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사과가 꼭 최종 해결책이여만 할까?
이런 배경을 가진 일본 정치가들에게 진정한 위안부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아쉽게도 절대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사건을 양심의 문제 혹은 정의의 문제로 끌고 가지만, 고도의 정치 엔지니어링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가들에게 양심과 정의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철저히 권력이라는 유일한 목표에 따라 계산하고 움직일 뿐입니다.
이건 한국 정치인도 마찬가지
그런 그들이 조상의 만행을 사과하는 것은 전범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 후손들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죠.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보편적인 선의의 양심과 정의와 같은 인간적인 감정으로만 국민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대중들은 사과는 커녕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을 보고,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 생각하지만, 사실 양심의 문제가 아닌 것이죠.
자주 언론에서 폴란드 유대인 추념비에 참회의 무릎을 꿇은 서독 총리와 비교를 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역알못을 인정하는 꼴로, 행동의 결과만 중시할 뿐 그 행동이 발생하기까지 있었던 수많은 갈등과 배경, 협력 등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서독 총리 브란트만 하더라도, 오래전부터 나치의 탄압을 피해 각국을 떠돌며 무국적자 신분이 되었을 정도로 뿌리 깊은 반 나치이었습니다. 전후 독일은 철저하게 과거 히틀러와 나치의 유산을 청산한 덕분에, 그 결과 반 나치의 이력을 가진 브란트가 총리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청산의 일환으로써 유대인 사과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죠.
반대로 일본처럼 과거 청산이 제대로 안되었다면, 적어도 이러한 사과는 수십 년 미뤄졌을 것입니다.
과거와 달라졌다는 모습을 연출하기에 브란트의 퍼포먼스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누군가라도 반드시 했을 것이죠.
물론 진심이 담긴 사과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특성상 어느 특정 한 가지 생각만 담기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1편에서도 말했듯이, 현 일본 정치계는 과거 전범의 후예에 의해 사실상 지배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과거와의 단절 대신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아직 전쟁의 끔찍한 기억이 선명했던 60~80년대에는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전범과 그 후손들에 의한 꾸준한 역사 미화 왜곡 사업을 통해, 이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을 정도이죠.
오히려 우리에게 끔찍했던 시기는 아슬아슬하게 전쟁을 져서 저문 일본의 황금기가 되었고, 그들의 망언과 역사 인식은 바로 이 선상에 있습니다. '서양 제국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 위대한 천황의 군대'는 성 노리개와 같은 비 인륜적인 행위와 당연히 거리가 멀어야 합니다.
일본의 황금기를 이끈 전범들은 마땅히 야스쿠니 신사에서 국민의 참배를 받을 이유가 충분하고, 그 후손들은 이러한 향수를 이용해 끊임없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것이죠. 당연히 위안부의 실체를 인정하여, 사과를 할 수가 없는 메커니즘입니다.
인권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은 집어치우자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위안부 사과 및 과거 반성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일본은 계속 이러한 거짓된 가면에 집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엄연히 주권 국가의 내정에 간섭해 우리가 뭐라 할 수가 없죠. 우리보다 국제적 파워도 강하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월등한 일본을 상대로 그 가면을 벗기는 일은 엄청난 힘이 듭니다.
게다가 일본의 이러한 전략은 꽤나 성공했습니다. 아직도 서구에서 바라보는 독일은 그저 히틀러와 나치가 전부입니다. 현대 과학, 지적 유산이 대부분 18~19세기 독일 출신 천재들의 작품이고, 히틀러의 역사를 완전히 청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일에 대한 관심은 히틀러와 그의 시대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같은 전범 국가이지만, 일본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오히려 원자폭탄에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희생자' 이미지가 있을 정도.
결국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원하는 한국과 그럴 의도가 눈곱만큼도 없는 일본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물론 국제적으로 이웃 나라와 사이가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만의 지정학적인 특성상 한국은 일본, 그리고 미국과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중국은 절대 믿을 수 없는 상대입니다. 중국의 낙후된 인권과 자유 등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미래 미국을 제치고 진정한 슈퍼 파워로 등극할지도 의문인 상태입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족의 오랜 원수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일본과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아니,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단지 물건을 파는 시장에 불과하지만,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굶주린 시절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과거사 문제, 즉, 일본 정치인의 망언, 위안부 피해 사과 등으로 인해, 한일 관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원점으로 되돌아와 악화되기를 반복합니다.
