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 story by 역사 Jul 21. 2020

강국 프랑스는 왜 힘없는 수탉을 상징으로 삼았지? 2편

1주 1닭의 치킨왕 앙리 4세

국 달러 지폐에 있는 독수리 문장처럼, 프랑스의 수탉 역시 머나먼 동방에 있는 우리에게도 제법 친숙한 편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도 꽤 자주 입는 브랜드 '르꼬끄 스포르티브(Le Coq Sportif)'의 로고가 바로 수탉이죠.

브랜드의 의미가 '스포츠 수탉'이다



특히 남자라면, 수탉은 더욱 친숙합니다. 음바페와 같은 유능한 선수의 등장으로 요즘 제법 프랑스 국가 대표의 경기가 인기 많기 때문입니다. 새벽 시간에 경기를 보며 먹는 수탉 치킨 +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죠?

지단 은퇴 후 한때 늙은 수탉이라는 조롱도 당하기도 했다..


한국 국가 대표 유니폼에 호랑이가 있는 것처럼, '뢰 블레' 유니폼에는 큼지막하게 수탉이 있습니다. 1998년 지단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월드컵에 우승한 만큼, 수탉 위에는 커다란 별이 빛나고 있죠. 다행히 패션을 아는 민족답게, 유니폼 후원은 최근 나이키에서 받고 있습니다.



만약 자국의 르꼬끄 스포르티브에서 받았다면, 좌우 양쪽 가슴에 두 마리의 수탉이 있을 뻔했습니다. 아무리 샤넬과 루이 뷔통을 만드는 나라라도, 두 수탉은 쫌...  



무래도 잉글랜드 국가 대표팀 유니폼에 있는 사자보다는 수탉이 그 자체만 봤을 때 조금은 우습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도 프랑스와 수탉이 처음 엮이게 된 계기도 바로 '조롱'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일대 지역을 로마인들은 라틴어로 Gallia라고 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단수형)을 Gallus(복수형으로는 Galli)라고 불렀습니다. 근데 마침 라틴어로 수탉도 gallus(소문자). 철자는 서로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른 동음이의어인 것이죠.


과일 오렌지가 네덜란드의 상징 색이 된 이유도 왕실 가문의 성이 바로 Orange이기 때문인데, 역시나 철자만 같을 뿐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다


즘도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을 쉽게 볼 수 있듯이, 중세 프랑스를 견제하던 많은 라이벌들은 프랑스를 수탉이라고 조롱했습니다. 


라틴어라는 이유로 가끔 그 조롱의 기원이 로마 시대부터 있다는 잘못된 정보의 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갈리아라 함은 단순히 지역적인 개념이었을 뿐, 오늘날 프랑스와 같은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부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갈리아 민족이 아니라 트레베리 족, 수에시오네스 족 등이 있었습니다. 수탉이라고 놀릴 대상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죠.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했지만 라틴어가 각종 공문서나 상류층의 공식 언어이었고, 비로소 Gallia = 프랑스라는 개념이 막 생성되던 시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조롱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이죠.


강렬한 원색 사용으로 인해 야수적이라는 놀림을 당했다


지만 이런 조롱, 절대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깊은 상처를 받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화살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모습을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야수파, 인상파와 같은 현대 미술사조의 대부분 명칭이 평론가들의 비아냥에서 유래했고, 그 결과 해당 평론가들은 영원히 고통받고 있고 있죠. 


프랑스 역시 그런 조롱을 이겨내고, 수백 년간 유럽의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 덤벼야 겨우 힘의 균형이 맞을 정도로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어떤 공통된 습관과 특징을 발견할 수 있죠? 그중 하나는 바로 콤플렉스와 약점 극복.

극복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콤플렉스와 약점이 아니다


베드로를 일깨우는 수탉


비록 허풍을 떨 듯 큰 소리로 울고 둔한 이미지의 수탉이지만, 한편으로 가톨릭에서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부정과 회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첫 닭이 울자, 첫 닭이 울기까지 3번이나 배신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한 베드로가 마침내 회개했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로 인해, 시간을 알리는 성당 종 탑 끝에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닭의 조각상이 있는 이유입니다.



