 아는 정우는 그런 놈이다.

그런 정우를 체포하다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쿵거렸다. 이 느낌이 뭘까? 분노였다. 분노가 느껴졌다. 박종철 선배가 고문당하다 죽었다는 뉴스를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공포였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다.

이제야 오석은 자신이 6월의 그 물결에서 비켜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까닭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소신도 아니고, 수현을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무서워서였다. 1월, 박종철 선배의 뉴스와 함께 덮어씌워진 엄청난 공포의 그림자가 계속 붙잡았던 것이다. 거기에 고등학교 때 그 엉망이 되어버렸던 축제의 악몽이 그 악몽의 주역인 성진이 같은 사범대학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되살아나 그 그림자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이 쏟아졌다. 정우의 얼굴을 사진으로도 차마 볼 수 없다. 오석은 몸을 부시시 일으킨 뒤 신문지를 마구 구겨버렸다. 정우의 얼굴도, 명동성당도 같이 구겨졌다. 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함께 떨어져 나가길 기대하며 구겨진 신문지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 나니 등이 까끌까끌했다. 오래 누워있다 보니 잔디 몇 조각이 마치 송곳처럼 옷에 박혔다. 팔을 뒤로 구겨 등을 탁탁 두드려 털어 보지만 아무리 팔을 꺾어도 등 전체를 커버하기는 무리고, 두드려서 털어질 것 같지도 않다.

문득 수현이 옆에 있으면 하나 하나 뽑아 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구겨 버린 신문지와 함께 털었다고 믿었던 그림자가 수현이라는 이름과 함께 일제히 되살아났다.

도서관에 처박혀 하루 종일 공부하다 몰려나오는 학생들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우울해 보였다. 하지만 오석은 저들이 부러웠다.

저들은 공부라도 하고 있다. 일부는 미래의 안락한 삶을 위한 취직공부, 고시공부나 하는 이기적인 놈들도 있을 것이고, 공부가 좋아서 하는 이상한 놈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아무런 목적 없이 단지 할 줄 아는 게 그것 뿐이라서 본능적으로 공부하는 얼빠진 놈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6월의 광장에서 이탈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시험거부에는 동참했을 것이니까. 어쩌면 교내 집회 혹은 가두 집회에 한 두 번 정도 기웃거려 보았을 것이니까. 민주주의를 위해? 집단의 압력이 두려워서? 혹은 단지 한 학기 시험을 거부함으로써 그 동안 시대의 소명을 외면하고 자신의 출세에만 매진한 원죄를 씻기 위해?

이 시대는 오석과 그들의 차이를 무시한다. 이 시대의 기준은 단 하나뿐이다. 아크로폴리스에 있었는가 없었는가? 시위에 참가했는가 안 했는가?

왜 사람들은 흑과 백만 인정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단 최면과 다른 꿈이 있음을 이해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이해해 주지 않는 것 정도도 큰 상관없었다. 그러나 왜 꿈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적인 교류마저 끊어버리는 것일까?

이건 좋지 않다. 이러다 정신적 자학에 빠질 것 같다. 벗어나야 한다.

이때 구원의 빛이 번쩍였다. 도서관에서 몰려나오는 군상들 속에서 수현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수현아!”

오석은 자기 목소리에 놀랐다. 이렇게 큰 소리가 튀어나오다니.

수현도 깜짝 놀란 눈빛으로 오석을 보았다. 오석이 빠른 걸음으로 수현에게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현이 눈길을 거두더니 몸을 훽 돌렸다. 게다가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이게 또 뭔 상황이지? 도망가는 거야?’

오석의 뱃속에서 뭔가 불끈했다. 오석이 달렸다. 수현도 낌새를 챈 듯 달렸다. 하지만 오석은 책상물림 이미지와 달리 100미터를 13초 플랫에 끊을 정도로 운동을 잘하는 편이었다. 키가 작고 조금 통통한 편인 수현이 아무리 달려봐야 소용없었다. 5초도 지나지 않아 오석이 수현을 앞질러 가 길을 막았다.

“왜 그래? 그 동안 어디 있었어?”

하지만 수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비켜.”

“못 비켜.”

“비켜.”

“절대 못 비켜.”

“그러시던가. 길은 넓어.”

수현이 오석의 옆으로 피해 갔다. 오석이 옆 걸음질을 쳐 그 앞을 다시 막았다.

“촌스럽게 왜 이래?”

수현이 노려보았다. 오석은 T라인이 뚜렷한 수현의 얼굴이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는 호랑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눈빛이 너무 이글거려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억지로 그 눈빛을 마주 보며 버텼다. 마침내 체념한듯 수현의 목소리 톤이 내려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면서 얘기해.”

그들은 말없이 걷다 자하연 연못가에 있는 작은 벤치 앞에 멈춰섰다.

“여기서 말할까?”

“그래.”

오석이 먼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현이 따라 앉았다. 거의 포개지다시피 옆에 바짝 붙어 앉곤 하던 1학기때와 달리 사이에 사람 하나 앉아도 될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자, 할 말 있으면 해.”

수현이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오석은 도저히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언성을 조금 높일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왜 그래?”

“뭘?”

“왜 피해?”

“내가? 뭘?”