위안부 및 강제 징용 피해자가 몇 분밖에 살아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절대 사과할 생각이 없는, 아니 절대 사과를 못하는 일본 정부와 강대강 대치만 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 언급한 것처럼, 전범의 후손이 정권을 잡고 있는 일본 정치계에서 과거사를 사과할 가능성이 전무합니다. 그랬다가는 반대파에게 약점을 잡혀, 의석 및 정권을 내줘야 하죠. 그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사과 요구는 씨알도 안 먹힙니다.
게다가 한국 정부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합니다. 일본 피해자의 보상으로든 배상으로든, 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인 피해자에게 직접 '보상'을 주려고 했으나, 정부에서 이를 반대, 직접 돈을 받아 분배하는 대신 슬쩍하여 포스코 설립 등 경제 개발에 투입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때 돈을 혹은 포스코의 주식을 피해자에게 전달하였더라면, 일본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08년 정부에서 위로금 항목으로 일부 지원). 그 결과, 그중 살아계시던 일부가 전범 기업에게 피해 보상 소송을 걸었고, 한국 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내림으로써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이 시작되었죠.
한국 정부가 개인에게 갈 돈을 삥땅 친 것에 대한 말은 잘 안 나옴
대신 한국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에서 받은 돈은 합법적인 행동에 대한 대가인 '보상'일 뿐이고, 일제 식민 지배는 불법이므로 불법에 대한 대가인 배상이 따로 있어야 된다고 함으로써, 일본을 자극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은 멍 때리고 있다가 뒤통수 맞은 격일 듯. 돈 주면, 알아서 분배한다며?
죄를 인정한 독일 정부라도 화가 났을 듯
최대한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전범 국가 일본은 같은 돈이라도 불법 행위 의미가 있는 배상 대신 보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고, 한국은 반대로 배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돈이 급했던 한국은 상대방을 강하게 압박하지 못하고 식민 지배가 불법(배상)인지 합법(보상)인지 정하지 못한 채 애매모호하게 뒤 끝을 남긴 채 마무리했습니다. 그 결과, 1964년 6월 3일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죠.
최대한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전범 국가 일본은 같은 돈이라도 불법 행위 의미가 있는 배상 대신 보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고, 한국은 반대로 배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돈이 급했던 한국은 상대방을 강하게 압박하지 못하고 식민 지배가 불법(배상)인지 합법(보상)인지 정하지 못한 채 애매모호하게 뒤 끝을 남긴 채 마무리했습니다. 그 결과, 1964년 6월 3일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죠.
그 당시 조약을 보면, 요즘처럼 치밀하지 않아서 법적으로 빈틈이 많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점을 파고들었던 것이지만, 일방적인 한국 정부의 주장과 달리 다양한 법리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일본은 일본에 유리하게, 한국은 한국에 유리하게 판단하죠.
하지만 100% 한국 정부에게 유리한 것이 아님에도, 한국 정부는 지나치게 서둘러서 일본 및 미국을 자극했습니다. 돈을 추가로 받아내면, 당연히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현명한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정부 특유의 비전문성을 자랑하듯, "그딴 거 몰라, 못 먹어도 고" 하고 달려들었죠.
그 결과, 일본 정부가 배상 판결에 대한 복수로서 수출 제한을 하자,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 했던 정부는 엄청 당황했습니다. 비록 국민적인 일본 혐오증은 전래 없이 강해졌지만, 결국 양국 모두 전혀 이득 없는 싸움이 되었죠.
자세히 살펴보면, 정부에서 독도, 위안부, 과거사 문제를 문제 삼을 시기는 늘 정부가 국내에서 정치적 어려움을 겪을 때입니다. 보통 레임덕에 시달리며 인기가 없는 정권 말기나 선거 전,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기 위한 퍼포먼스의 일환으로써 대중들이 민감한 일본 문제를 꺼내들었습니다. 양 국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위안부 및 과거사 문제를 한국 정부가 꾸준히 세게 푸시 안 하는 이유이죠.
진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정권의 힘이 가장 강하다는 초기에 이 문제를 이슈화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무역 전쟁과 그로 인한 경제 침체 등 정치가가 싫어하는 일이 줄줄이 발생할 테니까요.