꼬는 의미가 강했던 수탉은 종교적인 의미로 완벽히 재창조됨으로써, 국가 프랑스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바로 전통 가톨릭 종교의 수호자


의심에 품었던 베드로를 수탉의 울음소리가 일깨워준 것처럼, 프랑스는 잘못된(?) 종교에 빠진 유럽 사회를 바로잡는 기독교 세계의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결과 수탉으로 놀리던 이웃 국가들이 수없이 털렸다 중세는 늘 종교가 문제이었던 만큼, 유럽 역사의 중심에 항상 프랑스가 있는 이유이죠.


그 힘의 원천에는..


부분 농사가 가능한 광대한 영토와 높은 출산율(요즘 갑자기 성관계 횟수 1위 국가가 된 게 아니다)로 인한 많은 인구, 유럽 어느 나라보다 빨리 이룬 중앙집권화로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중세 이후 프랑스는 유럽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국력을 가졌습니다. 


특히 그 절정은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
루이 14세가 세운 베르사유 궁전


단절된 스페인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물론 자잘한 동맹국이 있었지만..)는 홀로 당시 유럽 강대국들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과 맞서는 무쌍을 보여 주었습니다. 초강대국 프랑스가 스페인마저 합병할 시, 유럽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수많은 강대국이 동맹을 맺었지만, 결국 스페인 왕의 자리는 기어코 루이 14세의 손자가 이어받았습니다. 

즉, 현재 스페인 왕가의 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계통


그러나 루이 14세는 5살 채 되기도 전에 왕이 되었습니다. 즉, 그 말은 사실 그는 단지 선조가 이룩한 국력을 펑펑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강대국들이 연합해야 겨우 상대가 되었던 초강대국 프랑스를 만든 사람은 루이 14세의 할아버지인 앙리 4세.


앙리 4세


치킨 왕 앙리 4세


리 4세의 업적은 단 한 줄로 요약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짐은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라는 그의 맹세가 바로 그것이죠. 물론 약 500년 전 이야기인 만큼, 21세기에 풍족한 나라에서 사는 우리로서는 그 의미가 체감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이웃 나라는 21세기에도 허구한 날 '흰쌀밥에 고깃국' 타령하고 있습니다. 워낙 서양 사람은 고기가 주식이라는 편견이 강하여 과거부터 고기를 풍족하게 먹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이 살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


서민들의 단백질


과거 일반 사람들은 단백질을 스테이크 대신 주로 청어, 대구와 같은 물고기로 섭취했었죠. 한국에서 곱창, 막창과 같은 내장 부위를 그 어느 나라보다 즐겨 먹게 된 이유 역시 제대로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했던 서민에게 그 부산물마저 무척이나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앙리 4세의 맹세는 엄청난 것이었고, 실제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기치가 있습니다. 오늘날 수탉이 프랑스의 상징이 된 것은 단순히 언어유희 때문이 아니었던 것.



오늘날까지 수탉이 프랑스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수탉에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한국에서 치킨집은 중산층 몰락의 상징 그 결과, 종교가 더 이상 과거처럼 큰 영향이 없는 현대에서도 수탉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앙리 4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개종을 4번이나 했던 풍운아. 종교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중세, 앙리 4세는 가톨릭을 믿는 아버지와 개신교를 믿는 어머니(사실상 프랑스 속국인 나바라 왕국의 왕비)의 자녀이자 프랑스 왕의 친척으로 태어났습니다. 마치 커다란 출생의 비밀이 있는 아침 막장 드라마에서 많이 본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태어나자 가톨릭 세례 받음


하지만 어린 시절, 부친이 가톨릭 측에 서서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에 개신교를 믿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1차 개종하였습니다. 그 후,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나바르 왕이자 프랑스 개신교의 우두머리가 되었죠. 


