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파멸하라, 운명이여.
연수는 웃는다. 비뚜름한 웃음이다. 흥부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눈매가 일순 굳어지는 것을 요요한 미소로 흘려보낸다.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경직이 허리를 타고, 아니 온 몸을 타고 전해졌다. 연수는 만족스레 웃었다. 놀부의 팔이 한층 단단해진다. 놓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근육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었다. 한쪽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는다. 놀부의 입술이 씰룩인다. 연수는 지나치게 진해지는 미소를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지금 형님의 평판이 어떤지 아시오."
"네 놈이 신경쓸 바가 아니다."
놀부의 입은 고집스레 다물려 있다. 연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써 한달 째 이곳에서 지냈다. 눈을 뜬 놀부를 혼자 둔 적이 없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았고, 그의 행동을 알았고, 그의 마음을 읽었다.
"여자에 미쳐서 집안 거덜내게 생겼다고들 하더이다."
"어떤 놈이 감히 그런 말을!"
"정신 차리시오, 형님. 예?"
흥부는 진지했다. 간절함이 얼굴에서, 몸짓에서 베어났다. 그리고 놀부는,
"연수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
흥부의 아뜩한 외침이 벽을 두드렸다. 연수는 그저 웃을 뿐이다. 웃는다. 만족스럽다. 저것의 머릿속은 이미 연수 뿐이었다. 정말로 거의 다 왔다. 이제 곧이었다.
"형수님이 오죽하면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대로는 큰 일 납니다."
흥.
놀부가 코웃음을 쳤다.
"여편네 말 한 마디에 놀아나는 거 보면 너도 멀었구나."
"형님이 하실 말씀입니까."
흥부가 아무리 애타게 부르짖어도 놀부의 마음은 굳건하니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연수는 말 없이 손톱을 매만진다.
"서방님."
흥부의 시선이 도끼마냥 내리 꽂힌다.
"도련님 말씀 하등 틀린 것이 없사옵니다."
"누가 네 도련님이냐!"
흥부가 처음으로 핏대를 세웠다.
"소녀는 서방님의 여인입니다. 그러니 노심초사하지 마시어요."
연수는 다정하게 놀부를 바라보았다. 분노에 울긋불긋해진 놀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건 요물입니다, 형님."
"닥쳐라!"
놀부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인다.
"돌아가라."
"형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듣기 싫다. 가라. 내쫓기 전에."
"형님."
"게 누구 없느냐!"
흥부는 입술을 짓씹는다. 거무죽죽해진 안색이 처참했다.
"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연수를 향한 말에 한껏 날이 서있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형님."
"다신 오지 말아라."
하인이 달려오는 것과 동시에 흥부가 방을 나섰다. 놀부가 털썩 주저앉는다.
"무슨 일이십니까."
"냉수 좀 가져오너라."
연수는 말없이 흥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등에 그림자가 졌다.
*
결국 큰 일이 나고 말았다.
"뭐라고?"
놀부가 눈을 부라렸다.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옹심이 턱을 치켜세웠다.
"그거 말고."
"내 재산을 가져가겠다?"
"미쳤나, 이게."
하.
옹심이 코웃음을 쳤다.
"미친 건 네놈이겠지."
놀부는 화도 내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당신 재산이 어딨어?"
"있지. 내가 시집 올 때 들고 온 땅문서, 보화, 재물 전부 내 것인데."
옹심은 태연했다.
"그게 왜 당신 거야."
"본디 내 것이다. 사실 이 집도 내것이라 봐야지. 내가 먹이고 입히고 키웠는데 내것이 아니면 누구 것이냐?"
옹심은 비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놀부를 올려다본다.
"내가 너처럼 놀기만 한 줄 아느냐? 요 한 달간 네가 그렇게 돈을 펑펑 쓰고도 어떻게 이 집이 건실하게? 다 내 덕이다. 내가 이만큼 벌어놓은 거야."
그리곤 퉤. 침을 뱉는다.
"장부도 안 읽는 놈이 말이 많아요."
놀부가 허탈한 웃음을 흘린다. 한참을 허허로이 웃던 그가 갑자기 인상을 쓴다.
"내 땅이야, 내 땅. 이 집 땅문서는 다 내 손에 있다!"
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옹심은 움찔조차 하지 않는다.
"내 혼수로 들고 온 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관리했다, 이 멍청아."
옹심이 비웃었다. 놀부는 눈을 훼까닥 뒤집고 그럴 리 없다며 부지런히 농을 뒤졌다.
"아무리 뒤져봐라. 그건 아버님께도 드리지 않았다. 네 손에 있을 리 없지."
옹심은 깐족거리며 말했다.
