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by 이파리

아니다. 떨어진 것은 심장이 아니다. 그보다 더 무거운 것. 예를 들어 '제비’라는 단어. 짧고도 긴 두 음절 같은 것이다.

"아."

흥부의 탄식이었다.

연수는 꼼짝도 못하고 앉은 채, 눈꺼풀을 비집고 떨어지는 투명한 것을 흘려보냈다.


잠깐의 침묵, 잠시의 당황.

연수가 눈을 떴을 때 흥부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있었다. 연수는 목을 타고 흐른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곤 옷고름을 들어 얼굴을 훔쳤다.

"놀래켜드렸군요."

흥부는 무어라 답을 하지 못 한다.

연수는 차오른 숨을 가슴을 한 번 들썩이는 것으로 삼킨다.

"이상하게 들리겠지요."

"…그래."

흥부의 말은 억지로 쥐어 짠 듯 어눌하다.

"어이하여 그리……."

흥부는 망설이다가,

"서럽게 울었으냐."

이를 악물었다.

연수는 그런 흥부를 보고 웃었다. 아주 잔잔하게, 개운한 듯이.

"제가 제비이기 때문입니다."

"헛소리."

중얼거리는 흥부의 목소리는 흐렸다.

"도련님."

"나는 네 도련님이 아니다."

흥부의 답에는 아까까지 느껴지던 단호함이 없었다.

"그럼,"

연수는 앞섶을 붙들고 일어선다. 흥부의 눈이 가볍게 떨리었다.

"귀인이시여."

두 손을 모으고,

"부디."

크게 허리를 숙였다.

"저를 도와주세요."

흥부가 얼어붙었다.


제 앞에 납작 엎드린 연수를 보며 흥부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연수도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아무 말이 없다. 그렇게 별채는 침묵에 잠겼다.

"일어나라."

겨우 적막을 깬 것은 흥부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제비는 무슨 뜻이고, 도와달라는 건 무슨 말이냐."

연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슬픈 눈이 비장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연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흐느끼는 듯했다.

연수가 처음 인간이 되어 마을에 내려왔을 때, 아니, 놀부의 집에 눌러앉아 인간 세상의 소문을 듣게 되었을 때부터 흥부의 이름은 계속 들려왔다.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고쳐준 선량한 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는 지혜로운 자. 가정에 충실하며 마을에 헌신적인 사람.

연수는 생각했다. 저 자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여기 있을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한 사람의 작은 선행이 불러온 비극의 결과. 그것이 연수였기에. 흥부가 자신을 증오하여 차라리 다행이었다. 맘 편히 미워할 수 있었다. 저 자만 없었다면. 그럼 내 새끼들은 살아있었을텐데.

때로는 상상하기도 했다. 놀부와 함께 흥부의 가슴을 갈라 그의 피를 마시는 상상. 상상은 달콤했다. 지금도 저 자의 얼굴을 할퀴는 자신의 강인한 발톱이 어렴풋이 겹친다.

그러나.

그러나 그리해서는 아니된다. 이것은 필시 무언가의 사술.

연수의 눈이 붉었다. 불길한 빛이었다.

흥부가 반응하기도 전에 빛은 꺼졌다. 연수는 다시 슬픈 눈을 한 여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구한 제비를 기억하십니까."

"설마."

흥부가 중얼거렸다. 연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제비를 구하여 부자가 되었다지요. 그 뒤에 당신의 형님이 저지른 일은 기억하십니까."

흥부는 차마 대답하지 못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저는 당신 형님에 의해 다리가 부러진 그 제비입니다."

연수는 쓰게 웃는다. 그렇다.

나는 제비다.

이 고백이 어찌나 달았는지.

"그런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냐."

흥부의 안색이 어두웠다.

"쉬이 믿기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연수는 흥부와 눈을 마주했다.

허나.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아하니 형님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것도 필시 거짓이렷다."

흥부의 눈빛은 줄곧 그랬듯 다시 단호해져 있었다.

작은 탄식.

연수는 눈을 감는다. 아찔하다. 이를 어찌 해명해야할까. 사실을 고백했을진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부정되는 상황을 어찌 타파하면 좋을지, 연수는 생각해둔 것이 없었다.

"어찌해야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흥부는 침묵한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연수는 초조할 따름이다. 다행인 점은 흥부가 자리를 뜨지 않고 있다는 것. 흥부는 무거운 시선으로 연수를 주시했다.

"어찌해야 하느냐고 물었겠다."

"예."

연수는 답한다.

"당장 형님에게서 떨어져라."

"……."

무작정 입을 벌렸으나 할 말이 없었다. 그래. 흥부에게 가장 급한 것은 그것일 것이었다.

"그리 한다면…."

연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들어주마."

네 말을.

흥부의 얼굴은 굳건하여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연수는 탄식한다.

"갈 곳이 없습니다."

이번엔 흥부가 입을 다물 차례다. 그는 간절한 연수의 얼굴을 조금 당혹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민한다.

"지금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린다면."

흥부가 운을 떼었다.

"예."

연수가 대답한다.

"우리 집에 잠시 재워주겠다."

"그리 하겠습니다."

연수의 시선은 단단했다. 흥부는 잠시 그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 새벽 남몰래 놀부네 집을 빠져나왔다. 연수에겐 챙길 것이 없었다. 소중한 것이라곤 새끼의 흔적 뿐이었으니 맨 몸으로 나와도 좋았다. 흥부는 하루의 말미를 주겠다 하였으나 연수가 거절하자 놀라는 눈치였다.

