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락곰 Dec 26. 2019

고양이 세 마리와 산다는 것

내 삶을 지배해버린 세 마리의 작은 악마들에 대한 기록


나는 회사에서 기획업무를 하고 있는 N연차 디자이너다. 문득 기획서를 작성하는데 대표와 동료가 브런치에 글을 쓰라는 이야기를 했다. 글은 아무나 쓰는 건가 싶어서 ‘글은 무슨, 일하기도 바쁜데’ 하는 생각에 잊고 지냈는데, 19년 8월 15일, 5.5kg의 우리 집 넷째 홍구가 캣타워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내 명치를 가격하고 나서야, 숨을 꺽꺽 몰아쉬면서 “야 이 고양이 xx야!”라고 외치고 나서야, 10년간 내 삶의 일부였던 이 작은 악마들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게 만든 계기를 쥐어준 김홍구.

몇 년 전 만해도 고양이 키우는 인구는 적었고 동물병원에선 자기네보다 N포털의 대형 카페에서 지식을 얻으라는 얘기를 자기네 병원에 방문한 보호자한테 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렇게 본인이 실력 없음을 드러내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요즘은 주변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고, 한 마리만 키우던 나도 어느 순간 고양이 셋이 곁에 두고 있다. 형제도 아닌 각양각색의 세 마리가 내 곁으로 오게 된 길고 지루하고 조금은 감동적인 얘기는 뒤에 풀도록 하고 (풀 수 있다면 말이다) 이번엔 현대사회에서 혼자 자취하는 직장인이 고양이 셋을 반려하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고양이 셋을 반려하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쉽고,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내 손은 두 개고 고양이는 셋이니까. 내 눈도 두 개고 고양이는 셋이니까.

제일 사고 안치는 김도담씨.

세 마리가 각기 다른 사고를 치고 있으면 어떤 걸 먼저 수습해야 할지 머리도 안 돌아간다. 예를 들자면 좀 편하자고 간식 주고 났더니 한 놈은 저기서 과식성 구토하고 있고 한 놈은 더 먹겠다고 간식 껍질 물고 뛰어가고 한 놈은 토한 거 먹는다고 코를 들이밀고 있다. 토한 것도 치워야 하고 이게 정말 과식성인지 확인도 해야 하고 비닐을 먹으면 안 되니까 간식 껍질도 뺏어야 하고 부족하다고 찡찡거리는 놈 캔도 하나 더 따줘야 하고. 간신히 수습하고 쉬어야지 하고 있으면 저기서 와장창 여기서 와르륵 뭔가 엎지르고 자기들끼리 신났다. 어휴, 어쩌겠나, 무거운 엉덩이를 영차 들고 다시 수습하러 먼 길을 떠나본다.


단순히 밥 먹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오래간만에 분위기 좀 잡고 치즈와 크래커를 플레이팅하고 맥주 한잔 하자 싶으면 고양이 셋은 식탁 위로 뛰어올라 뭘 먹는지 검사를 한다. (이 놈들 생각들이야 뻔하지 뭐. 분명히 내가 자기들 몰래 맛있는 츄르라도 먹나 싶은 거겠지.) 이놈, 저놈, 요놈 순서대로 코 앞에 들이밀고 ‘자, 니들이 먹는 거 아니지?’하고 검사를 맡는다. 냄새는 또 어찌나 꼼꼼히 맡는지 한 마리 당 족히 일분은 걸려 검사를 맡고 나서야 겨우 한 입 두 입 먹기 시작한다. 이미 맥주에 김은 다 빠져버렸다. 그냥 그걸로 끝나면 새 맥주라도 꺼내겠지만 편히 앉아서 먹지도 못한다. 두 번째 크래커를 먹고 나면 ‘니 입만 입이냐’며 시끄럽게 야옹야옹 울기 시작하니까. 뭐 어쩌겠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너희를 사랑하는 엄마는 오늘도 먹다 말고 캔을 따고 사료를 붓는다. (먼저 밥을 주고 먹으라고? 그럼 간식을 내놓으라 하겠지.)


고양이 셋을 반려하는 일상은 단순히 먹고 자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 싸는 공간도 차이가 난다. 반가운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룰루랄라 들어가도 문을 닫는 건 상상도 못 한다. 집사의 프라이버시는 무슨. 물기 축축한 욕실에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몰려와서는 한 놈은 세면대위로 올라가고 한 놈은 무릎에 앉아서 궁디팡팡 해달라고 자기 엉덩이를 얼굴에 들이민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만든 홍구 놈은 내린 바지 사이에 들어가서 앉아있다.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다. 문을 닫으면 되지 않겠냐고? 집에 놀러 온 손님이 문 닫고 화장실에 갔다가 고양이한테 사과하면서 나오는 장면을 꽤나 자주 빈번하게 목격한다면 그냥 문 열고 들어가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할 거다. 그리고 애초에 홍구는(또 얘야) 문도 열 줄 안다. (심지어 원리를 파악해서 미닫이인지 여닫이 인지도 알더라.) 이젠 포기하고 손님이 와도 문을 안 닫고 화장실 갈 때가 있다

화가나도 이얼굴만 보면 사르르 풀려버린다

고양이 셋을 키우면서 하루에 잠은 4시간밖에 못 자고, 항상 식은 음식을 먹고, 김샌 맥주와 미지근한 음료를 마시게 됐다. 여행은 고사하고 친구를 만나 늦게까지 술 먹는 일도 줄었다. 그 좋아하던 향수도 뿌리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던 친환경 유기농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야근하고 돌아온 날에도 고양이 정수기를 씻으며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


맞다.

나는 고양이에게 휘둘리고 있다. 이 작은 악마들은 내 삶에 너무 깊숙이 침투해서 내 모든 생활패턴을 바꿔버렸고, 기호성도 모두 바꿔버렸다. 심지어 인간관계조차. 가끔 너무너무 지겨워서 탁묘 맡기고 훌쩍 도망갔다 가도 분리불안 증세 때문에 (맞다, 고양이가 아니라 내가 분리불안이다.) 일정 마치기 무섭게 허겁지겁 돌아온다. 일주일 만에 봐도 고양이들은 ‘그래 집사 어디 갔다 왔냐’며 아무렇지 않게 반긴다. 그래 나만 애타고 설레고 안타깝고 그렇다. 이 작은 악마들은 아무렇지 않게 기재개를 쭉쭉 펴면서 벌러덩 누워버린다.


어쩌겠나. 이미 빠져버린 걸.


 누가 그랬던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건 아이를 키우는 거랑 똑같다고. 아이를 키워보진 않았지만 더 심하다 싶다. 아이는 적어도 크면 자기 앞가림이라도 하지 않나? 집고양이는 평생 아기라던데.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 세 마리와 산다는 것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