"네놈 아비는 참 사람이 좋았어. 어린 내 손에 땅문서를 쥐어주며 내 혼수니 내가 관리하라고 하셨다. 보는 눈이 있으셨던 게지. 네놈 손에 맡기면 전부 날아가버릴 줄 알았던 게야. 근 한달동안 네놈이 쓴 돈이 네 땅에서 난 수입을 넘어간다, 망할 놈아."
쯔쯔.
옹심이 혀를 찼다.
"잘 살아봐라. 나는 갈테니."
끝내 제 땅의 문서를 전부 찾아내지 못한 놀부가 뒷목을 잡았다. 아이고, 아이고. 통곡을 한다. 옹심이 뒤돌아 나간다. 언제나처럼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명랑하기만 하다.
연수는 늘 그랬듯 방 한 구석에 앉아 웃을 따름이었다.
*
놀부는 내리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그 사이 옹심은 야무지게 짐을 챙기고 집안에 남은 보화란 보화는 모조리 챙겨 담았다. 놀부는 막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 모든 것이 옹심의 것이라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장부가 옹심의 손에 있었고, 거기엔 차곡차곡 쌓은 재산이 모두 옹심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마을에는 놀부네가 쫄딱 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겸인을 비롯해서 높은 직급의 하인이 아침에 눈을 떠보면 사라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재물이 사라졌다. 노비와 소작농들도 술렁였다. 흥부네로 도망가는 하인도 있었다. 여유가 있는 이웃들이 전답을 탐내기 시작했다.
고작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놀부는,
"연수야."
깊은 시름과 함께 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수는 이마에 올린 수건을 갈며 대답한다.
"예, 서방님."
"나는 너 밖에 없다."
애절한 부름에 연수는 다시 대답한다.
"예, 서방님."
놀부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다.
그래.
놀부는 아무것도 몰랐다.
연수는 웃었다.
소박한 옷을 입고 물그릇에 수건을 담아 나오는 연수는 참한 새색시 같았다. 어린 낯과 고운 손이 물그릇과 어울리지 않아 애처롭기까지 하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아픈 지아비를 간호하는 틀림없이 헌신적인 아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집안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청소며 빨래며 온갖 집안일에 부지런히 오가던 하인들이 보이지 않으니 넓은 가옥을 오가는 것은 담장에 구애받지 않는 새들 뿐이다. 연수는 잠시 날아가는 까마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연수는 당당하게 대문을 빠져나간다. 아무도 연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며 수군거릴 따름이다. 수군수군. 수군수군.
날씨가 맑았다. 해를 보며 대문을 나선 것이 간만이었다. 연수는 빠른 걸음으로 인가를 벗어난다.
나무 그늘을 걷는다. 익숙한 오르막길인데 신발을 신고 걸으니 고역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했다고 인간의 길을 걷는 쪽이 편한 게 분했다. 그래도 오른다. 신발에 짓눌린 발의 고통마저 희열이었다.
"구렁아."
공터에 서서 그것을 부른다. 한 번은 답이 없어도 괜찮다. 두 번, 세 번을 부른다. 고요 속에 새들 지저귀는 소리만 스친다.
"구렁이 어디 갔느냐."
얼굴을 콱 찌푸리고 찌증스레 일갈하자 그제서야 응답이 들려온다. 스르륵. 뱀이 흙바닥을 기는 소리였다. 연수는 결국 이전과 같이 잔뜩 화가 난 낯으로 그것을 맞는다. 어쩐지 그것의 얼굴이 웃는 듯했다.
- 성급히 굴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직도 성질을 버리지 못 했구나.
구렁이가 속삭였다.
"무엇이 성급하단 말이냐. 저 집은 몰락했다. 이제 눈치볼 게 없단 말이다."
- 그야 그렇지.
구렁이가 나직이 말했다. 큭큭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얼핏 스쳐간다.
"이제 약속을 지켜라."
연수가 말했다.
- 아직이다.
구렁이가 답했다.
"뭬야?"
연수가 이를 악문다.
"대체 왜냐. 네가 말한 건 다 했다. 저것은 완전히 쇠약했다. 이제 잡아먹기만 하면 되는데!"
- 그래. 네 말이 맞다.
구렁이가 그 커다란 머리를 가볍게 끄덕인다. 연수는 발을 쿵 구른다.
"그럼 왜!"
- 새끼들을 보고 싶다지 않았느냐.
구렁이가 말했다. 연수는 말을 잃는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어렵게 꺼낸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애처로운 눈망울이 구렁이에게 주렁주렁 매달렸다. 구렁이의 붉은 눈이 연수를 지긋이 바라본다.
-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그게 무슨 뜻이냐."
- 나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느냐.
연수는 입을 앙다문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다. 짧은 어둠 사이로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