의도성 짙은 한일 정부의 갈등 조장으로 인해, 결국 국민들만 손해 보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품질 좋은 유니클로 방문을 멈췄지만, 여당 수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식당에 방문하죠. 가장 큰 피해자는 이제는 진짜 몇 분 밖에 생존했을 뿐인 위안부 및 강제 징용 피해자들.
정부의 보여주기 식 퍼포먼스에 일말의 희망을 수십 년째 품었지만, 결국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최근 정대협 윤미향 사건에서 보듯, 이용당하기만 했죠.
물론 이러한 '수작'을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응당, 정치란 그런 식이니까요. 국민의 바람과 도덕적인 올바름 문제를 떠나, 현실적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일본은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고, 우리는 주권 국가인 일본에 강제로 사과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죠.
변호사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야기
다만 아쉬운 것은 이미 흘러간 과거에 얽매여 양국 사이가 계속 악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좁은 의미로만 이해할 뿐입니다. 원수를 잊지 말고,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죠.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얽히고 `설킨 인간의 원한 속에서 복수와 같은 감정은 그야말로 로맨틱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따지면 철천지 원수는 중국 따지다 보면, 그 시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기조차 힘들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의 진정한 뜻은 역사를 잊지 않고 그 분노를 외부 가해자에게 분출하는 좁은 의미로서가 아닙니다. 역사를 잊지 않고 반성하여 다시는 과거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자기반성적인 의미이죠. 역사는 항상 반복되는 것이고, 과거의 슬픔을 교훈 삼아 미래에는 비극적인 실수를 막자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후손들이 이미 흘러간 과거에 집착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우리 조상들이 원할까요? 조상들이 준 선물(present)인 현재(present)를 즐기길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 후손에게 과거의 비극을 물려주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죠.
그런 점에서 꼭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과거사 문제 해결의 최종 목표로 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5월 25일 이용수 할머니의 2차 기자 회견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현재 사죄와 배상을 중심인 방식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통해 접근할 수는 없는지요?
이 할머니는 “‘데모(위안부 운동)’ 방식을 바꾸자는 것이지, 끝내자는 건 아니다”라며 “위안부 문제의 사죄와 배상은 천 년이 가고 만 년이 가도 반드시 일본이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 할머니는 “사죄 배상은 무엇 때문에 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를 위해 한국과 일본이 친하게 지내면서 올바른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억울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은 우리 학생들”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에게 최근 초점이었던 배상 혹은 보상이 과연 중요할지 개인적으로 의문입니다. 그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일본이라는 감정적인 적으로 돌린 것 밖에는 어떤 이득도 없었죠.
또한 일본 정부는 절대 사과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다고 해도, 이용수 할머니의 말씀처럼, 일본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사과를 하는지 이해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실상 이제는 일본 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 및 사과 요구는 그만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신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강해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을 본 받을 필요가 있죠.
위안부 문제가 90년대에서야 공론화된 것처럼,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추모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70년대에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유럽 큰 도시 대부분에서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찾아볼 수 있고, 너무나 유명한 역사적 사건인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유대인조차 거부했습니다. 자신들이 허약하고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영구적인 기념비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홀로코스트 추모를 통해, 이미 끝났고 불과 얼마 전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되살림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을 보상해 줄 실용적인 이득이 전혀 없었죠.
과거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경험이 있던 유대인 철학자 예후다 엘카나는 그의 저서에서 '유대인이 영원한 희생자라는 홀로코스트의 교훈은 비극적이면서도 역설적인 히틀러의 승리'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틀에 잡히고, 중동 여러 국가와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점자 홀로코스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 위안부 문제처럼 홀로코스트는 신성시되어 어떤 비판을 허용치 않은 위치로 올라섰습니다. 단순히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잔인성,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별개의 위상을 지닌 사건이 되었죠.
그 결과, 프라하 돌길에 공산주의 정권이 파괴한 유대인 묘비석을 활용했다는 별 시답지 않은 뉴스가 최근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현 일본 정부는 절대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정부로 계속 사과를 원하는 한국 정부가 오히려 웃길 지경. 특히 여성의 인권이 높아진 요즘, 이러한 모습에 반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더없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똑똑하다고 말하는 유대인은 자신의 문제를 전 세계 문제로 확장시켰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해결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정작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윤미향 사건을 보니, 더욱 마음이 씁쓸해지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