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제1장. 그대의 사랑스러운 연인

by 이파리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덧없이 떠나간 아이들아.
한 많은 이른 죽음에 이 어미를 원망치는 않았더냐.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어여뻐 아끼던 내 사랑아.
나는 법도 배우지 못 한 너희의 뱃삯을 치루려하니
아린 슬픔 다 버리고 멀리멀리 떠나려무나.



*


"연수야."


느른한 목소리였다. 연수는 살풋이 내리뜨고 있던 눈을 들어 저를 부른 이를 올려다보았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반들반들 빛났다.


"예, 서방님."


유순하게 답하는 목소리에 묘한 색기가 어린 것은 그저 흔들리는 촛불 탓은 아니었다. 연수는 진득하니 살냄새가 묻어나는 가슴에 얌전히 뺨을 기댔다.


"이쁜 것."


키우는 강아지라도 대하듯 코로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뒤척이는 움직임에 연수의 동작이 잠시 어색해진다.


퉁퉁한 손이 정갈히 땋은 머리칼을 설렁설렁 쓰다듬었다. 두피가 아렸지만 연수는 미동이 없다. 주인의 손길을 즐기는 개처럼 웃는 듯 마는 듯한 입가가 희미하게 씰룩거릴 따름이다.


머리를 문지르던 손이 툭하고 떨어져 나갔다. 소리 없는 긴 하품이 터졌다. 놀부는 다시 한 번 뒤척인다.


연수의 어깨를 주무른다. 습기찬 피부가 질척하게 늘러붙는다. 점차 손힘이 약해지며 곧이어 드르렁 코골이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시간이 지났다. 장지문을 넘은 밤부엉이 울음소리가 잠시 방 안을 맴돌았다.


연수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칼은 어느샌가 풀어졌다. 놀부의 잠버릇이었다.


연수는 앉은 채로 잠시 놀부를 바라본다.


시선이 문득 붉다.


붉은 빛. 피비린내. 치열한 싸움과 강렬한 고통. 연수의 매끈한 콧잔등이 과격하게 구겨졌다.


희고 가느다란 손이 놀부의 목 바로 위까지 올랐다가 멈춘다.


너를, 너만을, 아니, 네 전부를.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네 피를 마셔야만. 그래야만. 아니다. 절망. 그것을 불러와야 한다. 그것만이 끝내는 길. 마지막 방법. 어쩌면 유일한 해방.


아닌가?


모르겠다.


연수의 손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세상 모르는 코골이가 우렁차다.


차게 내리뜬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 그림자가 붉게 흔들렸다.


고요한 시선은 느리게 떨어진다.


야생이라고는 모르는 순진한 인간은 살기라는 것을 모른다. 시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웃을 뿐이다. 헤벌쭉한 입매가 아른거린다.


어리석은 자여. 그 대가를 치를지니.


욕망에 솔직한 것은 본성일까. 아니다. 짐승도 그렇게는 살지 않는다. 욕망은 욕망이고 삶은 삶일 지어니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다. 가파른 생존 절벽 앞에 욕망 같은 것은 하찮을 따름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가.


그들은 살아남는가. 살아있는가. 살아가는가. 정말로 그것이 삶인가.


저들의 생에는 간절함이 없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 없다.


그래서 잔혹하다.


비로소. 기필코. 마침내. 잔혹하다.


'저 놈의 다리를 분질러라'


저 놈의 다리를 분질러라.


번뜩인다. 입맛을 다시는 혀가 새빨갛다.


이것의 다리를 분지르자. 자식을 빼앗자. 두개골이 부서지는 통증을 안겨주자.


좋아. 너무 좋아. 이것의 피를 마시리라.


지금은 그저 그것을 위한 인내가 필요한 시점.


사냥은 이미 시작되었다.



*


아침은 불호령으로 시작된다.


목청이 좋은 안주인이 고함이라도 지를까 전전긍긍하는 겸인(傔人)의 매서운 호령에 하인들은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잠자리를 정리한다.


하인들을 깨울 겸인조차 눈을 뜨지 않은 이른 시각, 연수가 눈을 떴다.


고요한 시선이 어둠을 훑는다.


놀부의 품에서 감은 듯 뜬 듯 모호한 밤을 보낸 것이 벌써 일주일. 피로는 극에 달았으나 눈빛은 형형하기만 하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연수가 별채를 나섰다. 인간의 귀는 어두워 연수의 외출을 아는 이가 없었다.


하늘하늘 치마가 흔들린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소녀의 모습을 한 제비가 산을 올랐다. 앳된 뺨은 발그레한 기색조차 없다.


