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대의 사랑스러운 연인
무엇을 기다리란 말이냐.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잠시. 연수는 발을 떼었다. 돌아가야 했다.
잠시 후면 누군가 연수의 외출을 눈치챌 것이고, 그것은 연수의 신뢰를 흔드는 일이었다. 기다려야 하건 하지 않건 연수는 돌아가야했다. 그래야만 저 악독한 것의 다리를 부러뜨리건 심장을 부수건 할 수 있으므로.
더는 신비로운 기운이 남지 않은 연수의 뒷모습은 처량했다. 새벽 이슬의 추위에 떠는 가녀린 여인. 특출나게 어여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특별할 것이 없다.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구렁이는 몇 번이고 말했더랬다.
네가 가진 힘은 그 미모 뿐이라고. 매혹의 힘은 미비하다. 원수에게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는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으리라.
저주 같았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제비의 몸일 적에는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가 있었다. 이제는 그조차 없다.잘 다듬어진 손발톱 어디에 무기로 쓰일 여지가 있단 말인가.
인간이 어리석다고?
우스운 일이다. 지금의 연수만큼 어리석은 존재는 없었다.
차라리 제비였다면 그 목을 물어뜯어 피라도 마실 수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이런 길을 택했을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러면 달라졌을까?
모를 일이다.
연수는 생각을 묻어두고 발걸음을 서두른다. 하인들이 깨어나기 전에 돌아가야했다.
*
아침은 시나브로 밝아온다. 별채를 치우는 하녀의 손길이 부지런하다.
"또네."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루에 어디서 묻어온 건지 모를 젖은 흙이 떨어져 있었다. 털어낸다고 털어낸 것 같지만 틈새로 파고든 것은 남아 청소하는 이의 눈에는 어김없이 들어오고 만다. 대체 어디서 묻어온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리 닦아내도 아침만 되면 떨어져 있는 것이 영 기이했다.
"정말 요물인가?"
흘긋. 하녀는 연수의 침실을 흘겨보다가 이내 혀를 내두른다.
아무렴 어떠냐. 월급만 잘 나오면 됐다. 어차피 해주는 거 하나 없는 주인이었다. 요물에 홀려 패가망신을 하건 잡아먹히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점순아, 점순아."
속삭이듯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하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가 발을 동동 구르는 동료의 모양새에 황급히 걸레를 들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아이고. 빨리 이리로 오렴. 거기서 비켜야해."
그 말이면 되었다. 바로 상황을 알아차린 점순이는 후다닥 내달렸다.
하녀가 모습을 감추는 것과 거의 동시에 쿵쿵거리는 발걸음이 마루를 울린다.
어찌나 발소리가 큰지 육척 거인이라도 될 것 같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꽤나 자그마한 몸집의 여인네였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앳되고 미색이라고는 없었으나 옷차림은 고급스럽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다.
연수와 놀부가 함께 누운 모양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함성처럼 고함이 쏟아진다.
"에라이. 미친놈아!"
옹심의 등장이었다.
옹심은 아직 어렸다.
이팔청춘을 앞둔 십오세. 아직 파릇하니 젊고 어린 나이에 철도 모르고 시집을 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재산이 많으니까. 옹심은 장부를 쓰고 관리하는 일을 제법 좋아했다. 재산 불어나는 것이 보이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빈말로라도 남편인 놀부와 금슬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적어도 바람은 피우지 않았으니까. 놀부나 옹심이나 재산이 아까워 바깥 나들이를 못 하는 성격이었다. 남에게 퍼줄 바에는 금은보화를 사들이는 쪽이 만족스러웠다.
돈을 제외하면 맞는 부분이라곤 없지만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돈에 관해서만큼은 의견이 같았으므로 두 사람은 제법 잘 맞는 부부였다. 저 년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옹심의 불 타는 시선이 연수에게 닿았다.
옹심의 고함은 놀부를 깨우지는 못 했으나 연수만큼은 확실하게 깨운 차였다. 부스스 일어나는 모양이 아리땁다.
연수는 옹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놀부를 흔든다.
놀부의 번들거리는 피부 위로 섬섬옥수가 오르는 모습을 보니 다시 한 번 열불이 났다.
'서방님’하고 작게 부르는 목소리가 고왔다.
"비켜."