“연락도 안 되고, 8열람실도 안 오고, 지금은 나 보고 무슨 벌레 피하듯 도망치고 있잖아?”

“꼭 듣고 싶어? 꼭 말로 해야만 해?”

“응. 꼭 들어야겠어.”

“후회 안 해?”

“후회 안 해.”

“그렇다면…. 네가 싫어.”

이게 뭐지? 오석은 누군가 휘두른 야구 방망이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단 네 글자, 네가 싫어, 이 네 글자. 차라리 듣지 말 걸 하는 후회가 쏟아졌다. 머리가망치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마음에 충격을 받으면 몸도 아프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충격 받으면 피라도 토할 것 같았다.

“왜?”

또 후회. 오석은 이 순간에 어째서 “왜?”라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수현이 이번에는 세 글자로 대답했다.

“하영이.”

“하영이가 거기서 왜 나오는데?”

“너 하영이랑 잘 지낸다며?”

기가 막혔다. 설마 이게 이유야?

“그리고 민경이. 너 아주 바람둥이더라.”

아니 이건 또 뭐지? 이제는 오석도 입이 트였다.

“네가 계속 거절 했잖아? 세번 씩이나? 비싼 음악회 표 썩힐 수 없어 집에서 가까운 민경이 불렀어. 그 뿐이야.”

“그럼 그냥 민경이 주던가. 꼭 같이 가야 했어?”

“그거 너무 생트집 아니야?”

“민경이 다이어리에 깨알같이 적어 놓은 네 글씨 봤어.”

다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홧김에 저지른 유치한 짓거리가 이런 엄청난 부작용을 불렀구나 싶었다. 수현이 질투라도 일으킬까 하는 치졸한 마음에서 한 짓인데, 질투가 아니라 원 스트라익 아웃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수습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오석은 깨끗하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난 민경이한테 아무 감정 없어. 믿어도 돼.”

“그럼 하영이는?”

아니 이건 웬 다카포지? 민경이 수습하면 하영이로 돌아가는 건가? 그래도 할 수 없다. 오석은 계속 수습했다.

“하영이도 아무 감정 없어.”

“정말? 못 믿겠는 걸? 너희 포크 댄스 추는 거 보니까 정말 잘 어울리더라. 춤만 추는 게 아니라 종알종알 이야기도 많이 하고. 손 꼭 잡고 바짝 붙어서. 학교 밖에서도 자주 만난다며? 하영이 같이 예쁜 애랑 그러면서 아무 느낌 없다고? 그 말을 믿으라고? 가족한테 소개까지 시켜 놓고는? 아니, 아니, 안 돼. 안 돼.”

수현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벌떡 일어섰다.

“무슨 소리야?”

“그냥 여기서 끝내.”

“끝내다니? 제발. 너까지 그러지 마. 사랑한단 말이야”

“참 빨리도 그 말 한다. 그것도 다 소용없게 된 다음에. 미안해. 안 그래도 편지 썼더랬어.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 보니 개강해버렸고. 그래. 솔직히 말할 게. 민경이, 하영이 때문만은 아니야.”

수현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럼 왜?”

오석은 또 왜 라고 말하고 말았다.

“미래 때문이야.”

“미래라니, 무슨”

“우리 사이에 미래가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그 뿐이야. 욕하려면 욕해.”

“미래가 없다고?”

“그래. 난 네가 날 행복하게 해 줄 거라 생각했어. 데모 같은 것도 안 할 것 같고. 귀여운 면도 있고, 마음도 착하고. 하지만 막상 내 품에 안고 보니, 예술가 나부랭이 타령만 하더라. 미래가 딱 그려졌어. 돈 한 푼 못 벌어오면서, 유산 탕진해 가면서 원고지나 끄적거리는 그런 미래. 게다가 나한테 충실할 것 같지도 않고. 너, 바람 끼 있는 거 몰랐어? 이상. 얘기 끝이야. 그래도 그 동안은 즐거웠어. 참, 민경인 내 친구야. 상처 주지 마. 잘 해 줘. 하영이랑 양 다리 걸쳐놓고 애매하게 하지 말고. 하영이는 싫거든. 이제 더 이상 용건 없지? 난 간다.”

수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도도한 걸음으로 후생관 쪽으로 내려갔다.

이제 오석에게 쫓아갈 힘도 다 빠져버렸다.

이럴 수가! 실연을 당했다. 소설에서, 연극에서, 영화에서만 봤던 실연이 바로 현실이 되었다. 과 친구들 거의 모두와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감수하며, 심지어 죽마고우 정우마저 멀어지며 선택했던 사랑이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더 비참한 것은 실연을 당했는데도 아무런 감정의 일렁임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실연이 창작의 불꽃인양 작품을 쏟아냈다. 하지만 오석은 그냥 멍할 뿐이었다.

다만 숨이 잘 안 쉬어졌다. 허파에 뭔가 답답한 것이 들어찬 것 같았다. 이 답답한 것을 좀 털어내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석은 깨달았다. 실연은 시도 음악도 만들지 못한다. 몸과 마음이 다 같이 마비시킬 뿐이다. 그 많은 낭만주의 작품들은 그냥 거짓부렁이다. 다만 상상속의 실연일 뿐이다. 진짜 실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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