맹수와 같은 기세. 그것은 제비의 것이라기보단 잔뜩 약이 오른 독사를 닮았다.


연수의 목에서 인간의 것이라곤 믿기 힘든 지저귐이 터졌다. 신경질적인 외침이었다.


- 성급하기는.


그것은 바닥에서 나타났다. 뭔가가 흙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쉿쉿거리는 목소리로.


연수는 그것이 나타나기도 전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낼 자리를 보고 있었다. 매섭게 치켜올라간 눈이 번쩍 빛난다.


그리고 그것. 풀잎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내밀었다. 붉게 터지는 빛은 연수의 것과 동일하다.


머리는 어린아이 머리통 정도는 한 입에 삼킬 법하고, 굵기는 건장한 장정의 팔뚝보다 굵은 그것은 그야말로 요물이었다.


-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온단다.


그것은 수풀을 전부 해치고 나올 생각도 없는 듯 길다란 몸체의 일부만을 꺼내었다. 나무를 휘감아 올라 연수를 마주본다. 거대한 몸통이 꽤나 굵은 나무를 아담한 나뭇가지처럼 보이게 했다.


"저것의 심장을 꺼내야겠어."


연수가 말했다.


- 아서라, 제비야.


그것의 붉은 눈이 제비를 바라본다. 눈빛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비롭다.


연수는 표독하게 쏘아 붙인다.


"나는 참을만큼 참았다. 저것은 이미 내 손아귀에 있어."


- 아직은 이르다.


구렁이의 입에서 쉿 소리가 샜다. 소리와 동시에 눈에서 작게 빛이 터진다.


그것의 눈은 마치 도깨비불 같았다. 일렁이다가 커지고 그러다가 다시 잔잔해진다. 뱀 특유의 쉿쉿거리는 소리에 맞춰 리듬감 있게 흔들리는 빛. 어딘가 모르게 신령스럽고 그래서 더욱 불길하다.


- 성급하게 굴지 말아라. 네 힘은 완성되지 않았다.


"내 평범한 인간이었어도 목을 비틀 기회가 여럿 있었다. 그것을 네 말만 듣고 참았어. 더는 참을 수 없다."


분노로 들끓는 눈은 이미 시뻘건 빛이었다. 머리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펼친 제비의 날개처럼 서있다.


구렁이가 혀를 찼다.


- 아직도 준비가 안 되었구나. 어리석은 제비야.


"대체 그 말만 몇 번을 하는 것이냐!"


훙. 외침이 파장이 되어 사방으로 퍼진다. 그것은 마치 강한 바람과 같았다. 제비의 분노에 산이 울었다. 털 없는 구렁이를 둘러싼 나뭇잎이 흔들리며 우수수 빗소리를 냈다.


- 몇 번이고 말 했을 것이다. 네가 할 일은 저것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잡아먹는 것이라고. 그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싫다. 어째서 그리해야 하느냐."


- 그것만이 완벽하기 때문이지.


구렁이는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연수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연수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완벽해야 하느냐."


- 그것은 네가 알겠지.


구렁이는 다시 한 번 웃는다. 웃는 순간마다 밝게 빛나는 붉은 안광이 사위를 밝혔다. 주변에는 작은 짐승 한 마리 없다. 고요였다. 산의 침묵이었다.


- 네가 원하지 않았느냐. 새끼들의 핏값을 치루게 하겠노라고.


연수는 작게 입을 벌렸다가


- 네가 원치 않았느냐. 네 삶을 돌려받겠노라고.


도로 닫았다.


"…너는."


- 오냐.


"내게 방법을 알려주겠다 하였다."


- 그리하였지.


"모르겠다."


- 그러하냐.


"내가 무엇을 해야만…."


- 기다려라.


연수의 빛이 어물어물 사라져갔다. 머리칼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남은 자리에는 사춘기 소녀처럼 혼란스러운 눈빛의 여인이 있었다.


- 제비야.


"말하거라."


- 너는 잘 하고 있다.


"무엇을 말이냐."


- 더러운 것에 기대어 살가운 소리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잘하고 있다.


"……."


- 적기가 코앞이다.


스르르. 구렁이의 몸이 땅으로 땅으로 흘렀다. 나무를 감고 있던 몸뚱아리가 바닥으로 바닥으로 미끄러지더니 이내 머리통에 흙이 닿았다.


- 기다리거라.


풀잎이 부딪힌다. 둔탁한 듯 맑은 소리가 어딘가로 흘렀다.


냇물도 아닌 것이 스르르 흘러간다.


홀로 남은 여인은 길고 검은 머리채를 몸에 휘감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하이얀 맨발에 흙을 잔뜩 묻힌 채로. 한참을. 처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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