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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돌고래 Feb 02. 2019

매니저 없던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기

겁도 없이 난파선에 올라탔다

디지털 노마드, 조직을 만나다


여행을 좋아해서, 어딘가에 몸이 묶이는 게 싫어서, 일을 빨리 마치는 날도 시간을 채워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게 피곤해서, 디지털 노마드가 되고 싶었다. 꼬박 2년을 준비했던 것 같다. 과연 내가 가진 능력이 조직에 속하지 않고도 시장에서 밥벌이를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는 시간이었다. 주로 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제작하는 일을 했다. 정기적으로 번역도 했다. 텍스트 기반의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이 끊이지 않았다. 떼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일반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조금 더 벌었다.


여행하며 일하는 게 체질에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한달 동안 에콰도르에서 지내기도 했다. 마감이 코앞인 원고를 잔뜩 챙겨 일주일에 한 도시씩 옮겨다녔다. 하루에 한 가지씩은 해보고 싶은 일을 하고, 최소 6시간씩은 노동을 했다. 매일이 꿈같았다. 좋아하는 일을 원하는 공간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일련의 시험을 통해 내가 일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디지털 노마드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일하는 행위를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고서는 장소나 조직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 꾸준히 일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자가 평가를 통과한 후 1년 동안 디자인을 배우러 다녔다. 작업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 보는 눈을 높이고 싶기도 했고, 당장 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갈고 닦으면 내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도 하고 글도 쓰고 영상도 하니까, 디자인만 어느정도 할 수 있다면 나만의 것을 제대로 시작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학원이 끝나는 시기와 맞물려 운이 좋아 일이 여러 개 들어왔다. 다시 바쁜 생활이 시작됐다. 디즈니 정도의 회사가 아니고서야 다시는 조직에 들어갈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큰 테마파크를 디자인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학원 교수님께 전화를 받았다. “너가 좋아할만한 회사가 있는데 미팅 한 번 해볼래?”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동안 해온 프로젝트들을 훑어봤다. 관심은 늘 있었으나 해보지 못한 분야를 해온 회사였다. 미팅 전 잡플래닛을 뒤져봤다. '동료들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없지만 사람을 갈아 넣는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들어가봤다. 브랜딩이 하나도 되고 있지 않았다. 회사 공식채널인데 어떤 톤도 느낄 수 없는 공유 게시물만 가득했다. ‘가진 자원에 비해 내부 시스템과 외부 포장이 부족한 곳, 그래서 성장이 멈춰가는 곳’이라는 어렴풋한 느낌만 가지고 회사를 찾았다. 아주 더운 날이었다.


미팅은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올인할 각오 없이 조직에 뛰어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올인할 만한 곳인가 확인해보고 싶었다. 궁금한 게 많았고, 전부 물어봤다.


“사람들이 갈린다고 느끼는 게 PM 때문인가요?”
“진상 클라이언트가 많았나요?”
“지금까지 대표님이 PM을 같이 해오신건가요?”
“향후 회사에서 브랜딩을 진행할 계획이 있나요?”


한국 회사임을 감안했을 때 무례할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인격적으로 답변해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테크놀로지는 아날로그를 닮아야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대화를 하면 할 수록 내가 이제껏 경험해온 것들이 이 조직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저는 프로젝트를 매니징한 경험은 있지만 기술 콘텐츠를 직접적으로 다뤄본 적은 없어요. 제가 이 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 원하세요?”
“PM 역할을 나눠서 하고 회사 브랜딩을 하면 좋겠어요.”


수년간 준비해온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를 비로소 시작해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 회사에 기어들어왔다. 대기업도 아니었고, 끝내주는 복지로 유명한 중견기업도 아니었고, 분위기 좋기로 소문난 스타트업도 아니었다. 내가 택한 곳은 이런 저런 문제점을 안고있는 평범한 회사였다.




난파선에 올라타다


이전에 있던 조직에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이 새로운 CEO로 온 적이 있었다. 쇼핑몰이라도 한 번 운영해봤으면 모르겠는데 그냥 대학에서 경영을 공부한 1년차 직장인이었다. 그도 잘해보고 싶었겠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해 한도 끝도 없이 겉돌다가 많은 이들을 떠나게 하고 결국 본인도 떠났다. 출근을 앞두고 그 사람이 떠올랐다. 자칫 잘못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지.