부러진 창이 투구 틈새로 앙리 2세의 눈에 박히다



당시 중세는 종교 분쟁이 극심했던 만큼, 앙리 4세는 프랑스 왕의 가장 주요한 적이었으나, 프랑스 왕실의 유력한 왕위 상속자이기도 했습니다. 1559년 앙리 2세가 어처구니없게 마상 창시합(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것이라고..)에 의해 죽은 후, 그 아들인 프랑수아 2세마저 즉위 2년도 안되어 사망했고, 현 국왕인 샤를 9세 역시 유약하고 후계자를 두지 못하는 등, 갑자기 남자가 귀해졌기 때문이죠. 

피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던 사회이었던 만큼, 가톨릭을 믿은 프랑스 왕실은 앙리 4세와의 결혼을 통해 화해를 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당시는 작은 불씨에도 언제든 폭발할 수 있었던 시대... 결혼식 축제가 개신교도를 살해하는 대학살로 바뀌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일명,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새신랑 앙리 4세조차 겨우 목숨을 부지했을 정도. 가톨릭으로 개종 후 3년 동안 감금되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영화가 한창 외모 전성기이었던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여왕 마고'


를 9세가 죽은 혼란을 이용해, 탈출한 앙리 4세는 다시 한번 개신교로 개종 후, 학살 사건으로 인해 열받은 개신교의 수장이 되어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근데 샤를 9세의 동생으로서 국왕이 된 앙리 3세의 유일한 후계자, 앙리 3세의 동생마저 급사하자, 앙리 4세는 유력한 상속자에서 앙리 3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뭐라? 앙리가 어쩌고 어째?


간단히 말하면, 앙리 2세의 아들 중 3명이 모두 급사했고, 사촌인 앙리 4세가 유일한 후계자


개신교인 차기 왕을 인정할 수 없었던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세력 간 종교 내전이 더욱 심각해지는 가운데, 그 사이에서 살짝 쩌리가 된 것에 기분이 상한 왕 앙리 3세는 가톨릭 세력의 수장을 암살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광신적인 가톨릭 수도사에 의해 암살되며, 프랑스 왕관은 넝쿨째 앙리 4세의 손에 들어가죠.
스토리 전개가 어째 아침 막장 드라마보다 더하다 



실상 그를 방해할 세력은 모두 사라졌으나, 앙리 4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개신교로서 왕이 되는 한, 내전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로 종교가 다른 부모의 사랑 속에 태어난 앙리 4세는 사실 종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듯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여러 번 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파리는 미사를 드려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


이와 같은 말을 남기며, 앙리 4세는 다시 한번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오랜 내전에 지친 프랑스 가톨릭 세력은 그를 그동안 치열하게 싸운 것에 비해 너무나 쉽게 인정했습니다. 이미 종교의 차이가 의미가 없었던 앙리 4세는 그 유명한 낭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개신교)를 인정했지만, 많이 지친 대다수 가톨릭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죠.  



내전을 수습한 앙리 4세의 프랑스는 무섭게 발전


리 4세의 유명한 '1주일 1닭' 맹세가 나온 것도 이때이죠.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개신교 덕분에 세금은 팍팍 쌓였고, 알려진 애인만 50명이 넘었던 호색한 왕의 나라답게,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비록 앙리 4세는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 당했지만, 그의 손자 루이 14세 이르러 프랑스는 유럽 초초초강대국으로 등극합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허구한 날 전쟁을 벌이며 국고를 낭비한 끝에 결국 프랑스 혁명을 초래했죠.    

물론 역사적으로 루이 14세가 더 유명하지만, 치느님을 접할 때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오늘날 강대국 프랑스를 만든 앙리 4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글을 사용할 때마다, 그 분을 기억하자고요. 






작가의 이전글 강국 프랑스는 왜 힘없는 수탉을 상징으로 삼았지? 1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