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과도 같았던
"연수야."
놀부가 눈을 떴다.
"예, 서방님."
연수가 답한다. 눈이 마주친 놀부가 힘 없이 손을 뻗는다. 연수는 그 손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느릿하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다. 놀부가 연수의 손을 지긋이 쥐었다.
놀부는 손에 땀이 많았다. 늘 물기로 축축한 손을 맞잡으면서 생리적인 혐오감에 치를 떨었더랬다. 불쾌감을 느낀 연수가 슬쩍 손을 빼면 놀부는 따라와 손을 붙들었다. 보름 정도 인내심을 길러 손을 빼지 않게 된 뒤로 놀부는 눈을 뜬 시간이건 감은 시간이건 연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한숨 같은 색색거림이 방안을 채웠다. 아무래도 놀부는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일주일 쯤 지났으니 이제 일어날 법도 한데 일어나지 못 하는 것이 이상타 싶었다. 연수는 말 없이 놀부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기름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손에 묻어났다.
"아느냐, 연수야?"
놀부가 말했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아니요."
연수는 답한다.
"그렇지. 네가 무얼 알겠느냐."
놀부는 말한다.
"흥부놈은 친구란 것이 많다. 이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서방님."
"저놈은 제 편을 잔뜩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놀부는 작게 헛기침을 한다.
"아무도 저 놈을 의심하지 않아. 무얼해도 박수를 치지."
다시 한 번 쿨럭.
"나는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다."
놀부의 눈은 이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건 다 허영이야. 생각해보아라. 그 치들 중에 정말로 흥부놈이 위험할 때 도와줄 것이 있을 것 같으냐?"
"소녀는 알지 못합니다."
"모르겠지. 너처럼 순한 것이 무얼 알겠느냐."
놀부는 답답한 듯 자리를 걷고 일어나 앉는다.
"흥부놈은 그걸 마치 제 복인양 말한다. 그렇지 않아. 저 것이 빌어먹고 살 때, 어느 누구 하나 재산을 내어주지 않았다."
당연하지. 놀부는 가슴을 친다.
"어느 누가 제 것을 남을 위해 내어주겠느냐. 다들 저 먹고 살기도 바쁜데. 제 처자식 벌어먹이기도 바쁜 게 세상살이다.
그런데도 흥부 저놈은 그렇게 남의 눈치를 봐. 그러곤 내게 훈수를 두지. 평소 주변에 잘 해야 나중에 도움을 받는다나?"
그렇게 당하고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놀부는 비웃었다. 연수는 언제나처럼 "그렇군요," 하고 말 뿐이다.
"모든 인간은 사기꾼이다."
기억하거라, 연수야.
놀부가 말했다.
눈을 마주하고 낮게 말하는 놀부의 목소리가 진중했다. 평소의 게으르고 방탕한 모습과는 다르다. 연수는 아주 작게 미소지으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놀부가 길게 숨을 뱉었다.
*
놀부는 불쾌한 인간이었다.
단순히 고약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얼굴에는 개기름이 가득하고 손은 축축하며 땀이 많아서 종종 옷자락이 젖어있곤 했다. 그러니 아무리 씻어도 쉽게 냄새가 났고, 자세가 곧질 못하니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우아하지 못 했다.
놀부가 가진 재산과 위세에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를 가까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 년을 부부로 함께 지낸 옹심이 놀부와의 동침을 거절할 정도니 그가 살갗을 맞대고 정을 나눌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연수는 생각한다.
저 자는 단순히 살을 부빌 존재가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연수는 놀부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알고 보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연수의 곁에 놀부가 자리한 것이다. 살을 내주고 체취를 맡을 수 있는 존재. 아이가 있었다면 그것이 대신할 수 있었을 자리였다.
놀부가 품에 파고들 때 문득 체온을 찾아 날개 밑으로 숨어드는 새끼가 떠오른 것은 연수의 과대망상일까. 그리움이 과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만두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놀부의 애타는 몸짓에서 새끼들이 떠오른다. 지금도 그랬다.
"연수 너는 돌아갈 곳이 없는 게냐?"
그렇게 묻는 놀부는 연수를 꽉 붙들어 안고 있었다.
"없지요."
연수는 중얼거린다.
없지요.
그 말에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그럼 나와 혼인하지 않겠느냐?"
놀부는 양 손으로 연수의 등을 더듬거린다. 연수의 좁은 등이 놀부의 투박한 손에 반쯤 덮어벼린다.
"저와요?"
연수가 되묻는다. 깊은 의미를 담은 질문은 아니었다.
"너 말고 예 누가 있느냐."
놀부가 웃는다. 헛헛한 웃음이었다.
연수는 놀부를 바라본다. 단단히 붙들린 체라 온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소녀를 처로 들이시면 소란이 일 것입니다."
흥. 놀부가 코웃음을 쳤다.
"소문이라면 이미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옹심이 그 계집이 요란하게도 떠났으니."
그랬다. 마을에는 아직도 놀부네 집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는 이가 많았다. 이따금 호기심 넘치는 어린 동자들이 담을 넘으려다 실패하는 일도 있었다. 연수는 그런 사실을 머릿속으로만 떠올린다.
"그러니 너와 혼인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나와 함께 살자, 연수야."
놀부는 그리 말하며 연수를 더욱 보듬는다. 그의 체온은 제법 뜨거웠다. 여전히 미끈하고 축축했지만 체온이 전해지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도련님께서 허락치 않으실텐데요."
연수가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다.
"그까짓 것이 허락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놀부가 분노한다. 그의 팔이 느슨해졌다. 놀부는 연수를 살짝 밀어내어 얼굴을 마주한다. 연수는 표정 없는 얼굴로 놀부를 마주하고, 화를 묵묵히 흘려보낸다.
"흥부놈이 아무리 재산을 얻었다고 하나 이 일대의 땅은 전부 내 것이다. 땅도 없는 놈이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렇습니까."
연수는 답한다.
"옹심이 그 계집이 장부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했으니 네가 혼란스러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허나 알아두거라. 장부는 허상이야."
연수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허상이요?"
"장부란 건 말이다. 전부 숫자놀음이다."
놀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무리 금은보화가 있어도 그건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네게 전부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라고 놀부는 덧붙인다.
"옹심이 계집애가 가지고 간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의 눈을 속이는 가짜 행복이다. 거짓된 재산이지. 진짜 재산은 오로지 땅이다. 땅이 노다지야. 거기서 모든 게 나는 거야."
놀부의 목소리는 다시 작아졌다. 진귀한 비밀을 논하듯 속삭인다. 연수는 놀부에게 맞춰 고개를 바짝 가져다대고 그의 말을 듣는다. 놀부는 계속해서 말했다.
"땅이 있으면 말이다. 아무리 재물을 낭비해도 언젠가는 되찾을 수 있게 되어있다."
놀부의 말이었다.
"재물은 사라져도 땅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야. 땅에서 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너같은 어린 계집은 모를 것이다."
옹심이 그 계집도 몰랐다며 놀부는 끌끌거리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