회사의 모습은 예상했던 것과 90% 일치했다. 출근 반나절만에 예상되는 업무 프로세스와 구성원의 고충 등을 줄줄 읊으니 동료들이 돗자리를 깔아야 한다고 했다. 몇해 전 비슷한 환경에 있을 때는 우왕좌왕 했지만, 그 시간을 지났기 때문에 이 조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일단은 한 달만 있어보기로 했다. 면접에서 협의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한 곳인지 아닌지 파악하는데 한 달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확인해야할 사항은 두 가지였다.


1) 회사에서 나에게 시스템을 정비해볼 정도의 힘을 실어줄 수 있는가

2) 그렇다면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계속 다니는거고 아니면 마는거라는 생각으로 난파선에 올라탔다.


출근 3일째 되는 날, 동료들에게 각자 뭘 하고 있냐고 물었다. 회의적인 반응만 돌아왔다. 어차피 경영진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일정을 모으는 게 의미가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거였다. “네가 뭘 해보려는지는 알겠어. 근데 우리가 이미 다 해봤고, 네가 아무리 해봐야 바뀌지 않을거야.” 예상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에 딱히 흔들리지는 않았다. 알겠다고 했고, 불만 요소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처음 한 주를 보내며 받은 인상은 이 조직이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성원들을 부품처럼 썩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통합 일정의 부재였다. 일정도 없고 매니저도 없었다. 사실 전직원이 열 명 남짓인 회사에서는 매니저가 없는 게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회사는 달랐다. 실질적인 대표가 두 명이었다. 누가 뭘 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상황마다 개별 일정을 따져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 회사의 매니저가 당장 해야할 일은 다른 게 아니라 A대표님과 B대표님이 진행 중인 일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을 때, 회사 일정을 체크하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가서 물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보였다.


출근 2주차 월요일, 두 대표님께 일대일 면담을 요청해 업무 플로우를 정리했다. 두분의 실무 회의에 동석하기로 했고, 그것을 토대로 구성원들이 업무를 해나갈 수 있게 서포트하기로 했다. 미팅을 다녀올 때마다 기획팀 동료들에게 내용을 공유했는데, 그러자 그들은 내가 공유한 내용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회의를 열었다. 실무 회의에 동석했기 때문에 내부 회의에서 제기된 이슈들은 어느정도 내 선에서 답해줄 수 있었다.


처음에 마음 먹었던 한달이 지났다. 계속 있어 보기로 했다. 만난지 얼마 안 된 직원에게 일정 권한을 내어줄 수 있다는 건 마이크로매니징에서 매크로매니징으로 갈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멋진 동료들과 일하는 일터


입사 3개월 차였던 것 같다. 대표님이 '이 회사에서 진짜 하고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좋은 동료들이 머물고 싶은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적어도 회사에서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일 잘하는 동료가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다. 아무리 천성이 착해봐야 하는 일마다 엉망이면 그 일이 다 누구에게 가겠는가. 수습하지도 못할 일을 생각 없이 내뱉는 동료도 별로다. 가장 최악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연차 하나로 뭉게고 앉아 월급 루팡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무언가를 해보려는 분위기를 끌어내릴 뿐 아니라, 대게는 업무 자체보다 줄타기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경영자에게는 벌벌 기고 본인보다 어린 동료는 무시한다.


‘좋은 동료들이 머물고 싶은 조직’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 위계 조직이 아닌 역할 조직

  : 회사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대해 누구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 각자 맡은 일에 대해 전문성을 가지고 처리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는 곳
  : 실무자들이 결정권을 갖고 주도적으로 업무를 해나갈 수 있는 곳
 

2. 투명한 조직
  : 업무에 관해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 곳 (요구사항도 반대 의견도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곳)
  : 업무상 기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보를 신입부터 고참까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곳


3.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조직
  : 회사의 성장이 구성원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가는 조직 (회사의 성장이 개인의 이익과 직결되는 조직)
  : 구성원을 부품으로 여기지 않고 ‘어른’으로 대하는 조직
 

4. 내일 회사가 문을 닫아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그럼에도 남기를 택한 동료들과 일할 수 있는 조직



위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지난 7개월 동안 한 일은 다음과 같다.