서방님은 무슨 서방님이냐고 싸다구라도 날리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그보다는 이 양반이 문제다. 이 망할 양반만 아니었어도 제 재산이 야금야금 줄어들 이유가 없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멱살을 쥐듯 풀린 옷자락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놀부가 덜컹거리는 몸에 인상을 팍 쓴 채 눈을 뜬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미친 건 네 놈이겠지. 여직 퍼질러 자고 있어?"
옹심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놀부는 귀찮아할 뿐이다.
"비켜라, 비켜. 여편네가 우왁스러워 가지곤."
놀부가 쯧, 하고 혀를 찬다. 놀부의 옷가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뭐라고 했니, 너?"
"알겠으니 좀 비켜봐라. 일어날테니."
옹심의 분기탱천한 목소리를 눈치채고 조금은 정신이 든 놀부가 손을 내젓는다.
옹심은 놀부의 멱을 패대기치듯 놓아주고 일어섰다. 아침 햇살을 등진 옹심의 그림자가 놀부 위로 길게 늘어졌다.
놀부는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킨다.
눈가에는 졸음이 끈덕하게 늘어붙었다. 쩍 벌린 입에서 싱싱한 썩은 내와 함께 하품이 흘러나왔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이 아침부터."
옹심이 쌍심지를 켰다.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냅다 어깨를 잡아채서 등짝을 친다. 철퍼덕 소리가 차지다.
"아이고. 여편네가 사람 잡네!"
"이 인간이 몰라서 물어? 어? 정말 몰라? 모르냐고!"
옹심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끝내는 제 가슴을 쳤다. 내가 못 산다. 곡소리가 울려퍼졌다.
"네 놈이 어제 쓴 돈이 얼만 줄 진정 몰라!"
옹심의 목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거칠다.
"그까짓 푼돈……."
"푸~운도~온?"
놀부의 입이 터지자마자 옹심이 틀어막는다. 으득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 양반아. 네놈이 어제 쓴 돈이면 논을 세 마지기는 사. 어디가 푼돈이야. 어디가!"
답답함을 못 이긴 옹심의 고함이 한탄을 넘어 통곡을 향해 가고 있었다.
놀부의 미간 골이 깊어간다. 분수를 모르고 입을 놀리는 여편네의 꼬라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흘긋 옆을 보니 연수가 소리도 없이 앉아있다. 있는 듯 없는 듯 다소곳한 모양새가 흡족했다. 어젯밤 끌어안았던 낭창한 허리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히죽 웃는다.
옹심의 눈이 뾰족해지거나 말거나 놀부는 대뜸 연수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시끄럽다. 어딜 여편네가 서방님 앞에서 꽥꽥 소리를 질러. 내가 푼돈이라면 푼돈인 거지 말이 많아."
옹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뭬야?"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듯 뒷목을 붙들고 기가 찬 헛기침을 뱉는다.
옹심의 눈이 공허했다.
이 양반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이를 어찌하나.
내 재산, 내 아까운 돈. 이걸 어찌 지키나.
눈을 뜨고 있는데 뵈는 것이 없는 걸 보니 저 놈만 미친 게 아니로구나.
"서방님."
잠깐의 고요를 찢고 연수가 속삭였다.
"왜 부르는고."
놀부의 답이 다정했다.
"마님이 분노하신 건 어제 건네주신 선물들 때문이지요?"
"아서라.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말은 그리하나 표정은 숨기질 못하니 놀부의 낯이 환했다.
"서방님께서 주신 선물을 마님께 돌려드리면 분이 풀리실까요. 소녀가 두 분을 갈라놓을까 염려가 되옵니다."
"맘씨가 곱기도 하구나. 그러지 않아도 된다. 까짓거 필요하다면 내 둘 다 사주고 말지."
놀부는 연수의 뺨을 가볍게 꼬집는다. 연수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는데도 아랑곳 없이 발그레한 볼 위로 입을 맞추고 어깨를 보듬어 안았다.
그 몸짓이 더없이 다정하다.
"이놈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옹심이 중얼거렸다.
도무지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어이없어 튀어나오는 코웃음을 몇 번 치던 옹심이 방을 나섰다. 덩치에 맞지 않는 커다란 발소리가 쿵쿵거리며 멀어진다.
"방문도 닫을 줄 모르지."
떼잉, 쯧.
놀부가 혀를 찼다.
연수의 눈길이 열린 문 너머로 사라지는 옹심의 치맛자락을 뒤쫓았다. 놀부는 연수의 어깨를 주무르고 허리를 더듬더니 이내 방문을 닫아건다. 문 밖으로 연수의 시선이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