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없는 아이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임상실습을 지도하다 보면 의례적이거나 혹은 뭐라도 더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에 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질문을 받는 건지 아닌지도 애매모호한 이 멘트, 배우고, 공부하는 게 일인 학생들의 입장에서 지도 선생님에게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의 관계이고, 각자 맡은 역할인 것을!
나라는 지도자의 질문은 항상 똑같지만 듣는 학생은 저마다 다양한 그들의 관점에서 최선의 대답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들의 최선은 고작 십여 년 먼저 했을 뿐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나라는 인간을 만족시키기에 뭔가 아쉽기만 하다.
“뇌성마비 하지마비 맞나요?”
“오른손에 강직이 있는 게 맞나요?”
“바닥핵 손상인가요?”
다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귀한 미래의 작업치료의 기둥들은 슬그머니 본인들이 대답할 수 있는 여지를 두며 연계질문을 유도한다. 그렇지만 책 속에 있는 세상에서 벗어난지 오래된 선배로서 엉뚱하게 대답하는 것이 내가 가진 특권이지 않겠는가? 바로 권력을 휘둘러준다.
“이 친구 이름부터 궁금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죠?”
순간 나와 아이, 그리고 학생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흐른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이름도 모르는 유기체들이 서로를 보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누군가 가진 기능적 한계를 꼬집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유기체들은 서로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한낱 인간이라는 종으로 분류되어
신체적 한계는 어디인지를 알아내려고 애쓴다. 정말 애를 많이 쓴다.
인간은 약하지만 사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기에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
누군가에 의해 넣어진 치료실 안에서 이름도 없이 기능만 남아 눈앞에서 실종선고된 매트 위의 아이는
누구든지 이름을 기억해 줄 때 비로소 사회 속에 태어난다. 누군가 먼저 이름을 알고 싶어진 순간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같이 귀한 이름을 누군가 알아봐 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렇게 사람과 만나는 공간에서 아이들의 존재가 무사히 그들의 삶으로 돌아간다. 가정 그리고 사회로.
마비가 있거나 손상이 있거나 혹은 무엇인가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깍두기들에게 오늘 만큼은 자랑할 일을 하나 만들어주자.
오늘 나만 바라보는 대학생 언니, 오빠에게 이름을 알려주었다고.
무려 대학생 큰 형, 누나가 ‘나’를 알고 싶어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