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제2장. 파멸하라, 운명이여.

by 이파리

인간은 하늘을 동경한다. 이는 자유를 동경함인가.
연수는 웃는다.
그깟 환상 내다 버려라. 하늘에는 하늘의 질서가 있다. 제비에게도 날개가 있으나 그대들이 꿈꾸는 무한한 자유는 없었다.
인간아. 인간아.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의 불행과 파멸을 기도하니 부디 멸망의 날이 도래하기를.



*


제비는 고민한다. 새끼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려면 어딜 가야 할까. 너무 멀리 가면 안 된다. 하지만 충분한 먹이를 구해야한다. 저를 향해 짹짹거리는 입이 많았다.


제비는 깊은 고뇌 끝에 날개를 펼친다. 인간 마을을 향해 가는 날갯짓이다. 그곳에 가면 곡식이 있다. 어린 것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 위험하기야 하지만 어디 날 것을 사냥하는 것만 하랴. 그러니 괜찮다. 금방 다녀올 수 있을 테니까.


바로 그 방심이 문제였다.
제비는 몰랐다. 그날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짧은 생을 통째로 뒤흔들 커다란 사건을.


연수는 눈을 떴다. 질펀한 밤의 후유증이 거셌다.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 때면 짹짹대는 아기 제비들의 지저귐이 귓가를 맴돌았다.


안 되지. 아무렴.

안 된다. 어미는 너희를 잊지 않았어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흘려보낸다. 눈물에 흐려진 시야로 세상을 본다.


세상은 이토록 굴곡져 있구나. 너희를 이 세상에 내놓아서는 아니 되었다. 적어도 이 더러운 곳을 청소하지 않고 내놓아서는 아니 되었다.


연수는 웃는다.


이 거대한 오물통을 깨끗이 씻어내리라. 그 다음에 다시 너희를 만나리라. 너희의 작은 입에 먹이를 넣어주며 속삭이리라. 이제 안심하고 날아도 된다고. 너희의 세상이 열렸노라고.


눈을 감는다. 눈 위로 맺혀있던 눈물이 물길을 따라 다시 한 번 굴러 떨어진다.


연수는 몸을 일으킨다. 몸가짐을 정돈하고 나면 얼굴은 말끔해져 있다. 잔잔한 호수처럼 명징한 무표정이 연수의 얼굴을 뒤덮는다.


옷차림은 정돈하고 머리를 다듬는다. 인간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방’이 있다는 거 하나만큼은 싫지 않다. 시선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 온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도 잠깐의 안식은 취할 수 있는 공간. 이것마저 없었더라면 진즉에 미쳐버렸겠지.


놀부의 주머니를 털어 손에 넣은 사치품들을 탁자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어여쁜 장신구, 값비싼 분과 연지, 고운 비단을 구해 사람을 부려가며 얻어낸 화사한 의복까지. 아직 흙도 밟지 않은 비단 신을 옆에 내려놓자 불도 켜지 않은 방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했다.


연수는 늘어놓은 것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하나하나 골라 들었다. 엄선한 별들이 차례로 날아와 꽃이 되었다. 새카만 머리칼에는 청초한 은방울꽃 비녀를 꽂고, 흰 얼굴에 연지를 발라 생기를 주었다. 몸짓을 따라 팔랑팔랑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붉다.


곱게 차려입은 연수의 몸에서는 진한 양귀비 향이 났다. 냉엄한 낯은 마치 수행에 든 수도승 같으나 몸짓에는 교태가 섞였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을 매혹하는 자태였다.


코웃음이 났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면 네년이 아니냐.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를 표현하는 언어조차 인간의 것이니 어찌 제비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것들의 행태를 어찌 해설할 수 있으랴.


연수는 잠시 드러났던 비웃음을 내리눌렀다. 예쁘장한 얼굴이 다시 밀랍 인형처럼 굳어버린다.
방문을 연다. 사냥의 시간이다.


*

까만 눈은 마치 검은 진주처럼 만들거린다. 놀부의 목이 죄어온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새빨갛다. 두툼한 목으로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든다. 이 날을 위해 갈아온 듯 길고 뾰족하다.


죽어라.
죽어.
죽으라고.


발버둥친다. 저 가녀린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났는지 도무지 치울 수가 없다. 시야가 울긋불긋하고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다.


쉴 수가.


숨을.
살려.


아.




놀부가 번쩍 눈을 떴다. 시중 들던 하인놈이 눈이 동그래진다.


"무서운 꿈이라도 꿨답니까? 뭐그리 호들갑시럽게 깨신다요."


놀부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번뜩이는 눈만이 반복된다.


예끼 이놈아. 어딜 버르장머리없게 어른 행사에 참견질이야.



평소 같았으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을 잔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돈다. 돈다. 돈다. 너의 눈이 돈다. 귀신일까. 아니면 괴물? 어느 쪽이든 좋다. 이딴 꿈은 사양이다. 어서 깨어나야한다.


"후우……."


길게 숨을 뱉는 것과 동시에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다시 한방울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양을 본 하인의 눈이 다시 한 번 휘둥그레진다.


"어디 아픈 건 아니시지라?"
"꺼져라."


날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연수를 불러와."


땀을 훔친다. 물 흐른 자리가 차다.


"소녀를 부르셨습니까."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붓이 고개를 숙였다 들며 빙긋이 웃는 입가가 고혹적이다. 놀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폈다.


"연수야."


목소리에는 안심이 담겨있다. 하인이 끈적한 눈빛이 오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탁. 가볍게 나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연수는 자연스레 놀부의 옆에 엉덩이를 붙인다.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놀부의 이마에서 땀을 훔쳤다. 걱정 가득한 말투에 놀부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악몽을 꿨다."
"어떤 꿈이었나요?"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하.
한숨을 쉰다.


"뭔가에 짓눌려서 숨이 쉬어지질 않더구나. 발버둥치면서 깼다."


그렇게 말하며 놀부가 제 목을 더듬었다. 연수의 눈이 가늘어진다. 손 끝을 잠시 바라보고,


"그렇군요."


나긋하게 말하며 이제 거의 마른 놀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손수건으로 훔쳤다. 긴 말은 덧붙이지 않는다.


"예쁘기도 하지."


끌끌. 놀부가 연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연수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순순히 품에 안겼다.
놀부가 막 연수의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추려고 했을 때였다.


"저어, 손님이 오셨는디요."


방금 빠져나간 하인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놀부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언 놈이냐."
"동생 분이십니다."


하인은 말꼬리를 흐린다. 놀부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이를 드러냈다.


"쫓아내라."
"박정하십니다, 형님"


서운하다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문이 열렸다.


흥부는 사람 좋아보이는 웃상의 사내였다. 차림은 검소했으나 몸가짐은 단정하고, 자세가 올곧았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특유의 환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크흠."


흥부의 난입에도 연수의 허리를 부여잡은 놀부의 팔은 단단하다. 연수는 부끄러운 기색 없이 놀부의 팔에 기대어 있었다. 그 낯뜨거운 모습에 흥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낮부터 과하십니다."
"네놈이 여긴 왠 일이냐."
"형님 뵈러 왔지요."


흥부는 허허 웃는다. 한 손을 문 밖을 향해 뻗는다.


"아가씨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지요."
"안 돼."


놀부가 고개를 젓는다.


"연수는 나와 함께 있을 거야."


흥부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깜빡.


"그 아가씨를 집에서 내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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