1.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가 팀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구색은 갖춰가고 있다. (원래는 최종 아웃풋을 내야하는 개발자가 납품일에 다급해진 두 대표님께 구두로 업무를 지시받아 별별 업무를 했다.) 역할 조직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할 부분이다. 각자의 역할에 대한 기대치가 다르다 보니 꾸준히 잡음이 발생하고 있지만 차차 나아질거라 믿고싶다.


2. 협업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세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프로젝트 진행 히스토리 아카이빙. 둘째,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구성원들에게 공유. 셋째, 개인 카카오톡을 이용한 업무 대화 근절.


3. 노동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구성원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회사에서의 업무가 중요한 만큼 개인의 일상도 중요한 법이다. 오랜 시간 붙잡아 놓고 채찍질만 하는 건 창의적인 업무를 해야하는 회사에 맞지도 않는다. 개인의 노동이 돈(연봉, 인센티브) 혹은 시간(대체 휴가, 보너스 휴가)와 등가교환 되어야하는 것은 언급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존중’은 기본적인 보상에서 한 스텝 더 나가 동료를 대하는 마인드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나만 잘나 인성이 썩은 사람에게는 기대하기 힘들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조직을 쉽게 떠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근무한지 얼마 안 됐을 때, 프로젝트 매니징 실패로 동료의 휴가가 통째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일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곳에서 구성원의 휴가가 일정에 반영이 됐을 리 없었다. 아무도 미안해하지 않았고, 돈으로 보상을 하지도 않았다. ‘회사에 일이 생겼는데 어디가’ 라는 발상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구성원들을 부품으로 생각하는 건가’ 싶어 발을 빼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연차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았고, 원하는 시기에 눈치보지 않고 쓴 적이 별로 없다고 했다. 연말에 경영지원팀에 동료들의 잔여 연차 현황을 물었다. 다들 잔뜩 남아있었다. 원하는 기간을 신청 받아 11월-1월 3개월에 걸쳐 18년도 연차를 전부 소진했다.


4. 업무 매뉴얼을 만들었다. 굳이 인쇄물로 만들어 배포한 이유는 명확하다. 상대가 독단적으로 프로세스를 어겨 업무에 차질을 줄때, 감정 상하지 않게 조율할 수 있는 장치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0.9 버전을 배포했고 시범 운영 중이다.


5. 집중 업무시간이 생겼다. 동아리방 드나들듯 시도때도 없이 다른 팀의 업무 공간에 들락날락 하지 않고, 같은 팀 동료들끼리도 그 시간에는 회의실에서 회의한다. 나같은 경우에는 고객사와 통화해야할 일이 많은데, 집중 업무시간에는 회의실에서 전화를 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실망스럽겠지만, 이게 다다. 이 마저도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아서 계속 다듬어야한다.



앞으로 4년 5개월


지난 7개월 간 이 작은 조직에서 크게 두 가지를 깨달았다.


1. 동료가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 상대를 탓할 게 아니라 내가 제대로 맥락을 전달했는지 짚어봐야 한다.

2.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도 새로운 제안이 나올 수 있다. 이를 불만이라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배울 점이 많은 동료들과 일하고 있다. 직급을 떠나 나보다 뛰어난 동료가 옆에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경계하기 보다는 새겨 듣고 같이 고민하는 게 좋다.


누군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질 거라 기대할테고, 누군가는 (여전히) 어차피 안될 거라 생각할테다. 처음 회사에 왔을 때 난파선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다르지 않다. 이전보다 폭풍이 덜 불긴 하지만, 여전히 난파선 같다. 매니저의 업무가 어려운 이유는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고객이 아닌 동료에게 평가받기 때문이다.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좋은 매니저까지는 못되어도 너무 별로인 매니저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근한다.


내쫓기지 않는 이상 5년을 목표로 잡고 회사에 들어왔다. 설령 5년 후에 ‘좋은 동료들이 머물고 싶은 조직’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게 내 역량이 부족해서인지 혹은 회사의 그릇이 작아서인지 알려면 그래도 5년은 해봐야겠다고 판단해서다. (5년 후에는 모르겠다. 원하는 모습이 되어있다면 나 역시 머물고 싶어지겠지만, 일단은 아주 길게 여행을 갈 생각이다.)


이제 4년 5개월 남았다. 조직 내에 누구 하나 나를 있는 그대로 안아줄 사람은 없지만, 내가 먼저 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고 싶어서, 좋은 동료들이 머물고 싶은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나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머물고 싶게 하는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노마드 라이프를 잠시 미루고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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