그저 처음 입었던 옷과 알껍질이면 충분했다.

흥부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마을 한복판을 지나야 했다. 이 길을 날아서는 와본 적이 있으나 걸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낯설다. 인간이란, 인간의 세상이란. 무얼까. 기이하고 신비하다.

연수의 두리번거림을 보는 흥부의 눈빛이 묘했다. 연수는 그의 시선에 애써 눈길을 거두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인간의 몸으로 보는 인간의 마을은 모든 게 낯설어서 내가 아는 그곳이 맞는가 싶었다.

처음 놀부의 집을 찾았을 때는 느끼지 못한 생소함이었다. 그때는 복수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연수는 자신이 무언가에 홀려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이제서야.

이제서야.

연수가 따라오는 기색이 없어 흥부는 잠시 뒤를 돌아본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걸음이 멈췄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연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곧 흥부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켜며 연수는 되뇌었다.

괜찮다, 라고.


흥부가 새벽에 연수를 데려왔다는 것을 알게 된 흥부 부인은 깜짝 놀란 듯 하였으나 흥부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눈 뒤 침착함을 되찾았다. 연수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하였으나 구태여 그것을 입밖에 내어 묻지는 않았다.

"그래. 잘 곳이 없어 왔다고."

흥부 부인의 말이었다.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부는 부인에게 연수를 맡기고 사라진 채였다. 연수는 흥부 부인의 단호한 얼굴을 보면서 두 사람이 제법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흥부 부인은 한참동안 연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서방님이 들인 것 중에 네가 가장 골칫덩이로구나."

부인은 할 말이 많은 낯으로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방을 줄 수는 없다."

엄포를 놓는다.

"괜찮습니다."

연수는 나직이 대답한다.

얌전히 수구린 고개 위로 한숨이 겹겹이 쌓인다. 부인은 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렀다.

"이 아이에게 잘 곳을 내주어라."

"어떤 방을 줄까요?"

"평소대로면 족할 것이다."

예에.

하인의 대답은 어딘가 또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말은 없었다. 그는 연수를 툭 치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연수는 공손히 부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흥부 부인의 명령을 받은 하인이 연수를 데려간 곳은 하인들의 거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하인들이 머무는 곳인줄 알았다. 겉으로 보기엔 실제로 아무 차이가 없었다.

하인이 문을 탁 소리나게 열자 안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얼굴 가득 미소가 핀다.

"나 바닥 다 닦았어요. 약속대로 간식 주세요."

"오늘은 무슨 일해요?"

"흥부 아저씨는 어디갔어요?"

열 살이나 될까 싶은 어린아이부터 덩치는 성인과 별 차이 없어보일 정도로 큰 아이까지 서로 다른 나잇대의 여자아이들이 넷이나 되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저보다 덩치가 큰 아이 뒤에 매달리듯 숨은 작은 아이가 물었다. 하인이 연수의 어깨를 붙들어 앞으로 끌어당겼다.

"앞으로 같이 지낼 새 식구다. 따돌리지 말고 잘 지내라."

하인은 연수의 소개를 대충 마치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매달리는 것으로 보아 그대로 있었다면 꽤나 시달릴 듯 하였다. 연수는 탁 소리나게 닫히는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방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몇 살이야?"

개중 가장 덩치가 큰 아이가 대뜸 물었다. 연수는 눈을 깜빡인다. 나이. 나이라.

그러고보면 연수는 제가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몇 살쯤으로 보이는지 몰랐다. 제비로서 살아온 것도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그런 걸 신경써본 적이 없었다.

"몇 살이냐니까."

아이는 짜증스레 되묻는다. 연수와 키가 비슷한 것이 서열을 정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연수는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머뭇거린다.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어이할지 연수는 조금도 생각한 바가 없었다. 놀부의 집에서 연수를 상대하는 것은 놀부와 옹심, 점순 정도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뒤에서 수군거릴 뿐 연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연수는 어린 시절, 한 둥지에서 난 형제들과 있었던 몸싸움을 떠올린다. 어쩌면 이 아이가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일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연수는 침묵을 택했다. 무슨 말을 해도 아이들에게 인간으로 보일 자신이 없었다.

"야!"

말 없이 구석으로 가는 연수를 향해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구시렁대는 그 아이를 둘러싸고 다른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연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한다. 무어라해도 어차피 할 말이 없다.

가는 숨을 내쉰다. 흥부는 연수를 어찌할 생각일까. 두려웠다. 그리고 지독히도 새끼들이 그리웠다.


오후가 되어 흥부가 연수를 찾아왔다. 흥부가 기다리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뛰쳐나왔으나 흥부는 웃는 낯으로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아저씨, 쟤는 누구예요?"

"아무 말도 안 해요. 벙어리예요?"

"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단다. 잠시 둘만 있게 해주겠느냐?"

아이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흥부의 말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상상 이상으로 인망이 좋은 모양이다. 연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잠은 좀 잤느냐."

흥부가 물었다. 연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흥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아이들을 쫓았다.

"그랬겠지."

흥부의 표정이 따뜻했다. 연수는 묘하게 술렁이는 가슴께를 한 손으로 부여잡았다.

"따라오너라."

"예."

다시 단호해진 얼굴로 흥부가 돌아섰다. 연수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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